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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김혜진의 세상 속 노동조합, 노동조합 속 세상 : 우리 안의 능력주의에서 벗어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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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국민주연합 조회468회 작성일 21-06-18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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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김혜진의 세상 속 노동조합, 노동조합 속 세상 : 우리 안의 능력주의에서 벗어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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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한 사업장의 임단협 요구안 설명회에 참여했을 때의 일이다. 조합원들은 무기계약직과 계약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함께 일하는 공무원에 비해서 임금이 매우 낮았다. 그 때 지부장은 요구안을 설명하면서 ‘정규직과 똑같이 해달라는 것은 아니지만’이라는 말을 몇 번씩 반복했다. 나는 너무 궁금하여 손을 들고 질문했다. “왜 정규직과 똑같이 해달라고 하면 안 되나요?”라고 말이다. 무례한 질문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사려 깊은 지부장은 생각을 하더니 설명회가 끝날 무렵 답변을 했다. 지부장은 ‘왜 자기가 그런 말을 했을까’를 고민했다며, 자신도 모르게 시험을 보고 들어온 정규직과 자신의 차별적 처우를 인정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그 지부장의 고민이 계속 마음에 남았다. 그래서 그 후 공공부문에서 일하는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물어보았다. 정말로 정규직과 동일한 노동조건이 되는 것에 대해서 거리낌이 있냐고. 대다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슷하게 답변했다. 특히 비정규직 노조 집행부들이 그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설령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더라도, ‘정규직과 똑같은 노동조건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면 사회적인 비판을 받게 되고, 정규직과의 연대도 어려워지기 때문에 어느 정도 요구를 조절하게 된다는 이야기도 했다. 공공부문 비정규직은 ‘시험을 통과하지 않았기 때문에 차별이 있어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을 어쩔 수 없이 수용하고 있는 셈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을 ‘합리적 차별’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합리적인 차별’은 없다. 기업과 정부는 노동자들을 갈라놓고 위계화하면서 차별을 한다. 학력을 기준으로 차별을 하기도 하고, 여성은 생계부양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차별을 하기도 했다. 장애인과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차별도 당연하게 여긴다. 노동자들이 열심히 싸워서 차별을 조금씩 없애왔지만 성별ㆍ나이 등의 차별이, 고용형태에 의한 차별, 직무에 따른 차별, 입직통로에 의한 차별과 슬며시 결합해서 대다수 노동자들을 권리에서 배제한다. 능력주의는, ‘능력에 따른 임금’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노동자의 조건을 근거로 그의 권리를 빼앗아가는 것이며, 빼앗긴 권리는 기업의 이윤으로 돌아간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에 노골적으로 반대하며 ‘시험보고 들어오라’는 정규직 일부의 비난이나 언론의 태도를 보면서,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상처를 입고 위축되기도 했다. 무기력감도 들고 여론의 눈치를 보기도 한다. 그런데 지금의 능력주의는 자본가들의 무기일 뿐이다. 지금은 ‘시험’이 매우 중요한 기준인 것처럼 이야기되지만, 노동자를 가르는 기준은 자본가들이 언제라도 필요에 따라 바꾼다. 예전에 높은 능력을 증명했던 자격증이 지금은 쓸모 없는 것이 되는 것처럼. 게다가 시험을 통과한 정규직이라고 하더라도 기업의 구조조정에 따라 언제라도 불안정한 노동자가 될 수 있다. 능력주의 사회라고 하지만 노동자들은 늘 기업에 의해 평가받는 사람들일 뿐이다. 


능력주의에 대한 반대가 ‘비정규직이 정규직과 동일한 임금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정규직과 비교해서 이 정도!’가 우리의 요구여서는 안 된다는 점이 핵심이다. 예를 들어 ‘누구라도 죽지 않고 일할 권리’는 모두에게, 온전하게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지, 연령이나 성별, 국적, 고용형태에 따라 일부라도 제한되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말이다. 모든 노동자는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어야 하고, 생활하기에 충분한 임금을 받아야 하고, 안전하게 일해야 하며, 스스로 단결하여 노동조건을 개선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권리’이다. 권리는 누구와 비교할 수 없으며, 절대적으로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누구와 비교 없이 우리에게 필요한 권리를 그 자체로 요구해야 한다.  


물론 원청이 교섭에 나서지도 않고, 계약해지의 위협도 있는 비정규직이 자신의 권리를 당당하게 말하기는 더욱 어렵다. 투쟁의 결의는 충천하지만 그것을 한 번에 이루기 어려울 때가 많다. 그래서 늘 우리의 요구는 단계적일 수밖에 없고, 때로는 힘에 부쳐서 후퇴하기도 한다. 그런데 요구가 단계적이라거나 후퇴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없다. 정말 문제는 ‘우리는 비정규직이니까 이만큼이면 된다’고 우리의 권리를 알아서 제한하는 것이다. 지금 당장은 힘이 없어서 쟁취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토론하면서 꿈을 크게 꾸어야 한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한 발 나아갈 것인지를 고민하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가끔 비정규직 중에도 우리 사이의 차이를 강조하거나 다른 노동자들의 권리를 생각하지 않는 노동자들이 있다. 공무직과 민간위탁 노동자들은 다르다고 생각해서 노동조건의 차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나와 고용형태나 업종이 다른 노동자들을 조직하여 함께 투쟁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노동자들도 있다. 위험한 업무를 이주노동자들에게 떠넘기거나 일용직 노동자들에게 넘기자고 하는 노동자들도 있다. 하지만 이런 분할이 바로 기업이 노동자들을 통제하는 방식이다. 정규직과 비교하여 나의 권리를 생각하지 않아야 하는 것처럼, 나의 권리와 다른 이들의 권리를 비교하여 우위를 만들어두지 않고 어떻게 함께 싸울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가장 열악한 조건에 있는 노동자가 안전하면 우리 모두가 안전할 수 있다. 가장 낮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가 인간답게 생활할 수 있는 임금을 받는다면 우리 모두가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한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모두의 노동에 기대고 있다. 모든 노동은 연결되어 있기에 중요하거나 핵심적인 노동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노동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필요한 노동을 하는 모든 노동자는 동일하게 권리가 있다. ‘정규직과 똑같이 해달라는 것은 아니고’라는 능력주의 인식에서 우리 스스로 벗어나, ‘나와 다른 노동자는 다르다’는 인식에서 벗어나, 모든 노동자의 권리를 고민하고 더 넓게 연대할 때 모두의 권리가 지켜질 수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