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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김세창의 으랏차차 : 이소룡에게 까불면 벌어지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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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국민주연합 조회560회 작성일 21-06-18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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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김세창의 으랏차차 : 이소룡에게 까불면 벌어지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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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요 ∼

소시적에 쌍절곤 하나 사보지 않은 사람없고, 철없이 휘두르다가 머리에 혹 나보지 않은 사람 없을 겁니다.

중고등학교때는 가방에 쌍절곤을 넣어 다니며 어깨에 힘주고 침 좀 뱉던 애들도 간혹 볼 수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함자는 몰라도 이소룡 석자는 알던 근본없는 애들도 있었습니다.


불후의 명작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의 주인공이 복수심에 불타 샌드백을 치고 쌍절곤을 돌리던 장면이 떠오릅니다. 당시 쌍절곤은 약자의 벗이었으며, 복수의 아이콘이었습니다.

여하튼 어린 시절 내 눈에 비친 이소룡은 권선징악의 화신이었고, 사필귀정의 세상이치를 실천하던 저승사자이기도 했습니다.


이소룡의 기질은 처음에는 수모를 참고, 뺨 세대 정도는 맞아 주지만 손을 한 번 대면 끝장을 본다는 겁니다. 중국 무협영화의 특징이 대부분 그렇습니다. 엽문, 황비홍, 곽원갑, 돌아 온 외팔이 ,,, 등등 


오늘 얘기를 풀어 보겠습니다.

명진이는 할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초등학교때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청천벽력같은 아픔을 겪어야 했고,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부모의 품을 언제나 목말라 했습니다.

할머니를 잘 모셔야겠다는 생각이 큰 만큼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인문고를 졸업하자마자 척박하기 그지없던 전자회사에 취직하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불과 6달 밖에 되지 않은 사회 초년생이었던지라 다니던 회사에서 가장 막내였습니다. 보송보송한 솜털이 채 가시지 않은 앳띤 명진이가 언니, 아주머니들로부터 얼마나 귀여움을 받았을지는 상상이 갈 겁니다.


출근 이튿날부터 잔업에 야근까지 뺑뺑이가 시작되었습니다.

반찬하나 더 챙겨주는 어머니뻘 노동자부터 임금계산법을 머리 한번 쥐어 박지 않고 알뜰히 가르쳐주는 언니 노동자까지 마치 한 동네 옆집에서 오랫동안 산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친해지게 되었습니다. 사실 명진이도 수다하면 빠지지 않는 입담의 소유자였거든요. 명진이는 잠이 쏟아지고 일은 힘들었어도 사람사는 온기와 정을 위안삼으며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명진이는 자신이 일하는 부서의 야근하는 언니들에게 음료수를 한병씩 돌렸습니다.

그저 언니들이 피곤하겠다 싶어 뒤탈이 있을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음료수를 돌렸던거죠.

다음 날, 출근하니 생산부장이 부른다 하여 이유도 모른 채 가 보니 다짜고짜 “야, 니가 뭔데 라인에 음료수를 돌려!” 허걱,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입니까. ”예? 나 혼자 먹기 그래서 몇병 더 사서 돌린거 뿐인데요?” 명진이는 별 것도 아닌 일에 생산부장이 왜 이리 생지랄을 떠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십수개월 후에 명진이는 “피로회복제 한 병은 그저 음료수가 아니라 노동자의 마음을 뭉치게 하는 정성이자 의리”였다고 스스로 정리하였습니다.


정의감에 넘치는 청춘인 명진이는 은근히 분한 마음이 치밀어 올랐습니다.

이 때만 해도 명진이가 회사에서 뭘 어떻게 해보겠다는 목표나 계획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저 어머니, 언니들이 너무 고생한다는 안쓰러운 마음밖에 없었고, 이상하리만큼 주눅들어 서로 말을 쉬쉬하는 분위기가 그리 정상적이지는 않은 것 같다고 생각할 뿐이었습니다.


명진이는 근무시간에 껌을 씹어 보자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한번 들이대겠다는 거였죠.

간이 부어도 유분수라는 말이 명진이에게 딱 들어 맞았습니다.

전자조립 라인에서 잡담을 하거나 껌을 씹는 것은 금기의 벽에 도전하는 대단히 위험한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껌씹은 죄(?)로 명진이는 생산부장에게 귀싸대기를 맞았습니다. 

명진이는 울지 않았지만 화를 억누를 수 없었습니다.

100kg도 넘는 거구의 생산부장이 키 150cm도 안되는 20살 여공(?)의 귀싸대기를 때린 천인공로할 반인권 갑질폭력 사태는 관리자를 포함해 300명이 넘었던 회사에 입에서 입으로 퍼졌습니다. 물론 동정과 비난으로 여론은 확연히 갈렸습니다.

그냥 넘어 갈 사측이 아니었습니다. 왜 껌을 씹었는지 경위서와 함께 관리자의 지시를 어기고 조업에 지장을 끼칠 경우에는 순순히 해고를 받아들인다는 각서까지 썼습니다.


이 사건을 겪고 난 후부터 명진이는 말수가 없어지고 긴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아, ‘공동경비구역(JSA)’이나 ‘동막골 사람들’이라는 영화의 구상도 이렇게 순식간에 떠올랐을까요!

퇴근 후 공단 버스 정류장에서 머리띠를 동여 맨 노동자들이 00회사 노조 투쟁 유인물을 나눠 주는게 아니겠습니까! 심봉사보다 더 빠른 속도로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임금체불 해결투쟁 과정에서 임금 인상과 노조 결성 및 전임자 쟁취’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몇일 뒤부터 명진이는 공단 입구에 있는 00노동상담소의 계단이 닳도록 오르락내리락 하게 되었습니다.

명진이는 여러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는게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어머니 언니들이 가장 절실하게 바라는게 뭔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회사는 회사대로 예전에 없던 소동이 생긴 터라 사무실에서 현장을 감시하는 통유리창의 크기를 더욱 크게 만들었고 관리자들의 태도도 더 위압적으로 변했습니다. 사람들은 위축되고 현장 분위기도 얼어 붙게 되었습니다. ‘나 때문에’라는 죄책감이 커질수록 명진이의 언행은 이전과 다르게 어딘가 모르게 절제되고 결연해져 갔습니다.

이 때부터 명진이는 잠꼬대마저 노조결성이라고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세상물정 모르고 결혼도 안한 21살 앳띤 초보가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어머니, 언니 노동자를 설득하는데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지 아마 짐작이 갈 겁니다. 욕도 많이 먹고 외면도 받았습니다. 그 때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었던 말이 “너도 시집가서 애 놔바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잠시 시간을 훅 뒤로 돌려 보겠습니다.

1930년대 세계대공황은 조선을 식민지로 강점 통치하며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외치며 아시아 여러 나라에 침략전쟁과 학살을 벌이고 있었던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조선총독부와 일본자본가들은 조선노동자 해고와 임금삭감 그리고 노동시간 연장을 통해 이윤착취와 전쟁비용 끌어모으기에 안간힘을 썼습니다.

당시 평양에는 2,300명의 고무공장 노동자들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고작해야 년봉 120∼140원의 기아임금을 받던(1930년에 쌀 80kg에 13원. 1년 뼈빠지게 일해야 쌀 10가마니를 살 정도였음)상황이었는데 평양고무동업회에서 평균임금을 17%정도 깎겠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하자 평양고무직공조합은 ‘임금인하와 해고반대’를 내걸고 파업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자본가들과 경찰은 대체인력투입, 용역 불량배의 폭력, 빨갱이 딱지 붙이기, 노조 지도부 구속 등으로 탄압하였지만 노동자들은 현장복귀 거부와 선전전으로 맞섰고, 대체인력투입도 다른 노동자들이 응하지 않음으로써 무산되었습니다.

1931년 5월 17일, 임금 17% 삭감을 일방적으로 통보받은 평원고무공장 여성 노동자 49명은 파업에 돌입했고, 공장 측이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자, 5월 28일에 ‘아사동맹’을 결의하고 단식 투쟁에 나섭니다. 다음날 경찰에 의해 49명 전원이 공장 밖으로 내쳐지고 해고당하게 됩니다.

마침내 1931년 5월 29일, 고무노동자 강주룡은 평양 을밀대에 올라 한국 노동운동사에서 최초로 9시간 30분에 걸친 고공농성을 벌이게 됩니다. 을밀대로 몰래 올라 온 소방대원에게 밀쳐져 아래로 떨어진 강주룡은 기절하였고, 평양경찰서에 끌려갔지만 4일 동안의 단식 끝에 풀려 났습니다.마침내 6월 8일, 평원고무공장 사측은 임금 삭감을 철회하고 파업참가 노동자의 절반을 복직시킨다는 내용으로 백기를 들고 말았습니다.

강주룡은 그 후 노조활동을 이유로 평양 형무소에서 옥고도 치루었지만 끝내 병마에 시달리다가 1931년 8월 13일에 31살의 나이로 삶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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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노동운동사 최초로 고공농성을 벌인 주역.

 3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고무노동자 강주룡     



다음은 식민지 노동운동의 투사였던 고무노동자 강주룡이 을밀대에 올라 외친 연설의 일부입니다.

“우리는 49명 파업단의 임금감하를 크게 여기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결국은 평양의 2,300명 고무공장 직공의 임금감하의 원인이 될 것이므로 우리는 죽기로서 반대하려는 것입니다. 2천 3백명 우리 동무의 살이 깍이지 않기 위하여 내 한 몸둥이가 죽는 것은 아깝지 않습니다. 내가 배워서 아는 것 중에 대중을 위해서는(중략) 명예스러운 일이라는 것이 가장 큰 지식입니다. 이래서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이 지붕 위에 올라왔습니다. 나는 평원고무사장이 이 앞에 와서 임금감하 선언을 취소하기까지는 결코 내려가지 않겠습니다. 끝까지 임금감하를 취소치 않으면 나는 근로대중을 대표하여 죽음을 명예로 알 뿐입니다. 그러하고 여러분, 구태여 나를 여기서 강제로 끌어낼 생각은 마십시오. 누구든지 이 지붕 위에 사다리를 대놓기만 하면 나는 곧 떨어져 죽을 뿐입니다.”

주권도 나라도 빼앗긴 일제 식민치하의 90년 전의 노동자들과 지금의 노동자들의 모습은 ‘노동해방’을 향한한 줄기의 역사속에 있습니다. 2021년에도 여전히 머리띠를 동여 매고 살아야 하는 노동자들의 투쟁연설과 너무 똑같지 않습니까!


다시 타임머신을 타고 명진이네 회사로 가 보겠습니다.

오, 천지신명이시여! 하늘은 투쟁하는 노동자를 돕는다고 했던가요! 또 하나의 사건이 터졌습니다.

친한 언니가 화장실에 갔다가 갑자기 월경을 하게 되었는데 휴지도 없어서 곤혹을 치뤘다고 하면서 화장실에 신문지 쪼가리 오려서 놓지 말고 휴지를 비치해 달라고 회사에 건의했다가 쌍욕을 듣게 되었습니다. “야, 너는 여자라는게 그렇게 준비성도 없고 칠칠맞냐”, 이게 말인가요 폭탄인가요! 요즘이었다면 인권침해와 여성비하 등으로 신문에 날 어마무시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사람들의 눈은 명진이에게 쏠리기 시작했습니다. 가정을 책임져야 했던 언니 어머니 노동자들은 선뜻 앞에 나설 수 없었겠죠. 

불안한 마음을 가득안고 어렵게 시작한 잔업거부투쟁에서 관리자 폭언 사과와 재발방지, 식사 질 개선, 통근버스 증편, 상여금 인상, 회식비 강제 부담 중단 등 여러 가지 요구가 쏟아졌습니다. 

묵묵히 현장을 지켜 왔던 우리 멋진 노동자들은 가장 중요한 요구사항을 하나씩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이걸 정리하는데 보름이 넘게 걸렸습니다. “임금인상이 절박하지만 그건 노조만 결성되면 또 할 수 있다.”, “화장실 문제가 가장 시급하다.”, “노조 만들려다 안되면 다른 것도 물거품되는거 아니냐” 등등 많은 의논이 오고 갔지만 가장 중요한 목표는 ‘노조결성’으로 정해졌습니다.

매출이익 축소, 회사 대표의 문어발식 투자와 회사공금 유용, 관리자에 친인척 고용, 회사대표의 사치스런 사생활 등 의혹 들에 대해서도 조사에 들어 갔습니다.

마침내 노조 결성 보고대회를 하는 날, 회사 강당에 모두 모인 노동자들은  난생처음 노동조합의 깃발아래 조합원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동지라는 뭉클한 감동을 안고 모두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명진이는 어머니들의 강력한 추천으로 당당히 노동조합 총무부장이 되었습니다.

초대 위원장이 된 언니 노동자는 이렇게 토해냈습니다.

“우리가 노조를 만들자고 했던 것, 그거 거창한 게 아닙니다. 근무시간에 눈치 보지 않고 화장실 갈 권리, 생리휴가는 눈치봐야 할 문제가 아니라 여성의 절대적인 권리입니다.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최소한의 권리를 되찾자는 거잖아요. 주는 대로 먹는다면 사람이 아니라 개죠. 이제 우리는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했던 노예의 비참함을 벗어 던지고 당당한 노동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첫 발자욱을 뗐습니다. 변하지 않는 것을 변화시키기 위해 투쟁합시다. 상상했던 것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단결합시다. 이제 우리는 동지입니다.!”


잠자는 사자의 코 털을 건드리는 것과 이소룡에게 까부는 것은 같은 결과를 가져 옵니다.

20살 앳띤 여성노동자의 싸대기를 때린 회사가 치룬 댓가는 무노조의 창업신화가 깨부서져 나간 자리에 수많은 노동투사가 우뚝 서게 되는 것을 지켜 보는 일이었습니다. 


천 길 높이의 큰 둑도 사소한 개미구멍이 커져서 무너지고, 99칸의 고대광실도 아궁이에서 시작된 불이 원인이 되어 잿더미로 변한다고 합니다. 아무리 큰 산도 손가락 굵기의 발파구멍만 있으면 평지로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으랏차차 동지들, 이것이 차별과 불평등없는 진정한 노동존중의 새세상을 위해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가져야 할 근성이자 결기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자의 신분과 권리를 법과 제도로 규정합니다.

그래서 노동조합의 투쟁역사는 노동시간 단축투쟁의 역사이며, 근로기준법과 노동3권 쟁취투쟁의 역사와도 같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자본의 입장을 대변하는 세력들이 법을 만든다는데 있습니다. 때문에 법을 만들고 개정하는 투쟁은 사법·입법·행정·언론을 비롯한 모든 유무형의 공권력을 동원한 국가권력과 노동자의 투쟁이자 자본가와 노동자의 피할 수도 없고 양보할 수도 없는 투쟁이라고 합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과정이나 소위 ‘노동자성’을 둘러싼 법적 다툼을 보십시오. 노동자들은 ‘죽지 않을 권리’와 ‘노동법의 보호를 받을 권리’에 지나지 않을 정도의 소박하지만 절박한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나서서 간접고용을 없앤다고 온갖 쇼를 다 했지만 결국은 자회사를 통한 직고용이라는 사기극으로 막을 내렸고, 중대재해법은 누더기법이 되어 버렸습니다. 법원이 복직 판결을 내리고 포괄임금제를 고치라고 해도 고용노동부나 기업측에서는 ‘나몰라’, ‘배째라’하면서 나자빠집니다. 이러한 현실이야말로 국회를 뒤바꾸고 노동존중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정부를 세우는데 까지 노동자의 투쟁이 쉼없이 달려 나가야 하는 이유를 명백히 말해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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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랏차차 동지들, 

한국의 자동차 재벌들이 미국에 44조원을 투자하겠다는 뉴스가 나오는 판에 아직도 경비·청소노동자들은 휴게실도 없이 화장실에서 식사를 해야 하는 쌍욕나오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노동자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죽어 나가고 있고, 간접고용과 불법파견 그리고 구조조정에 맞서 싸우고 있습니다.

정부는 법과 금융과 언론을 앞세우고 외교까지 동원해 자본활동은 적극 지원하지만 노동자의 문제는 방치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코로나19까지 겹쳐 생계가 막막한 노동자는 늘어 나고, 플랫폼 노동자는 점점 늘어나지만 법의 사각지대에서 힘겨운 생존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노동자가 땀흘리지 않았다면 558조의 정부예산이 하늘에서 뚝 떨어졌겠습니까.

53조에 달하는 국방비로 주한미군이 오염시킨 땅을 정화시키는데 쓰고, 미국 무기 사들이고, 한미동맹의 이름으로 한반도 긴장을 고조시키는 한미합동군사훈련하는데 돈을 퍼붓습니다.

정부가 자주적이라면 자기 나라 노동자의 차별과 불평등을 없애는데 먼저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앞으로 노동자의 요구는 “국가와 정부기관이 책임져라”는 투쟁으로 더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모든 공공기관의 노동자들을 직고용으로 만드는 것도 힘겨운 일이지만, 직고용이 되어도 구조조정과 고용안정문제는 근원적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앞서 보았듯이 고무노동자 강주룡은 평양의 모든 고무노동자의 생계와 권리를 위해 을밀대 고공농성을 함으로써 조선노동자의 계급적 단결과 투쟁심을 높여 내었습니다.


갈 길은 멀고 험하지만 가야 한다면 못 갈 길이 없습니다.

없던 길도 자주 다니면 길이 된다는 말도 있습니다.

내일 만나는 동료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면서 우리 노동자들의 승리의 기운을 더 높이면 좋겠습니다.

특혜와 특권을 없애고, 차별과 불평등을 깨부시며 정의와 상식이 승리하는 세상을 위해서.


으랏차차 동지들!

이제 여름의 문턱으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노동자가 건강하게 투쟁해야 나라가 바로 섭니다.

모두 건강합시다.


다음은 『1953년 10월에 벌어진 기막힌 일』이라는 제목으로 찾아 뵙겠습니다. 투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