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늙은노동자 김윤조 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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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국노조 조회503회 작성일 21-06-18 13:26본문
글=권종술 기자 jsgweon@kdlpnews.org
사진=정택용 기자 mipaseok@kdlpnews.org
얼마 전 당원게시판에 눈에 띄는 글이 하나 올라왔다. 당원번호 17608번. 자신을 초등학교만 나온 65세의 노동자라고 소개한 김윤조 당원의 글이었다.
“비록 힘은 없지만 늙은 노동자 당원의 호소를 받아주기 바랍니다. 지금이라도 심상정, 노회찬의원이 다시 돌아온다면 민주노동당은 지금보다 더 발전할 것입니다. 두 분에게 요구합니다. 돌아올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 같은 힘없는 노동자당원들의 간절한 요구이자 명령입니다.”
절절하게 써내려간 그의 글은 금세 화제가 되었다. 당원들의 블로그를 통해 ‘어느 늙은 노동자 당원의 호소’라는 부제가 붙어서 전파되기 시작했다. “민주노조 조합원, 민주노동당 당원은 죽을 때까지 가져갈 나의 신념”이라는 김윤조 당원을 만났다.
“민주노동당은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그를 만난 곳은 영등포에 있는 전국민주연합노동조합 사무실이었다. 지난해 환경미화원으로 정년퇴직을 한 그는 이곳에 가끔씩 들러 일을 도와준다고 했다. 사무실을 찾았을 때 ‘당원 동지들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제목의 글을 정성들여 손으로 한 자 한 자 직접 적고 있었다. “민주노동당은 아직 죽지 않았다”고 당원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노동조합과 민주노동당을 통해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을 배운 그는 그 소중함에 대해서 당원들에게 절절하게 말하고 싶어 했다.
노회찬, 심상정 의원에게 글을 쓰게 된 사연을 물었다.
“의정부지역위원회에서 매일 같이 봉사해왔습니다. 그런데, 지난 달 24일 대의원대회를 통해 지역의 해산 결의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홍희덕 후보와 함께 사무실에 갔다가 모멸을 당했어요. 물론 당이 잘못한 것도 있지만 당원들을 무시하는 것 같아 분노했습니다. 믿고 의지했던 사람들이, 배웠다는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 탈당해서 나가니깐 그들을 믿고, 의지했던 나로서는 속상한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화가 났다. 처음에는 화부터 났지만, 언젠가는 꼭 돌아오리라는 믿음으로 글을 적었습니다.”
50년 노동자 인생, 민주노동당을 만나다.
해방 직전인 44년에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이발소에 견습으로 들어갔다. 기나긴 50여 년간의 노동자 생활의 시작이었다. 이후 난방 공사 노동자, 책 외판원 등을 거쳐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환경미화원으로 24년간 일하게 됐다. “입이 있어도 말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던 시대”를 묵묵히 살아왔던 그에게 새로운 입과, 새로운 눈과, 새로운 귀를 가져다 준 곳은 민주연합노조와 민주노동당이었다.
“거리에서 청소를 하면서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켜봤습니다. 나도 저들과 함께 하면 좋겠습니다. 내 권익도 보호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는 지난 2000년 드디어 민주노조가 만들어져서 민주노총 조합원이 됐다. “당시 3개월의 파업투쟁으로 간부 6명이 구속되기도 하였고, 전 조합원이 경찰서로 연행되는 탄압도 받았습니다. 노동자가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지만 내 권리를 주장할 수 있어 너무나 좋았습니다”라고 그 시절을 회상했다. 그리고 민주노총 조합원이 된 그해에 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자신들의 투쟁에 매번 결합해온 민주노동당 당원이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노동자는 분열하면 죽고, 단결하면 산다.
민주노총 조합원이 된 기쁨과 함께 시련도 찾아왔다. 60여 명이던 회사 조합원은 회유와 탄압으로 8명으로 줄었다. 탈퇴한 사람들은 회사의 지시대로 어용노조를 만들어 노동자들을 분열시키기도 했다. 120명이 근무하는 회사에 조합원이라고는 8명의 50대들 뿐이었다. 그는 밤잠을 설치며 괴로워했다.
결국 회사는 구조조정을 했고, 4개의 회사로 분리시키고 말았다. 숨도 쉬지 못하며 지내던 그때 그들에게 힘이 되어 준 것은 민주노동당이었다. 지난 2004년 총선 때는 신나게 선거운동에 참여했다. 그리고 결국 민주노동당은 승리했다. 10명의 국회의원이 탄생한 것이다.
“결국 민주노동당은 승리했고, 10명의 국회의원이 탄생했습니다. 자랑스럽게 국회에 입성하는 민주노동당 국회의원들을 보며 감격하였습니다. 우리를 대변하는 국회의원이 생겼다는 생각에 절로 기분이 좋았고 3년간의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갔습니다. 그 덕에 한국노총 기업노조하던 옛 동료들이 어용노조를 해산하고 민주노조에 가입하였습니다. 힘이 났습니다. 정말 신이 났습니다. 심상정, 노회찬 의원처럼 내가 국회에 입성하는 것처럼 좋았습니다.”
이뿐이 아니었다. 숨죽여 지내던 8명의 조합원이 100명으로 불어나고, 노조 가입 4년 만에 단체 협약도 체결했다. 임금도 인상됐고, 정년도 늘어났다.
“나는 동료들과 펑펑 울었습니다. 3년간 분열되어, 8명이 남아 결국 민주노조를 사수하고 민주노조와 민주노동당이 이겼다는 생각에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깨달았다. “노동자는 분열하면 죽고, 단결하면 산다는 것”을.
“떠난 이들도 언젠가는 돌아올 것입니다.”
그런 그였기에 민주노동당의 분열은 커다란 아픔이었다. 분열되어 고생했던 조합시절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대선이 끝난 뒤 신문에 거론되던 자주파니, 평등파니 그에게는 모두 생경한 단어들이었다. “심상정, 노회찬 의원이 텔레비전에 나올 때마다 자랑스러웠습니다. 나는 노회찬 의원을 지지하는 모임에도 가입하였습니다. 노회찬 의원을 3번 이상 만났습니다. 심상정 의원도 2번 이상 만난 적이 있습니다. 우리 같은 이름 없는 당원들이 지난 8년 동안 아무 대가도 없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돌아다니며 지켜낸 것이 민주노동당이고, 심상정, 노회찬 두 의원입니다.” 그래서 그는 왜 분당을 하고, 탈당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도 그는 그들이 돌아오리라 믿고 있었다. 이번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승리한다면 이번에 나간 이들 모두가 돌아오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헤어지는 순간 또박또박 적은 ‘당원 동지들에게 드리는 글’을 건넸다.
사진=정택용 기자 mipaseok@kdlpnews.org
얼마 전 당원게시판에 눈에 띄는 글이 하나 올라왔다. 당원번호 17608번. 자신을 초등학교만 나온 65세의 노동자라고 소개한 김윤조 당원의 글이었다.
“비록 힘은 없지만 늙은 노동자 당원의 호소를 받아주기 바랍니다. 지금이라도 심상정, 노회찬의원이 다시 돌아온다면 민주노동당은 지금보다 더 발전할 것입니다. 두 분에게 요구합니다. 돌아올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 같은 힘없는 노동자당원들의 간절한 요구이자 명령입니다.”
절절하게 써내려간 그의 글은 금세 화제가 되었다. 당원들의 블로그를 통해 ‘어느 늙은 노동자 당원의 호소’라는 부제가 붙어서 전파되기 시작했다. “민주노조 조합원, 민주노동당 당원은 죽을 때까지 가져갈 나의 신념”이라는 김윤조 당원을 만났다.
“민주노동당은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그를 만난 곳은 영등포에 있는 전국민주연합노동조합 사무실이었다. 지난해 환경미화원으로 정년퇴직을 한 그는 이곳에 가끔씩 들러 일을 도와준다고 했다. 사무실을 찾았을 때 ‘당원 동지들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제목의 글을 정성들여 손으로 한 자 한 자 직접 적고 있었다. “민주노동당은 아직 죽지 않았다”고 당원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노동조합과 민주노동당을 통해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을 배운 그는 그 소중함에 대해서 당원들에게 절절하게 말하고 싶어 했다.
노회찬, 심상정 의원에게 글을 쓰게 된 사연을 물었다.
“의정부지역위원회에서 매일 같이 봉사해왔습니다. 그런데, 지난 달 24일 대의원대회를 통해 지역의 해산 결의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홍희덕 후보와 함께 사무실에 갔다가 모멸을 당했어요. 물론 당이 잘못한 것도 있지만 당원들을 무시하는 것 같아 분노했습니다. 믿고 의지했던 사람들이, 배웠다는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 탈당해서 나가니깐 그들을 믿고, 의지했던 나로서는 속상한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화가 났다. 처음에는 화부터 났지만, 언젠가는 꼭 돌아오리라는 믿음으로 글을 적었습니다.”
50년 노동자 인생, 민주노동당을 만나다.
해방 직전인 44년에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이발소에 견습으로 들어갔다. 기나긴 50여 년간의 노동자 생활의 시작이었다. 이후 난방 공사 노동자, 책 외판원 등을 거쳐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환경미화원으로 24년간 일하게 됐다. “입이 있어도 말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던 시대”를 묵묵히 살아왔던 그에게 새로운 입과, 새로운 눈과, 새로운 귀를 가져다 준 곳은 민주연합노조와 민주노동당이었다.
“거리에서 청소를 하면서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켜봤습니다. 나도 저들과 함께 하면 좋겠습니다. 내 권익도 보호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는 지난 2000년 드디어 민주노조가 만들어져서 민주노총 조합원이 됐다. “당시 3개월의 파업투쟁으로 간부 6명이 구속되기도 하였고, 전 조합원이 경찰서로 연행되는 탄압도 받았습니다. 노동자가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지만 내 권리를 주장할 수 있어 너무나 좋았습니다”라고 그 시절을 회상했다. 그리고 민주노총 조합원이 된 그해에 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자신들의 투쟁에 매번 결합해온 민주노동당 당원이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노동자는 분열하면 죽고, 단결하면 산다.
민주노총 조합원이 된 기쁨과 함께 시련도 찾아왔다. 60여 명이던 회사 조합원은 회유와 탄압으로 8명으로 줄었다. 탈퇴한 사람들은 회사의 지시대로 어용노조를 만들어 노동자들을 분열시키기도 했다. 120명이 근무하는 회사에 조합원이라고는 8명의 50대들 뿐이었다. 그는 밤잠을 설치며 괴로워했다.
결국 회사는 구조조정을 했고, 4개의 회사로 분리시키고 말았다. 숨도 쉬지 못하며 지내던 그때 그들에게 힘이 되어 준 것은 민주노동당이었다. 지난 2004년 총선 때는 신나게 선거운동에 참여했다. 그리고 결국 민주노동당은 승리했다. 10명의 국회의원이 탄생한 것이다.
“결국 민주노동당은 승리했고, 10명의 국회의원이 탄생했습니다. 자랑스럽게 국회에 입성하는 민주노동당 국회의원들을 보며 감격하였습니다. 우리를 대변하는 국회의원이 생겼다는 생각에 절로 기분이 좋았고 3년간의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갔습니다. 그 덕에 한국노총 기업노조하던 옛 동료들이 어용노조를 해산하고 민주노조에 가입하였습니다. 힘이 났습니다. 정말 신이 났습니다. 심상정, 노회찬 의원처럼 내가 국회에 입성하는 것처럼 좋았습니다.”
이뿐이 아니었다. 숨죽여 지내던 8명의 조합원이 100명으로 불어나고, 노조 가입 4년 만에 단체 협약도 체결했다. 임금도 인상됐고, 정년도 늘어났다.
“나는 동료들과 펑펑 울었습니다. 3년간 분열되어, 8명이 남아 결국 민주노조를 사수하고 민주노조와 민주노동당이 이겼다는 생각에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깨달았다. “노동자는 분열하면 죽고, 단결하면 산다는 것”을.
“떠난 이들도 언젠가는 돌아올 것입니다.”
그런 그였기에 민주노동당의 분열은 커다란 아픔이었다. 분열되어 고생했던 조합시절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대선이 끝난 뒤 신문에 거론되던 자주파니, 평등파니 그에게는 모두 생경한 단어들이었다. “심상정, 노회찬 의원이 텔레비전에 나올 때마다 자랑스러웠습니다. 나는 노회찬 의원을 지지하는 모임에도 가입하였습니다. 노회찬 의원을 3번 이상 만났습니다. 심상정 의원도 2번 이상 만난 적이 있습니다. 우리 같은 이름 없는 당원들이 지난 8년 동안 아무 대가도 없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돌아다니며 지켜낸 것이 민주노동당이고, 심상정, 노회찬 두 의원입니다.” 그래서 그는 왜 분당을 하고, 탈당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도 그는 그들이 돌아오리라 믿고 있었다. 이번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승리한다면 이번에 나간 이들 모두가 돌아오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헤어지는 순간 또박또박 적은 ‘당원 동지들에게 드리는 글’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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