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짊어지고 온 십자가 당뇨, 고혈압, 지방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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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국노조 조회482회 작성일 21-06-18 13:26본문
내가 짊어지고 온 십자가 당뇨, 고혈압, 지방간
신현봉 (성직자, 강원도 원주군 신림면 용암리 174 용소막 주교관, 0371-47-0990)
늘 몸이 아프고 피곤했다. 피곤, 피곤, 정말 피곤함은 한시도 나를 편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여기저기 몸이 아프니까 주님의 뜻을 알리는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기도로 하루하루를 보냈지만 모든 것이 귀찮고 짜증이 날 뿐이었다. 어쩌면 피곤은 내가 평생 짊어지고 온 십자가였는지 모른다. 고 지학순 주교님의 소개로 장두석 선생님을 알게 되어 자연건강법을 실천하면서 나는 하루가 다르게 건강해졌다. 무엇보다 늘 나를 따라다니던 피곤함이 서서히 가시자 매일매일이 새롭게 다가왔다. 은퇴 후 나는 용소막(원주 소재)에 머물면서 자연건강법에 따라 환자들을 돌보고 있다. 환자들을 돌보면서 나는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신부로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돌이켜보면 평생 나를 괴롭혔던 온갖 질병들은 자연건강법을 만나기 위한 시련이었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하느님은 내게 고통을 통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도록 특별한 은총을 내려주신 것일까. 나는 1930년 9월 2일 전남 광주에서 5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엔 비교적 건강한 편이었다. 어렸을 때 내 꿈은 의사였다. 어느 날 큰형님이 내게 육신의 병을 고치는 것보다 영혼의 병을 고치는 것이 중요하다며 영혼의 병을 고치는 신부가 되라고 권하셨다. 9일 기도를 열심히 하며 간절히 구하라고 하셨다. 그때 우리 가족은 큰형님이 신부님 복사 역할을 하셨기 때문에 성당에 나가고 있었다. 내가 신부의 길로 들어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분은 내게 신학교에 가라고 채근하셨던 나의 대부님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신부가 될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신부님은 이슬만 먹고 사는 분인 줄 알았고, 화장실도 가지 않는 줄 알았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신부가 된단 말인가. 내가 그렇게 고귀한 신부가 될 수 있을까. 대부님과 큰형님의 권유가 매우 간곡하여 나는 머뭇거리며 소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런데 웬일인가. 소신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그렇게 몸이 아플 수가 없었다. 맨 처음 나를 괴롭힌 것은 안질이었다. 눈병이 낫지를 않아 안과란 안과는 찾아가보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늘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몸이 허약해서 그런지 몸살 감기에 시달려 다른 친구들의 학업을 따라가기 힘들었다. 그러다 6·25사변이 터졌고 군대에 들어갔다. 군생활은 건강하게 할 수 있었다. 제대 후 신학교로 돌아오자 다시 아프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2∼3일은 몸살 감기로 드러누웠다. 하긴 신학교에서 먹는 음식이 형편없기도 했다. 풀때기죽으로 끼니를 이었고, 밀가루 음식을 아침·저녁으로 먹었다. 신부가 되려면 첫째로 갖추어야 할 것이 성덕이다. 하느님 뜻에 따라 살 수 있는 성스러운 은혜를 말하는 것이다. 둘째는 건강, 셋째가 학식이다. 신학교 생활은 매우 엄격하여 규율 속에 꽉 짜인 매일을 견디어야 한다. 그런데 나는 건강이 결여되어 있었다. 몸이 허약해서 신부님이 되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 속에서 12년의 신학교 생활을 마치고 가까스로 신부가 되었다. 1961년 3월 18일 춘천교구에서 신부서품을 받았다. 그리고 횡성성당에 보좌신부로 발령을 받으면서 신부로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신부가 된 후 신학교 생활보다는 자유로워졌지만 건강은 여전히 좋지 않아서 하루하루가 고통이었다. 몸이 아프니까 일할 의욕이 나지 않았고 사람 만나기도 싫었으며 모든 게 귀찮았다. 76년 3월 긴급조치위반으로 옥살이를 할 때에는 이명으로 몹시 고생했다. 74년과 84년 두 차례에 걸쳐 결석으로 입원해야 했다. 나는 자구책으로 80년에 수지침을 배웠다. 수지침을 하니 몸이 일시적으로 좋아지는 듯했지만 그저 일시적인 것으로, 다시 병마에 시달려야 했다. 성령안수를 받아 몸이 잠깐 좋아졌다가 다시 도졌을 때에는 깊은 회의에 빠져 나 자신에 대해 절망하기도 했다. 89년의 어느 날 뒷골이 당기고 몹시 피곤했다. 병원에 가서 종합검진을 받으니 당뇨에 고혈압, 지방간까지 겹쳐 있었다. 의사는 계속 약을 먹으라고 했다. 끼니 때마다 약을 한 주먹씩 먹어야 하다니. 생각만 해도 기가 막혔다. 그제서야 비로소 나는 도대체 왜 이렇게 아플까 생각해보았다. 나는 하나하나 점검해갔다. 신학교 시절은 상당부분 영양부족이 아니었을까 싶다. 제대로 먹지를 못하니 면역성이 떨어져 아플 수밖에 없었다. 신부가 된 이후에는 충분히 먹었지만 고기는 거의 매일 먹으면서도 채소를 먹지 않았고, 물은 반드시 끓여 먹었다. 나는 균형이 깨진 식생활을 계속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해 말, 나는 지학순 주교님을 통해 알게 된 장두석 선생님을 초청해 주일 오후 2시에 강연을 들었다. 장 선생님은 조식 폐지, 냉온욕을 비롯해 각종 자연건강요법에 대해 이야기하셨다. 나는 강연을 들으면서 감기 몸살을 앓는 사람이 냉온욕을 하면 죽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는 평소 한여름에도 미지근한 물이 아니면 목욕을 하지 않았다. 찬물에 들어가면 죽는 줄 알고 있었다. 장 선생님은 무조건 해보라고 하셨다. 나는 속는 셈치고 해보았다. 오곡밥과 채소를 주식으로 먹고 고기는 당분간 끊어 보았다. 아침을 생수로 대신했으며 냉온욕을 매일 했다. 신기하게도 수십 년 앓았던 감기 몸살이 뚝 떨어졌다. 이명도 없어졌고, 피로감도 가셨다. 조금만 더 일찍 자연건강법을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다시금 신부생활을 돌아보았다. 너무 피곤해서 능동적으로 일할 수가 없었다. 일은 잔뜩 쌓아 놓고 몸이 쫓아가지 못해 신도들에게만 일할 것을 요구했다. 주보에 신부의 스케줄을 넣어야 하니 마지못해 스케줄을 짰다. 화요일 9시만 되면 정말 소가 고삐에 끌려가듯 성당문을 나서야 했다. 그것도 두세 집 돌고 나면 지쳐서 사제관으로 돌아와야 했다. 바로 성당 옆에서 초상이 나도 가기 싫었다. 겨우 겉치레로 움직였다. 그런데 모든 것이 달라졌다. 왕복 70리 길을 걸어, 하루 세 번 연도를 해주고 와도 피곤하지 않았다. 건강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자연건강법에 대해서도 새롭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 이후 나는 신자들에게 적극적으로 자연건강법을 보급했다. 그리고 은퇴 후 자연건강법을 통해 환자들을 돌보기로 결심했다. 몇몇 신부들과 의논했더니 젊었을 때 털고 일어서라며 적극 권유하였다. 지난 93년 나는 자연건강법을 실천하기 위해 봉쇄수도원에 들어가 지도신부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좌골신경통에 걸렸다. 93년 대전에서 열린 민족생활교육을 받을 때에는 걸음도 제대로 못 걸어 절뚝거렸다. 교육기간에 단식을 하고 풍욕, 냉온욕, 각종 요법을 하고 집에 돌아오니 좌골신경통이 나아 있었다. 30년 동안의 사제생활을 나는 질병과 함께 했다. 당연히 제대로 사제직을 수행할 수 없었다. 나는 그때 다 하지 못한 봉사를 자연건강법을 통해 하고 싶다. 자연건강법을 하면서 역시 이 분야에도 많은 문제점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비제도권에 있으면서 제도권으로부터 외면당해 왔기에 이 분야에 종사하는 분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제도의학과 자연건강법 종사자들이 서로 장단점을 절충, 보완하여 보다 발전한 의료, 의학체계를 수립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중요한 것은 환자들을 소생시키는 것이 아닌가. 다들 보다 겸허하게, 청빈한 마음으로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길 간절히 기원한다.
의학적 소견 신부님을 처음 뵌 것은 유신시대였다. 신부님은 민주화운동에 앞장선 분이다. 암울한 박정희 독재 시절 신부들과 지식인들이 민주화운동에 관심을 갖도록 이끈 선구자 같은 분이었다. 신부님은 로메로 신부나 까마라 신부에 비유할 수 있는 분으로, 한국 교계를 눈뜨게 했다. 87년 잠깐 우리집을 들른 후 88년 강원도 정선 천주교회에 계실 때 나를 초청해주셔서 강연을 하게 되었다. 강연회가 인연이 되어 우리는 가끔 만나게 되었다. 그후 봉쇄수도원에 계시다가 좌골신경통을 앓아 대전교육 때 민족생활학교에 참여하게 되었다. 많은 신부님들이 교육을 받았지만 함께 민주화운동을 한 신부님이 교육을 받게 되어 뿌듯했다. 신부님은 자연건강운동을 통해 환우들을 구하기 위해 사제생활을 청산하시고 지난 95년 초 재차 민족생활교육을 받으러 오셨다. 나는 신부님께 강원도 지역에 민족생활관을 열고 함께 일하자고 권했다. 신부님은 내 청을 받아들이셨다. 고 지학순 주교가 머물던 주교관 용소막을 민족생활관으로 전환하여 환우들을 돌보기 시작하셨다. 나는 신부님이 함께 해주셔서 힘이 났다. 신부님은 소박하고 거짓이 없는 분이다. 몸소 농사를 지어 무공해 농산물을 생산하고 계시기도 하다. 신부님은 그후 교육이 있을 때마다 찾아와 나를 위로해주셨다. 올 때마다 홍당무며 야콘 등 손수 지으신 무공해 농산물을 가득 안고 오신다. 신부님이 아프셨던 것은 천혜이다. 그분이 아프지 않았다면 어떻게 우리가 만날 수 있었겠는가. 신부님을 영적 지도자로 모시고 일하고 싶다. 고통받는 많은 형제 자매들을 위해 함께 일하고 함께 생활하며 하느님의 섭리인 대자연의 큰 뜻을 실현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신부님은 건강을 되찾은 후 열심히 건강법을 보급하셨다. 나는 신부님이 민족생활의학운동의 지도자가 되어 주시길 원하고 있다.
《사람을 살리는 생채식》, 정신세계사, pp.288-293
신현봉 (성직자, 강원도 원주군 신림면 용암리 174 용소막 주교관, 0371-47-0990)
늘 몸이 아프고 피곤했다. 피곤, 피곤, 정말 피곤함은 한시도 나를 편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여기저기 몸이 아프니까 주님의 뜻을 알리는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기도로 하루하루를 보냈지만 모든 것이 귀찮고 짜증이 날 뿐이었다. 어쩌면 피곤은 내가 평생 짊어지고 온 십자가였는지 모른다. 고 지학순 주교님의 소개로 장두석 선생님을 알게 되어 자연건강법을 실천하면서 나는 하루가 다르게 건강해졌다. 무엇보다 늘 나를 따라다니던 피곤함이 서서히 가시자 매일매일이 새롭게 다가왔다. 은퇴 후 나는 용소막(원주 소재)에 머물면서 자연건강법에 따라 환자들을 돌보고 있다. 환자들을 돌보면서 나는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신부로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돌이켜보면 평생 나를 괴롭혔던 온갖 질병들은 자연건강법을 만나기 위한 시련이었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하느님은 내게 고통을 통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도록 특별한 은총을 내려주신 것일까. 나는 1930년 9월 2일 전남 광주에서 5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엔 비교적 건강한 편이었다. 어렸을 때 내 꿈은 의사였다. 어느 날 큰형님이 내게 육신의 병을 고치는 것보다 영혼의 병을 고치는 것이 중요하다며 영혼의 병을 고치는 신부가 되라고 권하셨다. 9일 기도를 열심히 하며 간절히 구하라고 하셨다. 그때 우리 가족은 큰형님이 신부님 복사 역할을 하셨기 때문에 성당에 나가고 있었다. 내가 신부의 길로 들어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분은 내게 신학교에 가라고 채근하셨던 나의 대부님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신부가 될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신부님은 이슬만 먹고 사는 분인 줄 알았고, 화장실도 가지 않는 줄 알았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신부가 된단 말인가. 내가 그렇게 고귀한 신부가 될 수 있을까. 대부님과 큰형님의 권유가 매우 간곡하여 나는 머뭇거리며 소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런데 웬일인가. 소신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그렇게 몸이 아플 수가 없었다. 맨 처음 나를 괴롭힌 것은 안질이었다. 눈병이 낫지를 않아 안과란 안과는 찾아가보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늘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몸이 허약해서 그런지 몸살 감기에 시달려 다른 친구들의 학업을 따라가기 힘들었다. 그러다 6·25사변이 터졌고 군대에 들어갔다. 군생활은 건강하게 할 수 있었다. 제대 후 신학교로 돌아오자 다시 아프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2∼3일은 몸살 감기로 드러누웠다. 하긴 신학교에서 먹는 음식이 형편없기도 했다. 풀때기죽으로 끼니를 이었고, 밀가루 음식을 아침·저녁으로 먹었다. 신부가 되려면 첫째로 갖추어야 할 것이 성덕이다. 하느님 뜻에 따라 살 수 있는 성스러운 은혜를 말하는 것이다. 둘째는 건강, 셋째가 학식이다. 신학교 생활은 매우 엄격하여 규율 속에 꽉 짜인 매일을 견디어야 한다. 그런데 나는 건강이 결여되어 있었다. 몸이 허약해서 신부님이 되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 속에서 12년의 신학교 생활을 마치고 가까스로 신부가 되었다. 1961년 3월 18일 춘천교구에서 신부서품을 받았다. 그리고 횡성성당에 보좌신부로 발령을 받으면서 신부로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신부가 된 후 신학교 생활보다는 자유로워졌지만 건강은 여전히 좋지 않아서 하루하루가 고통이었다. 몸이 아프니까 일할 의욕이 나지 않았고 사람 만나기도 싫었으며 모든 게 귀찮았다. 76년 3월 긴급조치위반으로 옥살이를 할 때에는 이명으로 몹시 고생했다. 74년과 84년 두 차례에 걸쳐 결석으로 입원해야 했다. 나는 자구책으로 80년에 수지침을 배웠다. 수지침을 하니 몸이 일시적으로 좋아지는 듯했지만 그저 일시적인 것으로, 다시 병마에 시달려야 했다. 성령안수를 받아 몸이 잠깐 좋아졌다가 다시 도졌을 때에는 깊은 회의에 빠져 나 자신에 대해 절망하기도 했다. 89년의 어느 날 뒷골이 당기고 몹시 피곤했다. 병원에 가서 종합검진을 받으니 당뇨에 고혈압, 지방간까지 겹쳐 있었다. 의사는 계속 약을 먹으라고 했다. 끼니 때마다 약을 한 주먹씩 먹어야 하다니. 생각만 해도 기가 막혔다. 그제서야 비로소 나는 도대체 왜 이렇게 아플까 생각해보았다. 나는 하나하나 점검해갔다. 신학교 시절은 상당부분 영양부족이 아니었을까 싶다. 제대로 먹지를 못하니 면역성이 떨어져 아플 수밖에 없었다. 신부가 된 이후에는 충분히 먹었지만 고기는 거의 매일 먹으면서도 채소를 먹지 않았고, 물은 반드시 끓여 먹었다. 나는 균형이 깨진 식생활을 계속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해 말, 나는 지학순 주교님을 통해 알게 된 장두석 선생님을 초청해 주일 오후 2시에 강연을 들었다. 장 선생님은 조식 폐지, 냉온욕을 비롯해 각종 자연건강요법에 대해 이야기하셨다. 나는 강연을 들으면서 감기 몸살을 앓는 사람이 냉온욕을 하면 죽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는 평소 한여름에도 미지근한 물이 아니면 목욕을 하지 않았다. 찬물에 들어가면 죽는 줄 알고 있었다. 장 선생님은 무조건 해보라고 하셨다. 나는 속는 셈치고 해보았다. 오곡밥과 채소를 주식으로 먹고 고기는 당분간 끊어 보았다. 아침을 생수로 대신했으며 냉온욕을 매일 했다. 신기하게도 수십 년 앓았던 감기 몸살이 뚝 떨어졌다. 이명도 없어졌고, 피로감도 가셨다. 조금만 더 일찍 자연건강법을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다시금 신부생활을 돌아보았다. 너무 피곤해서 능동적으로 일할 수가 없었다. 일은 잔뜩 쌓아 놓고 몸이 쫓아가지 못해 신도들에게만 일할 것을 요구했다. 주보에 신부의 스케줄을 넣어야 하니 마지못해 스케줄을 짰다. 화요일 9시만 되면 정말 소가 고삐에 끌려가듯 성당문을 나서야 했다. 그것도 두세 집 돌고 나면 지쳐서 사제관으로 돌아와야 했다. 바로 성당 옆에서 초상이 나도 가기 싫었다. 겨우 겉치레로 움직였다. 그런데 모든 것이 달라졌다. 왕복 70리 길을 걸어, 하루 세 번 연도를 해주고 와도 피곤하지 않았다. 건강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자연건강법에 대해서도 새롭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 이후 나는 신자들에게 적극적으로 자연건강법을 보급했다. 그리고 은퇴 후 자연건강법을 통해 환자들을 돌보기로 결심했다. 몇몇 신부들과 의논했더니 젊었을 때 털고 일어서라며 적극 권유하였다. 지난 93년 나는 자연건강법을 실천하기 위해 봉쇄수도원에 들어가 지도신부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좌골신경통에 걸렸다. 93년 대전에서 열린 민족생활교육을 받을 때에는 걸음도 제대로 못 걸어 절뚝거렸다. 교육기간에 단식을 하고 풍욕, 냉온욕, 각종 요법을 하고 집에 돌아오니 좌골신경통이 나아 있었다. 30년 동안의 사제생활을 나는 질병과 함께 했다. 당연히 제대로 사제직을 수행할 수 없었다. 나는 그때 다 하지 못한 봉사를 자연건강법을 통해 하고 싶다. 자연건강법을 하면서 역시 이 분야에도 많은 문제점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비제도권에 있으면서 제도권으로부터 외면당해 왔기에 이 분야에 종사하는 분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제도의학과 자연건강법 종사자들이 서로 장단점을 절충, 보완하여 보다 발전한 의료, 의학체계를 수립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중요한 것은 환자들을 소생시키는 것이 아닌가. 다들 보다 겸허하게, 청빈한 마음으로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길 간절히 기원한다.
의학적 소견 신부님을 처음 뵌 것은 유신시대였다. 신부님은 민주화운동에 앞장선 분이다. 암울한 박정희 독재 시절 신부들과 지식인들이 민주화운동에 관심을 갖도록 이끈 선구자 같은 분이었다. 신부님은 로메로 신부나 까마라 신부에 비유할 수 있는 분으로, 한국 교계를 눈뜨게 했다. 87년 잠깐 우리집을 들른 후 88년 강원도 정선 천주교회에 계실 때 나를 초청해주셔서 강연을 하게 되었다. 강연회가 인연이 되어 우리는 가끔 만나게 되었다. 그후 봉쇄수도원에 계시다가 좌골신경통을 앓아 대전교육 때 민족생활학교에 참여하게 되었다. 많은 신부님들이 교육을 받았지만 함께 민주화운동을 한 신부님이 교육을 받게 되어 뿌듯했다. 신부님은 자연건강운동을 통해 환우들을 구하기 위해 사제생활을 청산하시고 지난 95년 초 재차 민족생활교육을 받으러 오셨다. 나는 신부님께 강원도 지역에 민족생활관을 열고 함께 일하자고 권했다. 신부님은 내 청을 받아들이셨다. 고 지학순 주교가 머물던 주교관 용소막을 민족생활관으로 전환하여 환우들을 돌보기 시작하셨다. 나는 신부님이 함께 해주셔서 힘이 났다. 신부님은 소박하고 거짓이 없는 분이다. 몸소 농사를 지어 무공해 농산물을 생산하고 계시기도 하다. 신부님은 그후 교육이 있을 때마다 찾아와 나를 위로해주셨다. 올 때마다 홍당무며 야콘 등 손수 지으신 무공해 농산물을 가득 안고 오신다. 신부님이 아프셨던 것은 천혜이다. 그분이 아프지 않았다면 어떻게 우리가 만날 수 있었겠는가. 신부님을 영적 지도자로 모시고 일하고 싶다. 고통받는 많은 형제 자매들을 위해 함께 일하고 함께 생활하며 하느님의 섭리인 대자연의 큰 뜻을 실현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신부님은 건강을 되찾은 후 열심히 건강법을 보급하셨다. 나는 신부님이 민족생활의학운동의 지도자가 되어 주시길 원하고 있다.
《사람을 살리는 생채식》, 정신세계사, pp.288-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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