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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내력이었던 고혈압을 이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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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국노조 조회667회 작성일 21-06-18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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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내력이었던 고혈압을 이기고

강영희

(교사, 인천시 남동구 만수4동 13 만수주공아파트 419동 1203호, 032-461-7448)

나는 평범한 가정의 6남매 중 맏딸로 태어나 현재 인천에 있는 여자중학교 교사로 28년째 교직생활을 하고 있는 미혼 여성이다.

내 성격은 깔끔하고 분명한 편이며 적극적이고 성취욕이 강하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편이라 늘 피곤하고 힘들어서, 눕거나 기대어 앉기를 좋아한다. 어렸을 때는 매일 약봉지를 달고 살 만큼 자주 아파 병원을 내 집처럼 드나들었는데, 국민학교에 들어가면서 차차 나아져 성장기에는 큰 병 없이 건강했다.

대학 졸업 당시 체중이 50킬로그램 전후였는데 차츰 늘어나더니 교직 20년째에는 70킬로그램에 육박했다. 몸이 무거워지다 보니 움직이는 것도 귀찮고 짜증스럽기만 해 당연히 게을러질 수밖에 없었다. 집에 오면 실컷 먹고 거의 움직이지 않으니 체중이 느는 게 당연했다. 그러면서 머리가 무겁고 아프며 가슴이 답답했다. 마침 학교에서 2년마다 하는 종합건강진단을 받았다. 결과는 콜레스테롤 수치도 높고 고혈압이라는 것이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아버지가 이미 고혈압으로 돌아가셨고 어머니마저 투병중이라 고혈압의 무서움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무원이셨던 아버지는 내가 대학교 4학년 때 고혈압으로 입원하셨다. 아버지는 어쩌다 코피가 한번 터지면 지혈이 안되어 한 사발씩 피를 쏟았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보고 있으면 겁이 났다. 그후 양약, 민간요법 등 여러 가지를 병행했으나 병세는 나아지지 않고 급기야 합병증으로 당뇨까지 오면서 체중이 급격히 줄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쓰러졌다 일어나기를 되풀이하며 3년을 지내다 돌아가셨다. 그때 아버지의 나이 49세였다. 현재의 나보다 더 젊은 나이에, 우리가 그토록 사랑하던 아버지는 떠나가셨다. 몇 년 후 어머니도 고혈압이라는 진단을 받으셨으나 나름대로 식이요법과 약물치료로 생활하여 올해 칠순을 맞는데도 건강을 유지하고 계시다.

나는 발병 당시 3학년 주임을 맡고 있었기에 일이 많았다. 일정하지 않은 식사습관과 과로, 스트레스, 이 모든 것이 발병의 원인이 된 것 같다. 일을 시작하면 끝마무리를 봐야 하는 성격 탓도 있을 것이다.

고혈압이란 사실을 안 이후 나는 가능한 한 약을 안 먹으려고 애썼다. 한번 먹기 시작하면 계속 복용해야 한다는 말에 겁이 났기 때문이다. 머리가 무척 아팠지만 억지로 참았다. 이후 몇 번의 건강진단 때마다 같은 결과가 나왔다. 92년도 건강검진 때에는 고혈압에 심비대증이라며 재검진하라는 통보가 왔다. 여러 가지 종합검진을 받았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우선 마음이 먼저 무너졌다.

하는 수 없이 병원에 다니며 혈압도 체크하고 약도 먹었다. 장기적으로 꾸준히 치료를 요한다고 했다. 기름기 있는 음식, 커피, 자극성 있는 음식을 피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안정을 취하라고 했다. 병원에 다녔으나 별 진전이 없었다. 나는 불안해졌다.

병은 여러 사람에게 알리는 것이 좋다고, 약사인 친구가 한약을 먹으며 혈액순환제를 3개월 복용해보라고도 하고 중국 한의한테 가서 코침을 맞아보라고도 했다. 하지만 약도 별 진전이 없었고, 한번 맞으면 고혈압 환자의 경우 쓰러지긴 해도 중풍은 예방할 수 있다는 코침도 몇 개월 계속하니 효과가 없었다.

실의에 빠져 있던 나는 약사 친구에게 다시 전화를 했다. 그 친구의 어머니가 92년 6월 전북 익산에서 열렸던 민족생활학교 제18기 교육을 다녀오셨다며 내게도 권했다. 여름방학에 시간을 내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그해 8월, 10박 11일 동안 제19기 교육에 참가했다. 나는 어떤 전투에 참여하는 심정이었다. 단식을 한다기에, 준비한다는 생각으로 소위 영양식이라고 하는 것을 골라 먹었다. 심지어 교육받으러 가는 길목 휴게소마다 들러 이것저것 사먹었다. 앞으로 굶을 것에 대비하여 배를 꽉 채워 놓았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고 미련하기 이를 데 없다.

장 선생님은 체모관측(體貌觀測)을 하시더니 극산성 체질이라며 살을 빼야 한다고 하셨다. 심장이 부어 있고 지방간이 약간 있다며 단식 후 3개월 동안은 오곡가루와 채소로 생채식을 하라고 일러주셨다. 꾸준히 열심히 해보라는 말씀도 잊지 않으셨다.

나는 강의를 듣는 첫 시간에 왜 고혈압에 시달리며 뚱뚱한지를 알았다. 체내 노폐물 축적으로 그 독소가 혈액을 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이 한마디의 해답을 얻기 위해 나는 그토록 고민하고 절망했었다. 자신이 생겼다. 자기 병은 자기가 다스린다는 말을 실감했다. 열심히 실천해 꼭 회복하리라는 의욕에, 기쁜 마음으로 수강에 임했다.

교육기간중 갖가지 명현반응이 나타났다. 몸에 물집 같은 것이 돋아나길래 그대로 두었더니 스스로 없어졌다. 그리고 옛날에 등산다니며 다쳤던 허리가 아프고, 인대가 늘어났던 손가락이 아팠다. 신체의 약한 부분들에 다소 통증이 왔다가 사라지곤 했다.

교육을 받은 이후 나는 체질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체질을 바꾼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을 것 같았지만 열심히 하리라 결심하고 실천에 들어갔다. 우선 하루 일과표를 짰다.

풍욕은 하루 두 번 새벽 5시와 밤 10시에 했고, 냉온욕은 집에서 아침 6시 30분에 냉탕 3회, 온탕 2회씩 했다.

음식은 오곡가루, 뿌리 두 가지 잎 세 가지의 채소를 된장에 싸서 먹고 손두부, 흰살 생선을 조금씩 먹었다. 단식은 3개월에 3일 정도 하였고 아침은 먹지 않았다. 생수를 오전중에 1.5리터 정도 먹고, 죽염도 조금씩 먹었다. 오곡가루를 3개월간 먹고 그 이후 오곡밥으로 바꾸었다. 잡곡밥으로 바꾸니 체중이 약간 늘었다.

잘 때는 경침(반달 오동나무로 만든 것)을 베고 평상(딱딱한 나무바닥)에서 잤다. 경침은 목뼈의 교정을 위해서도 좋고 편도염이나 기관지 질환도 예방이 된다. 평상은 우리 몸의 기둥인 척추를 바로 유지하고 요통이나 디스크를 예방할 수 있다. 처음에는 딱딱한 바닥과 경침이 불편했으나 지금은 그것이 아니면 잠들기 힘들다.

자연건강법 실시 이후 값작스런 체중감량으로 주변에서 많이 말렸지만 나는 자신감을 갖고 흔들리지 않았다. 70킬로그램이던 것이 3개월 후 10킬로그램이 빠지고 6개월 후 20킬로그램이 빠졌으니 주위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주변에서는 저러다 죽을 것이라고 수군거리며 만류했다. 25년 만에 처음으로 대학 동창회에 가보았다. 졸업 후 처음 만난 친구들은 별로 반응이 없었으나(졸업 당시와 현재의 체중이 같음) 중간에 만났던 친구들은 나에게 말을 붙이지 못했다. 살 빠진 내 모습을 보고 중병이라도 걸린 줄 알고 걱정하면서 두려워했다.

그러나 내 건강은 좋아지고 있었다. 3개월 동안 혈압을 체크해보니 정상을 유지하고 있었고, 몸이 가벼워지니 마음도 가벼워져 모든 생활에 활력이 생겼다. 체중감량으로 처음엔 피부에 주름도 생기고 배힘도 없었으나 계속 실행하다 보니 세포가 제자리를 잡은 듯 원상태로 돌아왔다. 날씬해져 옷맵시도 났다.

그후 두 번 더 민족생활학교를 수료했다. 2회 때는 처음 강의받은 후 내가 실천했던 과정의 문제점과 개선점을 점검하기 위해 교육을 받았다. 3회 때에는 자연건강법을 실천하기 위해 참여했다. 친구와 동료 선생님들이 같이 가자고 했다. 쉽지 않았지만 안내를 하며 봉사자의 입장에 서려고 애썼다. 현재의 건강상태도 좋은 편이다.

이제 주변사람들은 나를 이해해주고 의지의 한국인(?)이라며 칭찬한다. 그리고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내가 자연건강법으로 병을 이겨낸 사실을 알린다. 교직원들에게, 학교 어머니회에, 학생들에게, 교회에서 내가 찾은 건강을 그들에게도 되찾게 하고 싶어서 열심히 이야기했다. 그리고 나른한 오후에 졸릴 때면 학생들에게 모관운동으로 손을 흔들게 하고 등배운동, 준비운동을 시켜 잠을 깨워준다. 아이들은 굉장히 좋아한다.

이 글을 쓰게 해주신 장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감히 내가 치험례를 쓸 자격이 있을까 싶었지만 오늘도 여러 가지 질병으로 고통받는 환우들에게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좀더 일찍 장 선생님을 만났더라면 우리 아버지도 그렇게 보내지 않았을 텐데. 아버지가 자연건강법을 알았더라면 더 사실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움이 나를 가슴 아프게 한다. 장 선생님을 만나 나의 변한 모습을 보여주고 아직 고통 속에 있는 분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

'혁정(革鼎)"하라는 말씀, 즉 자기를 비우라는 첫 강의에서 나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고, 내 마음과 몸에 쌓인 노폐물을 제거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자연건강법을 통해 자연으로 돌아갈 때 우리의 삶은 참으로 풍요로워진다. 우리가 가진 작은 것이라도 넉넉한 마음으로 베푸는 모습들을 나는 자연건강법에서 배웠다. 돌보는 마음, 나누어주는 마음, 하늘이 우리에게 햇빛과 공기와 물을 아무 말 없이 풍성히 주었듯이 우리 또한 이웃들에게 우리가 가진 것들을 여유 있게 베풀어야 한다. 정말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오늘도 '혁정"하며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그대로 따르려고 애쓰고 있다.

의학적 소견

왕우달 권사님이 계시다. 교회에서 일하시며 예수님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는 좋은 분이다. 권사님의 딸이 약사인데 강영희 씨 친구다.

왕 선생님 소개로 강영희 씨를 만났다. 체모관측을 해보니 고혈압이 심하고 심장이 비대해져 있었다. 매우 정직한 사람이었다. 혼자 산다기에 내가 아피(평복 입은 수녀)냐고 물어볼 만큼 깔끔했다.

고혈압이나 심장비대는 성인성 질환이므로 쉽게 나을 수 있다. 걱정스러운 것이 부정맥이었다. 부정맥은 심장의 판막이 제 기능을 못해 개폐가 원활하지 않아 일어나는 현상이다. 맥박이 4∼5회 제대로 뛰다가는 잠시 끊어졌다 다시 박동하는 매우 위험한 현상이다. 숨이 가빠져 기절하는 경우도 있고 정신적으로 불안정하여 어떤 일을 겪을지 모른다.

부정맥의 치료를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판막이 정상화되어야 한다. 판막이 정상화되려면 심장에 끼인 기름을 빼 판막을 단련해야 한다. 철저히 생식하고 모관운동을 열심히 하는 외에 하지유연법에 주력해야 한다. 다리를 강화시키는 방법으로 가장 좋은 것이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이다. 다리를 유연하게 하려면 발목을 부드럽게 하는 부채꼴운동, 발목돌리기운동 들을 꾸준히 해야 한다.

보조식품으로는 난유를 섭취하며 적절히 당분과 염분을 공급해야 한다. 당분을 공급하지 않으면 저혈당이 되고 저혈당이 되면 부정맥이 더 심해지므로 주의해야 한다.

부정맥의 경우 무작정 단식을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전문가의 지시에 따라 엄격하게 시행하되 3일을 초과하면 안된다. 강영희 씨는 민족생활교육을 네 번 받았다. 두 번 교육을 받을 때에도 약간 부정맥이 있었는데 3회째 교육 때에는 많이 나아 있었다. 이번에 네번째 교육을 받았는데 깨끗해져 있었다.

강영희 씨는 인천지역에서 민족생활의학 보급을 위해 애쓰고 있는 사람이다. 많은 이웃, 친지, 동료들을 민족생활학교로 안내하고 있으며 학생들의 도시락에도 관심을 갖고 우리 음식을 권하는 등 민족생활법의 보급에 열성을 보여 "양호교사"라는 별명까지 얻었다고 한다. 강영희 씨는 무언의 실천가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많은 기대가 된다.

《사람을 살리는 생채식》, 정신세계사, pp.215-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