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신 류머티스 관절염, 무력증, 위장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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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국노조 조회696회 작성일 21-06-18 13:26본문
전신 류머티스 관절염, 무력증, 위장병
이취경
(자연생활교육관 운영, 전남 담양군 남면 연천리 434번지, 0684-81-5888)
우리 인생에서 건강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건강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자본이요 재산이다.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하려면 건강이라는 기본적인 자원을 가져야 한다.
나는 1949년 교육자 집안의 5남매 중 큰딸로 태어나 남부럽지 않은 유년 시절을 보냈다. 여고 시절 새벽 등교길에 갑자기 엄습해오는 무릎 통증을 가라앉히기 위해 전봇대에 몸을 의지하고 통증이 사라진 뒤 등교하기를 수차례, 부모님께서는 신경통이라 여기셔서 각종 영양제와 치료제를 복용하게 하였고 여름이면 바닷가에 나가 모래찜질을 시켜주셨다. 추위를 잘 타는 관계로 옷을 두텁게 입었고 늘 따뜻하게 잤다. 평소 위장을 비워두면 안된다 하시며 속이 쓰리면 뭐든지 먹어야 된다고 염려하는 어머니였기에 활동량이 많은 나는 눈을 뜨면서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먹는 즐거움을 느끼며 생활하게 됐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인생을 값지게 살고 싶어한다. 다만 그 내용의 질과 방향, 노력 정도와 습관 여하에 따라 향방이 가름날 따름이다.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삶에 있어서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기쁨이 있겠지만 그 가운데 가장 빛나는 기쁨은 가정의 평화와 행복이라 생각한다. 참다운 생활을 위해 부지런히 일해야 하고 근면 성실하게 노력하는 그 자체 속에서 기쁨을 발견하는 것이 나의 생활태도였다. 나는 사회봉사활동과 신앙생활을 통하여 이웃을 사랑하며 원만한 성격으로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아무리 무한한 재능이 있고 행복하게 살려고 해도 건강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모든 사람은 행복하기를 원하고 자기 소원대로 되지 않음을 안타까워하며 팔자소관으로 체념하기도 한다. 행복과 불행, 영광과 파멸의 갈림길은 사방 한치도 안되는 나의 마음에 달려 있다.
결혼 후 세 자녀를 출산하기까지 잦은 변비증세와 피로감 때문에 가사일을 이겨내지 못하고 남의 도움을 받게 되는 생활이 계속되던 중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이 나던 해는 나에게는 악몽 같은 나날이었다.
가까이 지내던 분에게 경제적 피해를 당해 정신적 고통을 받은 탓인지 신체적으로 이상이 생겼다. 화창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온몸이 쑤시면서 어디를 가든지 드러눕고만 싶었고, 뼛속까지 파고드는 통증과 가벼운 피부자극에도 시퍼런 멍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생기며 생리불순이 잦아서 전남대학병원에 찾아가 진찰을 받아 보았다.
전신 류머티스 관절염과 자궁암 초기라는 진단 결과가 나왔다. 그때 당시 산부인과 과장께서 하시는 말씀이, 냉동치료를 할 수 있는 기계부속이 고장이 나 독일에서 구입하려면 1개월 반쯤 걸리니 그리 대단치도 않고 작은 물방울처럼 생긴 폴립이니까 나이도 젊고 하니 도려내버리자는 것이었다. 그 당시 행정 공무원이었던 남편은 사무관시험을 앞두고 공부를 하고 있었던 터라 나에게 신경 써주는 것을 미안하게 여기며 이웃 아주머니와 함께 가벼운 마음으로 수술에 응하고 말았다.
의사 선생님 말씀이 수술 후 출혈이 있으면 위험하나 그렇지 않다면 괜찮을 거라고 하셨다. 그러나 뭉클한 선지피 같은 출혈이 심해 일어설 수조차 없을 정도로 몹시 어지러웠다.
당시 거리에서는 총성과 함께 사람이 죽어 갔고, 전운이 감도는 그토록 살벌했던 도청거리를 지나 매일 치료를 받으러 다녔다. 병원비를 마련할 길이 없어 졸업 때 찾기로 되어 있던 초등학교 5학년짜리 큰아들의 저금통장을 헐어 병원비로 충당할 때 우리 부부는 피눈물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됐다. 광주 시내의 분위기가 갈수록 심각해지면서 대학병원에서는 통원치료마저 거부했다. 환자가 너무 많았던 것이다. 정치상황은 점점 악화되었고 통신과 함께 교통까지 두절되어 나의 치료를 가로막았다.
이때 함께 생활하던 친정 막내동생이 이런 말을 하였다. 삼남매를 둔 큰누나가 죽게 되면 매형은 새 가정을 꾸려야 할 테니까 친정 형제들이 조카 한 명씩 맡을 것이니 마음을 편히 가지라는 것이었다. 그때의 참담한 심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그러나 그대로 좌절할 수는 없었다. 집 근처 병원에 다니며 대학병원에서 처방해준 대로 치료가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기력이 떨어져 영양주사(링거)를 맞는데, 신생아들에게 꽂는다는 주사바늘도 혈관에 꽂히질 않고 아홉 차례나 터져버려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가 땀을 뻘뻘 흘렸다. 거리에선 포탄소리와 함께 사람이 죽어 가고 있었지만 나는 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다. 지금 바늘을 꽂지 않으면 나는 죽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세상이 멸망해도 나는 살 것이라는 강한 생의 애착과 삶에 대한 몸부림을 겪는 순간, 하얀 가운을 입은 간호사는 천사와 같았고 의사 선생님의 모습은 하느님과 같아 보여 나의 마음을 평온하게 해주었다. 간신히 손등에 바늘을 꽂고 나신 선생님께서 수고했다고 말씀하셨다. 보통 2∼3회 실패를 하면 주사맞기를 거부하거나 화를 내고 가버리는데 18년 의사생활에 나 같은 사람은 처음 보았다는 것이다.
과연 고맙다는 말을 누가 해야 하는가. 지푸라기라도 잡고 매달리고 싶은 사람은 정작 난데. 나는 의사 선생님께 진정으로 고마워하고 있었다. 이렇게 약 2개월간의 죽음을 무릅쓴 통원치료는 끝이 났지만 그렇게 쓰라린 고통 뒤에 또다시 전신 류머티스 관절염이 찾아와 고통의 나날은 이어졌다. 난치병인 류머티스 관절염에는 특효약이 없으니 잘 먹고 마음 편하게 지내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얼마 남지 않은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것 같아 처참한 심경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부모님께서 달여 오신 한약이며 단방약, 조약, 남편이 구해다준 노루뼈 등 온갖 방법을 써가며 치료를 하고 있던 중 또다시 장질부사로 입원해야 했다.
퇴원 후 집에서 요양을 하던 중 갑자기 뒤틀리는 복통을 참을 수 없어 병원에 가보니 만성 맹장염인데 위험하니 빨리 수술을 하자고 했다. 건강회복도 완전히 하지 못한 상황에 또 수술을 하면 가족들과 이 아름다운 세상을 영원히 못 볼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나의 몸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또다시 수술대 위에 누워야만 했다. 퇴원 후 차츰 다른 합병증까지 곁쳐 물리치료를 겸한 한방치료를 계속했으나 특별한 효과를 얻지 못하고 위장장애만 더욱 심해져 갔다. 하루 24시간 중 20시간 이상을 잠에 취해 꿈속을 헤매며 의식은 있으나 움직일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렸다.
팔관절이 굽혀지지 않아 식사도 혼자 하지 못하고 옆에서 먹여주어야 했고, 문턱도 넘어갈 수가 없는 몸이 되고 보니 방 안에서 벽을 짚고 옆으로 걸음마 연습을 해야 했다. 그렇게 4주 정도 지났을 때 마을 식육점에 걸려 있는 소다리(사골)를 보니 의식이 없이 형체만 남아 있는 나의 형상으로 비추어졌다. 온몸이 차고 무릎 밑 종아리에서 톡톡 쏘면서 열이 나며 혈액순환장애로 신장, 심장, 폐, 간, 근육까지 굳어져 가는 나의 몸은 의지대로 움직일 수가 없는 산송장과 같았다.
삶의 가치를 어디다 두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괴롭기만 했다. 4년간의 투병생활이 이어지던 때 나는 다시 인생의 지표를 설정했다. 잔병에 효자 없고 우환이 도둑이라는 옛말을 되새기면서 내 병은 스스로 고치리라 마음먹었고, 마침 친정 큰동생의 권유가 있어 고려수지침을 공부하게 되었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직접 내 손에 자침하며 뜸을 떴고, 지압, 자석,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부단한 노력으로 내 몸을 관찰하면서 정신건강을 증진시키던 중 주위 분의 권유로 자연건강법 교육에 참여하게 되었다.
나는 완전하게 건강을 회복하지 못한 채였다. 거리를 걷다가도 어린아이들이 달려오면 담 벽으로 몸을 움츠렸다. 아이들에게 부딪치면 내가 넘어졌기 때문이다. 교육에 참석하여 강의를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황당무계한 얘기가 아닌가. 병원에서도 약이 없으니 잘 먹고 편히 지내는 길밖에 없다는데 물 마시고, 소금 먹고, 풀을 먹으면 된다고 하니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이틀간의 교육을 마치고 와서도 나는 예전과 같은 생활을 하였다. 변함 없이 1년을 보냈다. 그후 또다시 자연건강법 교육을 받을 기회가 왔다. 무엇이나 때가 있는 법이 아닌가.
여성단체 회의 도중 옆 친구가 살짝 자리를 뜨려고 하기에 어디를 가느냐고 했더니, 아무나 갈 수 없는 자리라면서 일어서다 말고 나를 쳐다보며 평상시 건강으로 고생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던지 나오라는 신호를 보내와 함께 광주 북동 성당에 갔다. 도착하고 보니 1년 전 가톨릭센터에서 강의를 하시던 장두석 선생님께서 강의를 하고 계시지를 않는가.
하느님의 인도하심이 아닌가 싶어 의아스러웠다. 냉온욕, 풍욕, 6대 법칙, 단식을 실천한 결과 체중이 감소하면서 신진대사가 촉진되는 것을 느꼈다. 육식을 즐겨 먹던 나에게는 너무 힘든 과정이었으나 생식 7일을 넘기고 나니 밥을 먹고 있는 옆 가족들의 모습이 안타까워 보이며 나는 해낼 수 있다는 작은 희망의 불꽃이 일었다.
12일 단식 후 45일간의 생식을 통하여 신장 165센티미터, 체중 55킬로그램이 되었다. 온몸에서 끈적끈적한 땀이 쏟아져 나왔다. 온몸이 방바닥 밑으로 꺼져 들어가는 듯한 명현현상을 느끼며 그동안의 잘못된 생활을 반성해야 했다. 나는 내 생활을 돌아보며 "생활이 곧 건강법'임을 확인하면서 점점 활기를 되찾게 되었다.
자연건강법은 모진 비바람에도 힘차게 자라나는 잡초처럼 강한 생명력을 갖게 하는 요법이었으며, 나에게 과거를 반성하면서 인생을 창조적이고 아름답게 살아가도록 이끌어준 바른 건강법이었다. 절망에서 구원된 나는 주님의 도구로서 많은 분들에게 건강의 도움을 주었고, 협심증으로 고생하던 남편과 폐기흉으로 고생하던 막내아들, 급성 간염으로 고생했던 큰아들, 위암으로 고생하신 친정어머니, 고혈압으로 쓰러져 왼쪽 마비를 일으켰던 친정아버님 등 가족을 모두 병원을 찾지 않고 자연건강법으로 치유시킬 수 있었다.
우리는 병을 앓기 전에 먼저 순수한 마음과 슬기로운 지혜를 가지고 평소 자연건강법을 공부해 건강을 유지하여야 할 것이다. 나만이 아닌 많은 사람들이 병으로 인한 괴로움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자연건강법을 보급하고 마지막으로 사회에 봉사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썩어야만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살아가고 싶다.
의학적 소견
이취경 씨는 여러 여성단체에서 활동하여 남달리 지도력이 있는 사람이다. 근무력증과 류머티스성 관절염, 부인과 부위에 폴립이 있는 것을 알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의학적 지식이 풍부했다. 이취경 씨는 교육을 받고 열심히 건강법을 실천하여 건강을 되찾은 후 민족생활관을 운영하고 있다. 이취경 씨가 진실된 마음으로 환우들을 위해 봉사해주기를 바라 마지 않는다. 환우들을 통해 깊은 생의 체험을 하고 동서고금의 의학서적을 섭렵하여 자기를 갈고 닦는 데 매진해주기 바란다.
《사람을 살리는 생채식》, 정신세계사, pp.315-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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