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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부병 극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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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국노조 조회562회 작성일 21-06-18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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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기를 얼룩지게 했던 피부병

김요겸

(회사원, 서울 관악구 신림 9동 237-6)

나는 1975년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공무원이셨기에 우리집은 별 문제없이 평온한 생활을 해왔었다. 어머니는 이웃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가정주부이다. 다른 어머니들처럼 우리들을 극진히 사랑하고, 생활에 있어서는 알뜰하고 억척스러운 분이다. 어머니는 내가 국민학교 5학년일 때, 가사에 보탬을 주기 위해 하숙을 치기 시작하셨다. 내가 중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 하숙을 치셨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니는 그 무렵 가장 힘겨운 나날을 보내신 것 같다. 집안 살림하랴, 하숙생들 돌보랴 어머니는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쁘셨다. 그 와중에 아버지마저 중병에 걸렸으므로 어머니는 물심양면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어머니는 깊은 신앙심으로 그 고통을 이겨내셨고, 아버지도 건강을 되찾긴 하였으나 그 이후로 어머니는 퍽이나 늙어 보였다.

한편으로 어머니는 우리들에게는 소홀하실 수밖에 없었다. 정말 그때처럼 라면을 많이 먹어본 적은 없다. 우리 3형제는 하루 세 끼를 거의 라면으로 떼웠을 정도였다. 내가 발병한 것은 국민학교 4학년 때부터였는데, 그 후 아버지의 병환 때문에 어머니가 바빠서 5년 이상을 라면 등 가공식으로 끼니를 떼우다시피 하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였으나 돌이켜 생각하면 후회스럽기도 하다.

국민학교 4학년 어느 날, 가족끼리 동해안에 놀러간 일이 있었다. 그런데 내 종아리와 관절이 연결되는 무릎 뒷부위가 가려웠다. 나는 처음엔 그저 상처가 난 것이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저 가려우면 긁었고, 자다가는 나도 모르게 심하게 긁었다. 정말이지 전혀 심각하게 생각하질 않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자그마하던 생채기가 점점 커져갔다. 가려움증도 심해졌다. 계절이 바뀔 때면 더욱 가려웠고, 추운 데 있다가 따뜻한 곳에 가는 등 온도 변화가 있으면 가려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자다가 몹시 심하게 긁었더니 진물이 나고 아팠다. 나는 자다 말고 일어나서 목욕을 했다. 그러자 겨우 잠들 수 있었다.

아침이 되자 상태는 더욱 심각해졌다. 상처 부위가 부어올라 다리가 구부러지지 않는 거였다. 일주일 동안 학교에도 가지 못하고 누워서 지냈다. 어머니는 민간요법으로 밀가루떡을 만들어 상처 부위에 대주기도 하고, 약국에 가서 연고를 사다가 발라주기도 하셨다. 그 덕택에 다리가 조금 나아 걸을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그래서 학교에 나갔으나 여전히 가렵고 아팠다.

그때부터 나의 병원 순방이 시작되었다. 서울대병원, 이대병원, 한대병원 등등 안 가본 곳이 없었다. 의사들은 저마다, 시간이 가면 낫는다, 체질을 개선해야 한다, 사춘기가 지나면 낫는다는 등의 말을 하며 나름의 처방을 해주었다. 먹는 약과 바르는 약을 주었고, 병원에 따라서는 닭고기,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는 식의 음식 처방도 해주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약을 바르면 좀 낫는 듯하다가는 약을 끊으면 이내 도졌다. 그리고 점점 가려운 부위가 넓어졌다. 움직이는 관절 부위로 다 퍼졌다. 처음엔 여드름처럼 조그맣게 나더니 부위가 커지면서 번지는 것이었다.

국민학교, 중학교 내내 병원을 전전한 것을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진다. 병원을 옮길 때마다 검사를 받아야 했다. 피 뽑을 때마다 왜 그렇게 무서웠던지…. 반팔을 입을 수도 없었고, 여행을 다닐 수도 없었다. 수련회라도 가면 밤에 가려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사람들과 어울릴 땐 참을 수 있었는데, 밤에 혼자가 되면 온몸에 벌레가 기어다니는 것처럼 스멀거렸다. 수련회를 마치고 집에 오면 며칠간 죽을 지경이 되었다. 상처 부위가 더욱 심하게 가렵고 아팠다.

한편으로 어머니, 아버지께 너무 죄송했다. 나에게 들인 약값만 해도 엄청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너무 화가 나고 비참한 생각도 들었다. 왜 나만 이런 몹쓸 피부병을 앓아야 하는가. 친구들은 다 건강하게 생활하는데 나만 왜 이럴까. 성격도 나빠져 갔다.

고등학교에 들어오니 피부병은 더욱 심해졌다. 게다가 중학교 3학년 때부터 몸에 살이 찌기 시작하여 나는 비만해졌다. 어머니는 스테로이드제 부작용이라고 생각하여 약을 끊게 하셨다. 그 후로 병원에는 가지 않았다. 아무리 병원에 가도 낫지 않았으므로 맥이 빠져 있기도 하였다. 나는 그저 가끔씩 병원에서 연고를 타다가 발랐을 뿐이다. 아, 그 시절의 고통이라니…. 목욕을 하고 나면 살갗이 터져 갈라졌다. 갈라진 부위가 얼마나 쓰리고 아팠는지…. 항시 연고를 가지고 다니며 발라주지 않으면 참을 수가 없었다. "정말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것일까. 평생 낫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에 마음의 고통도 매우 컸다.

고등학교 2학년 말, 어머니와 나는 게르마늄 온천이 있는 고창에 갔다. 그때 이모의 소개로 장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다.

1993년 초 나는 장 선생님 댁에 가서 촉수를 받았다. 장 선생님은 "숙변을 제대로 빼지 못한 데다가 잘못된 식생활로 몸에 독이 쌓였다. 약을 많이 써서 몸에 요산이 과도하게 쌓인 상태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몸 안에 과도하게 쌓인 요산을 배출시키려 하니 신장이 지나치게 과로하게 되었고, 신장을 돕기 위해 피부가 대신 요산을 배출시켜주고 있다는 말씀이었다.

나는 처음에 장 선생님이 무서웠고 어서 집에 가고만 싶었다. 그리고 내 병이 정말 나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마음 한구석에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어쩔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나를 그곳에 남겨두고 서울로 올라가버리셨기 때문이었다. 또 촉수 후 장 선생님이 내가 전날 먹은 음식 종류를 정확하게 이야기하시는 바람에 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할 수가 없었다.

나는 7일간 장 선생님 댁에 머무르면서 6일 동안 단식을 했다. 매실엑기스, 야채효소, 조청, 마그밀을 먹고 하루에 한 번씩 관장을 했다. 하루 6, 7회 풍욕을 하고, 냉온욕을 하였다. 냉온욕을 하러 목욕탕에 가기가 너무 미안해 얼음을 깨고 목욕을 할 때면 눈물이 솟구쳐 올라왔다. 풍욕을 하는 것도 몹시 고통스러웠다. 상처 부위를 마사지하면 피부가 갈라져 고름이 나왔다. 쓰라리고 아팠다.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나중엔 그냥 담요를 덮었다 벗었다만 했다.

단식 이틀 후부터 명현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얼굴이 이상했다. 스멀스멀 가려워지더니 목 부위만 빼고 온몸에 발긋발긋한 것이 솟아올랐다. 제대로 된 것은 눈동자와 입술밖에 없었다. 눈썹이 다 빠져버릴 정도였다. 거울을 보기가 무서웠다. 한편으론 엄청나게 변을 배설해냈다.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 상태에서 회복되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눈앞이 캄캄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두려웠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상태였다. 정말 집으로 도망가려 해도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가지 못할 만큼 끔찍한 몰골이었다.

나는 장 선생님의 지시대로 상처 부위에 녹즙과 죽염을 섞어 바르고, 요법들을 충실히 수행하며 이를 악물고 버티었다. 가슴 한구석에 새 희망의 불씨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무서웠으나 어쩐지 이 방법대로 열심히 하면 나을 것 같았다. 나는 나에게 수없이 이야기했다. "낫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

집으로 간 뒤 나는 열심히 요법을 실행했다. 생식을 하고, 풍욕, 냉온욕을 충실히 했다. 가공식품은 일체 다 끊었다. 어머니는 나를 위해 날이면 날마다 들로 산으로 돌아다니며 산야초들을 캐오셨다.

그렇게 지낸 지 한두 달 뒤에 눈에서 고름 같은 것이 나왔다. 눈이 침침하고 아팠다. 장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더니 괜찮다고 하시며 죽염수를 넣어보라고 하셨다. 죽염수를 넣었더니 처음엔 눈이 따끔했으나 곧 시원해졌다. 그리고 눈이 말끔해졌다. 정말 신기했다.

두 달이 지나자 상처 부위에 딱지가 앉기 시작하더니 상처 부위가 허옇게 변했다. 그리고 차츰 정상적인 모습이 되었다.

나는 지금 회사에 다니고 있다. 일을 하면서 요법을 실행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특히 아침을 먹지 않고 일을 하려니 배가 너무 고프다. 그러나 어머니가 타주신 미숫가루를 조금씩 먹으며 버티고 있다. 하루에 물을 2, 3리터는 꼭 먹고, 죽염과 감잎차를 상복하고 있다. 지금은 오곡밥과 야채범벅, 야채즙을 먹고 있다.

장 선생님과 어머니께 감사드린다. 장 선생님은 나에게 길을 알려주셨다. 어머니의 고통을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어머니는 내가 아픈 것이 당신 탓이라도 되는 듯 안쓰러워하셨다. 장 선생님을 만난 후 어머니는 "나을 길을 찾았다."라며 기뻐하셨다. 어머니는 강인하고 믿음이 신실한 분이다.

고통은 사라졌지만 나는 지금도 풍욕, 냉온욕 등 각종 요법을 충실히 하고 있다. 혼자 가만히 생각해본다. 어쩌면 나는 평생 이 요법을 실천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고. 온 가족과 함께 아마 나는 이 요법을 생활화하여야 할 것 같다.

의학적 소견

피부질환은 다루기가 매우 어렵다. 치료 기간도 1년 이상 걸린다. 그래서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다른 어떤 질환보다 가족들의 이해와 결심이 필요하다.

청소년들이 앓는 피부질환의 원인은 대부분 숙변 때문이다. 숙변이 완전히 배설되지 않고 장에 쌓여 있으면 신장은 그 독을 배설하기 위해 과로하게 된다. 이 같은 신장의 과로를 막기 위해 피부가 대신 독을 배설시켜주는 것이 피부질환이다.

그런데 피부질환으로 찾아오는 환우들을 보면 대부분 각종 호르몬제를 먹고, 호르몬제가 들어 있는 연고를 오랫동안 발라왔기 때문에 일차적인 과제는 호르몬제의 독을 빼는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에 일시적으로 증상이 더욱 악화된다.

요겸이의 경우도 그랬다. 단식을 시작한 지 2, 3일 지나자 엄청나게 발진이 돋아나 쳐다보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환부에서 나오는 진물이 내 평상 이곳저곳에 떨어지곤 했다. 이는 체내에 정체되어 있던 요산 요독이 호르몬제로 인하여 발산되지 못하고 있다가 빠져나오는 것이었다.

한편 피부병 환우들은 오랫동안 부신피질 호르몬제를 복용하여 전신 기능이 약해져 있는 상태이므로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특히 피부질환은 현대의학의 논리로는 해결할 수 없다고 믿고 있으므로 우리는 각별한 신경을 쓰고 있다.

요겸이는 현재 건강하게 생활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요겸이의 경우 어머니의 믿음과 정성이 치료에 매우 큰 힘이 되었다. 요즘도 손수 직접 산과 들에 나가 산야초를 캐어 요겸이와 가족들에게 먹이는 것으로 안다. 환우를 건강으로 이끄는 것이 믿음과 사랑의 힘임을 다시 확인하게 해준 분이다.

《민족생활의학》 정신세계사 pp.341-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