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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보다 더 나은 국회의원, 과연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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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국노조 조회323회 작성일 21-06-18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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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하나가 나머지 아흔아홉 개 모두를 더한 것만큼의 가치를 지닐 때가 있다. 아니, 나머지 아흔아홉 개 모두를 더해도 그 하나의 가치를 따라가지 못할 때도 있다. 더하기 빼기만으로 그 가치를 온전히 설명하기란 어렵지만, 그럴 때가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며칠 전 있은 총선에서도 그랬다. 나머지 이백아흔아홉 개의 자리와 기꺼이 바꾸고 싶을 만큼 간절히 바라던 한 자리가 있었다. 바로 청소부 국회의원 홍희덕의 자리였다.

경기도 의정부을 선거구에 출마했던 홍희덕 의원은 떨어졌다. 새누리당 홍문종 후보에게 3065표 차이로 뒤졌다. 몇몇 언론에서 "하버드대 박사인 사립대 총장과 초등학교를 졸업한 환경미화원"의 대결, 또는 "1% 대 99%"의 싸움으로 소개했던 그 선거에서 그는 지고 말았고, 이로써 대한민국 국회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청소부 의원을 잃었다.

한 달 뒤면 국회에 들어가게 될 국회의원 당선자 300명 가운데 홍희덕 의원보다 더 나은 사람, 더 자격이 있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문득 궁금해졌다. 과연 우리가 홍 의원을 대신해 국회로 보내기로 한 300명은 정말 그보다 더 성실하게 우리를 위해 일해줄까. 두고 볼 일이지만, 그를 이대로 떠나보내는 것이 못내 아쉬워 마지막으로 그의 이야기를 글로 남기고 싶었다. 앞으로 다시 만나기 힘든, 4년 전 "국회를 청소하겠다"며 국회에 뛰어들었던 멋진 청소부에 관한 이야기다.

아쉽고 아쉽고 또 아쉬운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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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희덕 의원
 
홍희덕 의원의 보좌관을 통해 아침 일찍 인터뷰를 요청했다. 한참이 지나 저녁 늦은 시간에서야 다시 연락을 해온 그 보좌관은 인터뷰를 하기로 했다며 시간과 장소를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수석보좌관을 비롯해 모든 보좌관들이 인터뷰를 반겼으나 정작 의원 본인이 거부를 하더라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완강하게.

"패장이 무슨 할 말이 있느냐"는 것이 이유였다. 다행히 그날 저녁, 보좌관들과 의원이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가 있던 터라 보좌관 전부가 매달리다시피 해서 인터뷰를 성사시켰다고 했다. 그러니까 만일 그날 보좌관들과의 식사 자리가 잡혀 있지 않았다면 이 인터뷰도 없었을 것이다.

선거가 끝난 뒤 3일째 되는 지난 14일 오후, 선거 사무실에서 홍희덕 의원을 만났다. 인터뷰는 1시간 반가량 진행됐다.

듣던 대로 주차장 한켠에 나무와 비닐로 벽과 문을 세워 마련한 사무실이었다. "공사"도 보좌관들이 직접 했다고 한다. 어디까지나 남들처럼 번듯한 사무실을 빌릴 만한 돈이 없어 생각해낸 궁여지책이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선거를 어떻게 치렀을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중에 만나 물어보니 그가 2006년에 전국 조직으로 키워내고 초대 위원장까지 맡았던 전국민주연합 노동조합의 조합원 약 2500명을 비롯해 주로 노동자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아준 소액 정치후원금들로 겨우 선거를 치렀다고 한다. 물론 턱없이 부족한 돈이었다.

시간에 맞춰 홍 의원이 나타났다. 생각했던 것과 달리 자그마한 체구에 생각만큼 평범한 옷차림이었다. 집에서 바로 나오는 길이라고 했다. 벌써 며칠이 지나서인지 피곤한 기색은 없었다.

"정말로 아쉽죠. 아쉽습니다. 아쉽고..."

선거 과정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하다 그는 연거푸 세 번이나 아쉽다고 했다. 선거가 끝난 뒤 길 위에서 만나 안타까움을 드러내거나, SNS에 아쉬움의 글을 남긴 이들에 대해 이야기하던 즈음이었다. 자신이 국회의원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보다는 자신에게 기대를 걸었던 이들에게 실망감을 안겼다는 사실을 더 견디기 힘들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진심으로 그럴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될까 하고 생각했다.

사실 누가 봐도 여러 모로 힘겨운 싸움이었다. 이겨야 할 이유만큼이나 질 수밖에 없는 이유도 많은 선거였던 만큼 굳이 패인을 묻진 않았다.

18대 비례대표 국회의원 홍희덕

그는 지난 4년을 대한민국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일했다. 하지만 그를 아는 이들은 생각만큼 많지 않다. 2008년 곽정숙·이정희 의원과 함께 민주노동당(현 통합진보당) 비례대표로 18대 국회에 진출할 때는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환경미화원 출신이라는 그의 이력이 잠시 언론의 관심을 끌기는 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는 국회의원들이 가장 꺼린다는 환경노동위에서, 그것도 주류 언론이 거의 다루지 않는 의제인 비정규 노동 문제를 주로 다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299명 국회의원 가운데 손에 꼽힐 만큼 훌륭하게 일했다. 2009년부터 해마다 "국정감사 우수 의원"(2009·2011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선정, 2010·2011년 NGO 선정)으로 뽑히는가 하면, 2010년에는 <동아일보>가 실시한 "동료 의원들이 뽑은 베스트 국감 의원" 조사에서 환노위 1등에 오르기도 했다(동아일보, 2010년 10월 28일자).

당시 한나라당(현 새누리당)과 민주당(현 민주통합당) 의원들은 그에 대해 각각 "국감 마지막 순간까지 질의에 최선을 다하는 열정을 보였다", "소수당의 한계를 성실함으로 뛰어넘었다"고 평가했다. 그의 "열정"과 "성실함"은 방송 카메라에 잡히지 않았을 뿐, 생각이 조금 다른 동료 의원들의 마음마저 사로잡을 만큼 돋보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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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희덕 민주노동당 의원이 지난해 5월 26일 이채필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유성기업 공권력 투입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혹시 언론이 관심을 주지 않았던 것에 대해 서운하진 않았을까 궁금했다.

"언론은 아무래도 당 대표나 소위 사고를 친다든가 튀는 의원들을 많이 쫓아다니게 되는데, 저는 그런 걸 잘 못해요. 행사가 있을 때도 (어떤 의원들은) 언론에 조명을 받는 자리를 잘 파고 들어가는데(웃음), 나는 그냥 뒤에서 열심히 하면 되는 거지(라고 생각했다)."

국회에서 몸싸움을 벌일 때도 작은 체구 탓에 금세 들려나오기 일쑤였다고 한다.

"평상시에 몸싸움을 많이 했잖아요. 몸싸움을 하다가도 덩치 큰 사람들한테 금방 들려 나와 버리고, 강기갑 의원처럼 공중부양이라든지 김선동 의원처럼 뭘 던진다든지 그런 도드라진 행동을 잘 못하는 성격입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투쟁 현장을 열심히 찾아다녔다고 말했다. 하지만, 언론은 노동 문제를 다루는 데 인색했다. 그는 진보 언론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했다.

"쌍용차 노조의 파업 투쟁 같은 경우도 내가 제일 먼저 내려가서 단식도 가장 많이 하고, 투쟁 현장이라고 하면 안 가는 곳 없이 갔지만 그런 곳에 언론이 와서 보도를 해줍니까."

2010년 말 한진중공업 노조가 파업을 벌일 때도 그는 누구보다 먼저 부산 한진중공업으로 달려갔고, 그 뒤로도 수차례 서울-부산을 오가며 해결을 위해 힘썼다고 말했다.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이듬해 1월 85호 크레인에 올라가기 전의 일이다. 그 뒤로 고공농성이 길어지고 한진중공업 사태가 사회적 관심사로 떠오르자 다른 몇몇 정치인들이 뒤늦게 나서기 시작했고 "홍희덕"이란 이름은 더더욱 찾기 어려워졌다. 투쟁 현장에는 늘 그가 있었지만, 어쩌면 그래서 별로 눈에 띄지 않았던 이가 바로 그였다.

국회의원의 자격을 묻다

그가 막 국회에 들어갔을 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궁금했다. 그는 2008년 이명박정부의 민영화 정책 전반을 재검토하기 위해 구성한 "공기업 대책 관련 특위"에서 의정 활동을 시작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시절이었지만 그는 환노위 소속 의원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 당당하게 자원했고, 결국 인천국제공항공사의 매각을 둘러싼 의혹들을 세상에 알렸다.

"용기를 갖고 당차게 마음을 먹고 일했어요. 4년간의 국회의원직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판단하건데 노동조합을 민주적으로 자주적으로 전투적으로 이끌며 간부 활동을 열심히 잘 했던 사람이라면 국회의원도 다 할 수 있습니다. (국회의원) 숫자가 부족해서 개악안을 밀어붙이려 하면 몸으로라도 막아내는 거죠. 절실함으로 하면 됩니다. 영어를 못 쓰고 못 읽는다고 해서 국회의원 노릇하는 데 아무 지장이 없는 거죠."

그는 50살이 넘어 1993년에 의정부시 환경미화원이 되었고, 그로부터 또 몇 년이 지난 1999년에 노동조합을 결성하며 노동운동에 발을 들였다. IMF 외환위기를 거치며 고용이 불안정해지고 임금이 깎이는 등의 불이익을 참아야 하는 것도 문제였지만, 새벽에 함께 일을 나갔던 동료가 교통사고를 당해 주검으로 돌아온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렇게 의정부시설관리공단의 노동조합을 만들어 사무장을 맡은 것을 시작으로 경기도 노동조합의 사무국장에 이어 위원장, 그리고 마침내 2006년에는 전국민주연합 노동조합의 초대 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비록 늦깎이 노동 운동가였지만 그는 거침이 없었다. 하지만 전국 규모의 노동조합 위원장을 2년 넘게 해온 그에게도 국회의원 자리는 무척이나 두려운 것이었다고 한다.

"솔직한 심정은 (비례대표 경선에서) 설마 난 떨어지겠지하는 생각이었죠. 초등학교밖에 안 나오고 노조활동도 10여년 정도밖에 안 했는데... 속으로도 떨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엔 굉장히 두려운 거예요. 맨날 팔뚝질만 하고 투쟁만 하던 사람인데다, 또 상대들은 스펙이 전부 화려하잖아요. 그래서 그때 당시에는 떨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그는 비례대표 2번을 배정받아 결국 국회의원이 되었다. 당선된 뒤에는 다행히 곧바로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 문제가 불거지면서 개원이 미뤄졌다. 시간을 번 셈이다.

"당선자 시절부터 청와대에서 노숙부터 했죠. 청계천에서도 노숙하고... 점점 더 투쟁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항상 거기 결합하러 다니고, 18대 국회 개원이 굉장히 늦어져서 투쟁 쫓아다니는데 기분이 좋더라고...(웃음)"

개원을 앞두고는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노광표 부소장 등 노동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환노위에서의 대응 방안을 준비했지만 쉽지 않았다고 했다.

"이론적으로 머리에 잘 안 들어오죠. 나이도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을 다 익히기 위해 빡세게 공부도 하고 보좌관들 진용 갖추면서 (토론) 연습도 했죠. 오늘 솔직히 고백하자면 등원이 가까워지면서 점점 더 불안해지는 거예요. 정말 잘 할 수 있을까. 나를 보낸 환경미화원들이 있는데 가서 어버버버 하고 제대로 못 해버리면, '저 봐라 배우지도 못한 환경 미화원이 무슨 국회의원이냐"고 욕을 먹을 텐데, 그러면 나 욕먹는 건 괜찮지만 나를 보낸 환경미화원들, 노동조합원들이 욕 먹는 거고, 또 민주노총의 위상이 무너지는 거고... 이런 것들이 부담으로 오는 거죠."

불안한 마음에 집회 현장에 갔다가 밤 늦게 돌아오면, 혼자 옥상에 올라가 술을 마시기도 했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 먹었다고 한다.

"(개원이) 임박해서는 이래서는 안 되겠다. 그러면 뭘로 승부하느냐. 내가 살아온 경험으로 승부하자. 나는 누구한테도 자랑하지만 평생을 노동으로 살아온 사람이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실정에 대해서는 나만큼 아는 사람이 있겠느냐, 그 절실함으로 하자, 그렇게 마음을 다져 먹고 술도 확 끊어 버렸죠."

그리고는 앞서 말했듯 개원과 함께 구성된 '공기업 대책 관련 특위"에 들어가 인천국제공항공사 민영화를 둘러싼 의혹들을 파헤쳐낸 것이다.

청소부 국회의원 홍희덕이 국회에 남긴 것


2012041938457740.jpg 홍희덕 선거사무실 내부의 모습. 바닥에는 흰색의 주차선이 보이고, 왼쪽에는 나무와 비닐로 만든 벽이 보인다. 
국회에서 보낸 그의 4년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소수 정당으로서 부딪혀야 했던 현실 정치의 벽이 얼마나 높았을지 짐작하기도 어렵다. 그는 "(보수 정당이) 날치기 할 때마다 좌절했다"고 털어놨다.

"참 기가 막히고, 한계도 많이 느꼈죠. 조금이라도 의미있게 법을 바꿔서 노동자들,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제도적으로 도움을 줘야 되는데 (보수 정당이) 끊임없이 개악안을 가지고 오는 거죠. 기업을 더 살찌우고 노동자들을 더 옥죄는 개악안들을 계속 가지고 오니까 그거 막는 데 급급하다보니까 한계가 분명히 있었죠."

국회 밖에서 느끼는 좌절감도 만만치 않았다.

"투쟁 현장에 의원이 내려가서 뭔가 해결을 하고 와야 되는데, 가서 얘기할 수 있는 곳은 피감기관인 노동청 정도고, 만나서 중재에 나서라고 촉구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심지어 민주당하고 함께 가서 힘을 합쳐 요구해도 전혀 이뤄지지 않을 때 좌절하죠."

4년 전 국회의원이 된 뒤 모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반드시 이루고 싶은 일들 몇 가지를 꼽은 적이 있다. 비정규직 사용 사유 제한, 특수고용직노동자들의 노동권 보장, 최저임금 인상 등이었다.

"좌절됐죠. 어떻게 할 방법이 없더라고요. 법안들은 다 냈습니다. 냈는데 다 폐기된 거죠. 많이 아쉽죠. 작은 거 하나라도 했으면 좋은데... 새누리당이 다수인 상황에서 조금만 기업들에게 부담이 가는 거라면 아주 쌍지팡이를 짚고 공격해오고, 동의도 안 해줍니다. 기업들에게 정치자금을 받아서 정치하는 분들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는 선거가 끝난 뒤 이틀째 되던 날 서울 도봉구의 한일병원 식당 노동자들이 고용승계를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고 있는 현장에 다녀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들은 선거가 있기 바로 전날인 4월 10일에 병원 로비를 점거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그리고 다음 날, 그러니까 선거 개표가 한창이던 4월 11일 저녁에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고 한다.

"처음에 출구 조사 결과가 발표되면서 야권이 이길 것이라고 예상되던 때의 경찰이나 사용자 측 분위기와 개표가 마무리될 무렵의 분위기가 확연하게 다르더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새누리당이 과반 의석을 넘겼다고 했을 때 (함께 농성을 벌이던 상급 노조의 간부들이) 경찰에 의해 끌려나왔다는 거예요. 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정치가."

그는 지금 이 순간도 파업 투쟁을 벌이고 있는 재능교육 학습지노조를 비롯한 이른바 장기 투쟁 사업장들의 문제 역시 "(민주·개혁 진영이) 선거에서 압도적으로 이기는 순간, 과반을 넘기는 순간 쉽게 해결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도 지난 4년간 "홍희덕이 이거 하나만큼은 했다"라고 내세울 만한 일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그는 아주 잠깐 고민을 했다.

"못 배운 사람도, 노동자 출신도 국회 의정 활동을 얼마든지 훌륭하게 할 수 있다는 그런 흔적을 남기고 나가는 게 보람이라면 보람입니다. 치열하게 했고, 언론의 큰 주목을 받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진정성 있게 최선을 다했다고 스스로 평가를 합니다. 그래서 지난 4년에 대해 후회는 없습니다." 

그의 대답에 가슴이 뭉클했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더불어 그는 자신을 국회로 보내준 당에 대해서도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그러나 그를 국회로 보냈던 당의 규정은 통합 과정에서 사라졌다. 통합진보당의 비례대표 2번은 더 이상 비정규직 노동자가 아니다.

"나 같은 사람이 국회에 들어가는 게 더 이상은 어렵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현장에서 일했던 사람들도 국회에 가서 절실함으로 일을 해야 된다, 국회가 배운 사람들만 들어가는 곳은 아니다(라고 생각을 하지만) 현실의 벽이 너무 높아요."

그의 낙선이 더더욱 안타깝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는 환노위에 대해 애착이 강했지만 이번에 당선된 통합진보당 국회의원 13명 가운데 자신의 뒤를 이어 환노위에 들어갈 만한 인물을 선뜻 떠올리지는 못했다.

"환노위에는 두 사람 정도는 들어가야 하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각 상임위별로 중요한 곳을 한 사람씩 다 들어갈지, 아니면 집중해서 갈지 모르겠지만, 제 바람은 환노위에 두 명 정도 들어가서 집중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진보 정당이 제대로 발전하려면 노동 중심성을 세워야 하니까요. 아, 노동자가 투표 한번 잘 하면 세상 바뀌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아직까지 우리가 그렇게 선택을 못 받기 때문에 매번 소수 정당으로 밀리는 거 아닙니까. 노동 중심성을 세우려면 노동 관련 역할을 비중 있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이 가든 두 분 정도 가셨으면 좋겠다 (생각합니다)." 

홍희덕이 통합진보당에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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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원유세에 나선 딸과 함께 4번을 찍어달라고 호소하는 홍희덕 통합진보당 후보  
 
끝으로 거센 혁신의 요구를 맞닥뜨린 통합진보당에 대한 쓴소리를 부탁했다. 그는 당이 대범해지길 바랐다.

"당이 지금처럼 가서는 안 됩니다. 좀 더 대범해야 되고, 자기 사람이 아니더라도 어떻게 하면 외연을 넓힐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조금 생각이 다르고 이념이 조금 다르더라도 잘 아우르면서 가야 합니다, 바람이 있다면 그렇게 당이 발전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인터뷰 앞부분에서도 정파주의를 지적하며 당이 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 일이 있었다.

"당이 많이 변해야 합니다. 진보 정당에 들어와서 쭉 활동을 하면서 보니 노동조직의 병폐로 남아있는 정파적 문제를 당에서도 그대로 볼 수 있었습니다. 2007년에 당이 분열될 때까지만 해도 싸움을 하더라도 한 집안에서 싸우고 결정하고 해야지(라는 생각에) 당을 버리고 나가는 쪽이 조금 더 책임이 있지 않느냐 하고 생각을 했는데, 들어와서 4년간 의원활동을 하면서 겪어보니까 오죽하면 나가겠냐 하는 생각도 하게 됐어요. 당은 정말 많이 변해야 합니다." 

그는 이번 선거에서 야권 단일화 과정과 그 뒤의 선거 과정 모두에서 당 지도부로부터 외면 당했다며 서운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는 이러한 문제를 앞서 지적한 정파주의와 더불어 노동자 중심성에 대한 철저하지 못한 인식이 뒤섞여 벌어진 일로 보았다.

경기도에 현역 의원이 자신밖에 없는데도 이른바 3월 말까지 전략 지역 논의에서 자신의 선거구가 한 번도 거론된 적이 없었던 점, 또 어렵게 단일화를 이뤄 힘든 선거를 치르는 내내 이정희 공동 대표가 한 번도 선거구를 찾지 않았던 점 등을 예로 들었다. 그는 "굉장히 힘든 과정이었다"고 말했다.

"노동자를 기반으로 하는 정당 아닙니까. 순수한 노동자 의원이 수도권에서 어렵게 단일화가 돼서 고군분투하고 있는데 하루쯤은 와야 되는 거 아닌가, 굉장히 섭섭함을 느낍니다. 노동 중심성을 당이 저렇게 괄시하면 당에 전망이 없다고 봅니다. 민주노총을 대표하는 의원이 여기서 어렵게 단일화가 돼서 박빙의 승부를 했잖아요."

그는 아울러 지역구 및 비례대표 후보자의 공천 과정에서 당원들 사이에서조차도 검증된 적 없는 "납득하지 못할 후보들"을 내세운 점을 비판하기도 했다. 만일 당선이 됐으면 특정 정파의 전횡을 막고 균형을 잡는 역할을 하려고 했다며 아쉬워했다. 비록 떨어지긴 했지만, 앞으로도 기회가 된다면 당의 발전을 위해 쓴소리도 할 생각이라고도 했다. 부디 그의 쓴소리가 진보 정치가 거듭나는 데 밑거름이 되길 빈다.

선거 운동 기간, 어느 환경미화원이 자신의 청소용 수레 곳곳에 홍희덕 의원의 명함과 홍보물을 붙이고 다니던 모습이 사진에 찍힌 일이 있었다. 아는 이도 아니었고, 선거 캠프에서 부탁한 일도 아니었다고 한다. 그 환경미화원은 다음 선거 때도 누군가의 홍보물을 자신의 수레에 붙이게 될까, 또 다시 누군가의 당선을 그토록 간절히 바라게 될까 문득 궁금해졌다. 

안타깝게도 19대 국회의원 당선자 가운데는 아직 홍희덕 의원을 닮은 이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를 닮은 이가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운 이유는, 그가 나와 내 이웃과 가장 닮은 국회의원이었고, 그래서 나와 내 이웃의 사정을 가장 잘 이해해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19대 국회의원 당선자들이 이 점을 꼭 기억해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