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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그날] 제주 4.3 항쟁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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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국노조 조회331회 작성일 21-06-18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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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4·3의 전개와 인명 피해

1948년 4월 3일, 새벽 1시 경 김달삼을 중심으로 조직된 500여 명의 무장대가 11개의 지서와 서청, 대청 등 우익단체 요인의 집을 습격하면서 무장 봉기가 시작되었다. "탄압이면 항쟁이다"라는 깃발을 내걸고 "단선·단정 반대', '응원 경찰과 서청의 추방"을 주장하며 일어난 것이다. 미군정은 이 사건을 초기에는 치안 상황으로 간주, 4월 5일 제주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는 한편, 본토 경찰 1,700명의 제주 파병을 승인하고 서북청년회를 증파했다. 그런데 응원 경찰과 서북청년회의 횡포가 심해 도민들은 산으로 피신했고 그 결과 무장대 세력이 더욱 커져 사태는 더욱 심각해져 갔다.

미군정은 4월 17일, 그동안 관망 상태에 있었던 모슬포 주둔 국방경비대 9연대에게 사태 진압을 명령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경찰에 비해 민족적인 성향이 강했던 9연대는 이 사건을 경찰 및 서청과 같은 극우 세력의 횡포로 인해 야기된 것으로 판단하여 "선선무 후토벌"을 원칙으로 정하고 무장대와의 평화적인 해결 방안을 모색했다. 이 결과 1948년 4월 28일 9연대장 김익렬 중령과 연대 정보참모 이윤락 중위, 그리고 무장대 측 군사총책 김달삼 등이 만나, " 72시간 안의 전투 중지, 무장 해제와 하산이 이루어지면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등의 내용을 골자로 하는 평화협상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이 협상 직후인 5월 1일 우익 청년단의 조작에 의한 오라리 방화사건과 5월 3일 기습사건 등이 잇달아 발생, 평화 협상은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놓였다. 5월 5일 군정장관 딘(W.F.Dean) 소장은 제주도에 와서 최고 수뇌회의를 열었는데 이 자리에서 평화적인 해결 방안을 건의하다 경무부장 조병옥과 충돌한 김익렬 연대장을 전격 해임하였다. 이로써 무장대 측과의 평화 협상은 깨지고 말았다. 5월6일 김익렬 후임 연대장으로 박진경 중령이 부임했고 수원에서 창설된 11연대가 제주에 추가로 파견되었다.

1948년 5월10일 전국 200개 선거구에서 일제히 총선거가 실시되었는데 제주도의 경우 3개 선거구 중 2개 선거구에서 투표자 과반수 미달로 무효가 됨으로써 제주도는 남한에서 유일하게 5·10 단독선거 거부 지역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단독선거를 추진해 온 미군정은 제주도를 눈의 가시로 여겨 5·10 선거가 저지된 직후 군병력과 응원경찰력을 더욱 강화하였다. 증강된 군병력을 총괄하기 위하여 5월 중순 브라운 대령(미군 20연대)을 제주지구 미군 사령관으로 파견하여 경비대, 해안 경비대, 경찰과 미군을 통솔하도록 하였다. 브라운 대령은 원인 치유에는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오로지 진압 일변도로 몰고 나갔다. 신임 박진경 연대장도 대대적인 토벌 위주의 작전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러한 강경책은 폭도 아닌 폭도를 잡아들이는 부작용을 일으켜 제주도민의 반감을 더욱 심화시켰다. 도민의 반감은 저항의지로 혹은 두려움으로 나타나 산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늘어만 갔다.
1948년 5월 20일에는 박 연대장의 토벌정책에 반기를 든 41명의 경비 대원들이 모슬포 연대 본부에서 자신들의 무기와 장비 탄약 5,600발을 갖고 탈영, 산쪽에 가담함으로써 무장대의 힘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딘 장군은 박진경 연대장의 강경 토벌책을 오히려 칭찬, 6월초에 직접 내려와 대령 진급 계급장을 달아주었다. 하지만 박진경의 강경 토벌은 부하들의 반발마저 일으켜 6월 18일 부하 문상길 등에 의해 암살 당하는 사건이 발생, 토벌대에 충격을 주었다.

이후 제주 사태는 1948년 8월까지 잠시 소강상태가 지속되었다. 무장대 측은 지하선거와 해주대회 참여에 주력하였고 이승만 세력은 남한정부 수립에 몰두하였다. 하지만 1948년 10월에 들어서면서부터는 토벌의 강도가 다시 강화되었다. 남과 북에 적대적인 정부가 출현함에 따라 제주도 사태는 단순한 지역 문제를 넘어 정권에 대한 강한 도전으로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남한 정권을 장악한 이승만 정부는 평북 출신의 극우 인물을 새로이 제주도경찰국장에 임명하고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여 본토의 군병력을 대거 제주에 파견하였다. 10월 17일 신임 송요찬 연대장은 해안선으로부터 5㎞ 이상 지역을 적성 지역으로 규정, 이 지역에서 보이는 자는 폭도로 인정, 무조건 총살시킨다는 포고령을 내렸다. 이 포고령에 따를 경우 해안 마을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중산간 마을이 적성 지역에 해당한다. 이어서 10월 18일에는 해군 함정 7척을 동원하여 다른 지방과의 뱃길을 차단하고 제주도 포구의 모든 배에 출어 금지 명령을 내렸다. 이로 인하여 제주도는 완전히 외부로부터 차단되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제주도 초토화 작전이 전개된 것이다. 그런데 10월 19일, 제주에 파병 예정이던 여수 14연대가 4·3 토벌을 거부하며 여수에서 총부리를 돌려 이른바 '10·19 여순사건"을 일으킴으로써 정국은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게 되었다. 여수 10·19 여순사건은 좌익 세력 탄압의 빌미가 되어 이미 계획된 제주 초토화 작전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었고 결국 참혹한 양민 학살을 재촉했다. 초토화 작전을 원활하게 전개하기 위하여 토벌대는 10월 후반기에 제주 읍내 유지들에 대한 일제 검속을 강행하였다. 제주농업학교 운동장에 마련된 천막 수용소에 대부분의 유지들이 소환되면서 제주 읍내는 일순 공포 분위기에 휩싸였다. 법원장이 연행되었고 현직 검사를 비롯한 법조계 인사들마저 끌려가 즉결 처분되었다. 제주중학교 초대 교장(현경호), 제주신보 편집국장(김호진)이 총살되었고, 제주도청 총무국장이 서북청년회에 의해 고문치사 당했다. 게다가 서북청년회는 당시 유일한 지역 언론사인 제주신보를 강제로 접수하기까지 했다. 11월 초순에는 9연대 장병들 중 제주도 출신자를 중심으로 100여 명이 재판도 없이 처형되었다. 11월 17일에는 제주지역에 불법적인 계엄령마저 선포하여 초토화 작전을 집행하는데 장애가 되는 요소들을 철저히 제거하였다.

초토화 작전에 의해 1948년 10월말부터 1949년 3월까지 약 5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참혹한 집단 학살이 행해졌다. 4·3 전 기간 동안의 사망자 수는 3만 이상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반해 초토화 작전이 시작되기 전인 1948년 9월말까지의 사망자 수는 대략 1,000명 미만으로 알려져 있다. 토벌대는 무장대와 민중의 연계를 막기 위해 중산간 마을 주민들을 해안 마을로 강제 소개(疏開)시키고 100여 곳의 중산간 마을을 불질렀다. 소개령이 내려졌는데도 병자, 노인, 어린이 등을 포함한 일부 주민들은 마을을 떠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러나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이들에 대한 무차별 학살은 자행되었으며 소개령을 전달하지도 않고 방화와 학살이 이루어진 곳도 많았다. 태워 없애고, 굶겨 없애고, 죽여 없앤다는 이른바 '삼진정책(三盡政策)"은 제주도를 온통 피로 물들게 하였다. 베트남 전쟁 때 미군에 의해 자행되었던 '미라이 학살" 보다 더 참혹한 양민 집단 학살이 제주도 곳곳에서 일어난 것이다.  

   * 1948년 12월 14일 밤 표선면 토산리에 들어 닥친 토벌대는 18세부터 40세까지의 남자들을 연행한 후 죄의 유무도 묻지 않고 모조리 총살했다. 그리고 나서 얼굴이 고운 여자들을 골라 성폭행한 후 역시 죽였다. 그때 죽은 사람은 157명에 이른다. 마을 사람들은 아직도 그들이 왜 죽어야 했는지 이유를 알지 못한다(토산리 마을 학살).

* 1948년 12월 22일 토벌대는 표선면 가시리 주민들을 집결시킨 후 호적을 일일이 대조시켜 가족 중 한 사람이라도 없는 집을 골라내어 "도피자 가족"이라고 몰아 76명을 집단 학살했다. 가족 중에 한 명이라도 없으면 토벌대는 그 부모, 형제를 대신 학살했다. 이것을 "대살"이라고 불렀다(가시리 마을 학살). 

* 집단 학살은 중산간 지역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1949년 1월 17일 해안 마을인 북촌에서 가장 비극적인 집단 학살이 자행되었다. 세칭 '북촌 사건"의 발단은 마을 어귀 고갯길에서 무장대의 기습을 받아 군인 2명이 숨지면서 시작되었다. 이날 오전 11시경 2개 소대쯤 되는 무장 군인들이 "공비와 내통했다"는 이유를 대면서 북촌 마을을 포위, 300여 채의 집들을 불태우고 주민 1,000여 명을 초등학교 운동장에 집결시킨 뒤 차례로 인근 밭으로 끌고 가서 총살하였다. 이 집단 양민학살은 늦게 도착한 상급 지휘자의 명령으로 일단 끝났지만 그 다음날 함덕으로 소개된 주민들이 다시 처형되었다. 결국 이틀 사이에 북촌 주민 400여 명이 억울하게 죽었다. 이와 같은 "보복성 집단 학살"은 비단 북촌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북촌 마을 학살).


 
미흡하게나마 조사된 제주도 의회 신고 자료에 의하면 마을별 희생자 수는 상상을 초월한다. 봉개리 599명, 아라리 581명, 노형리 581명, 가시리 506명, 북촌리 487명, 삼양리 443명.... 이처럼 마을 별 사망자 숫자는 끝이 없을 정도이다.

초토화 작전으로 무장대는 빠르게 약화되어 갔다. 이때 식량을 확보하기 위한 무장대와  토벌대로부터 처벌을 피하고 싶은 주민간의 갈등이 심해지면서 무장대에 의한 주민 학살도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초토화 작전으로 주도권을 장악한 이승만 정부는 1949년 3월에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를 설치, 4·3 마무리 토벌 작전을 전개하였다. 토벌대가 5만여 명의 제주도민으로 구성된 "민보단"을 대거 동원, 산을 빗질하듯 쓸어 내리게되자 쇠약했던 무장대는 거의 궤멸 상태가 되었다. 무장대의 세력이 급속히 약화되자 1949년 4월 9일 이승만이 제주를 방문하고 5월 10일에 재선거를 실시하는 등 정부의 통치력이 과시되었다. 5월 중순에는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해체되고 1개 대대만이 4·3진압에 나설 정도였다. 더구나 6월초에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가 사살되면서 무장대의 저항은 거의 소멸되었다. 살아 남은 양민들은 토벌대의 눈치를 보면서 일상적인 삶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집단 학살은 다시 자행되었다. 4·3 봉기에 연루되어 육지에 수감되었던 사람들은 북한군이 들어오기 전에 대부분 처형되었고(1950년 7월) 훈방되었던 사람들도 예비검속에 의해 집단으로 학살되었다(1950년 7월∼9월). 예비검속으로 희생된 사람들은 "사상이 의심스럽다', " 경찰과 다투었다', " 군경에 비협조적이다', '3·1절 시위 발포 사건과 관련하여 총파업에 가담하였다', '4·3 때 가족 중 누군가 죽었다" 등 지극히 객관성이 결여된 감정적인 판단으로 연행되어 죽어간 것이다. 이러한 비이성적인 사상 청소 작업으로 제주도에서 희생된 사람 수는 약 1천명 정도가 된다(경찰서 별로 제주시 400∼500명, 서귀포 250명, 모슬포 250명, 성산포 6명). 백조일손지묘에 묻힌 사람들도 이때 죽임을 당한 자들이다.

공권력에 의한 집단 학살의 광기 속에 신음하던 제주는 1954년 9월 21일 제주도 경찰국장이 한라산 금족령을 해제하고 지역 주민들에게 부과했던 마을 성곽 보초 임무를 폐지함으로써 4·3 발생 6년 6개월만에 외면상 평시 체제로 환원되었다.(최후의 무장대원 오원권은 송당 지역에서 1957년에 생포됨)

3만 여명의 무고한 양민이 죽음을 강요당한 제주 4·3은 단순히 제주 지역사로 치부될 수 없는 대사건으로, 미·소를 주축으로 하는 냉전 체제가 구축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우리 현대사의 대표적인 비극이다. 친미 반공 국가를 구축하려고 했던 미국과 미국이라는 외세에 기대어 정권의 안정성을 확보하려고 했던 이승만 세력에 의해 제주도는 냉전 체제의 희생양으로 철저하게 짓밟혔던 것이다. 희생자의 대부분이 토벌대에 의해 희생되었다는 사실이(제주도의회의 자료에 의하면 83% 이상이 토벌대, 11% 정도가 무장대에 의한 희생이었음) 이를 말해 주고 있다.
 
- ③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