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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그날] 제주 4.3 항쟁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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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국노조 조회311회 작성일 21-06-18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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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제주 4·3의 성격

4·3은 해방 정국하의 통일조국건설운동이다. 그리고 미완의 해방을 진정한 해방으로 전환시키고자 한 민족해방운동이다. 이와 같은 성격은 "단독정부 수립 반대"라는 봉기 목적에 잘 드러나 있다. 그러나 이를 단순 도식적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지도부를 제외한 대다수 일반 민중들이 실제 이처럼 높은 정치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과장하는 것은 또 하나의 역사왜곡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에 대한 강한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와 대조적으로 인민위원회에 대해서는 깊은 신뢰를 보이고 있었다. 때문에 세련된 정치의식은 갖지 못했을지라도 생활 속에서 어느 편에 서는 것이 정당하고 정의롭다는 것은 몸으로 알고 있었다. 즉 항쟁 지도부는 외세로부터의 해방과 통일조국건설만이 민중의 고통을 더는 지름길임을 제시했고 민중은 이들을 믿고 따랐던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다음으로, 4·3은 강요된 저항이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조건에서 이들이 봉기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사회구조가 이를 말해준다. 1947년 3·1절 발포사건 이후 다음해 4·3 봉기 이전까지 약 2,500명이 구속됐던 상황만으로도 이 점은 잘 드러난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구속되었다는 것은 마을의 지도자급 청년이라면 거의 대부분 체포되었다는 점을 의미하며 이는 곧 제주도민들이 봉기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상황을 잘 설명해 준다. 북한의 사주 혹은 남로당의 사주였다는 주장은 이미 그 근거를 잃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민중을 단순히 대상화하여 바라보는 천박한 역사인식을 드러낼 뿐이다.

마지막으로 4·3은 제주민중의 수난사이다. 4·3을 역사적 사건으로 만든 가장 큰 요인은 무엇보다도 엄청난 인명이 희생되었다는 점이다. 실로 3만 명이란 숫자는 통계 수치로는 간단할 지 모르나, 한 사람 한 사람 그 가족의 아픔과 함께 가슴으로 다가간다면 이러한 대량학살은 무엇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혹자는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모한 무장투쟁 노선을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도부의 소영웅주의적 행태와 민중들의 자발적 투쟁을 동일하게 매도해서는 안된다. 패배한 역사였기에, 그들이 봉기할 수밖에 없었던 모순구조를 무시하고 4·3봉기를 비난만 한다면, 과연 1894년 갑오농민전쟁의 전봉준과 농민군은 어떻게 평가될 것인가. 수난사의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맥없는 넋두리나 양비론이 아니라 대량학살을 자행한 반인륜적 세력을 명확히 지적해내는 일이다. 
 
5. 맺음말

한동안 4·3은 누구도 말해선 안 되는 사건이었다. 4·19 혁명 직후 겨우 일기 시작한 진상규명운동은 이듬해 발생한 5·16 군사 정변으로 된서리를 맞았다. 4·3 진상규명을 요구했던 사람들은 옥고를 치렀고, 4·3에 관한 글은 판금되거나 필화사건을 일으키기 일쑤였다. 군부독재정권은 4·3을 은폐 왜곡했고 철저히 금기시 했다. 그에 따라 오랜 기간 제주도민들은 4·3을 입에 담지도 못했고 심한 허무주의와 레드 콤플렉스(Red Complex)에 시달려야만 했다.
 
유족들은 억울함을 호소하기는커녕 부모가 토벌대에게 총살당했다는 이유 하나로 어려서부터 '폭도 자식"이라는 소리를 들었고, '연좌제"의 사슬에 묶여 장래가 막혔다. 깡그리 불태워져 잿더미가 된 마을로 돌아온 후 굶주림에 벗어나기 위해 맨손으로 척박한 땅을 일구며 몸부림쳤던 것도 결코 작은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국민들은 고립 무원의 섬에서 발생한 이 처절한 학살극에 대해 사건 당시는 물론이고 그 이후에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교과서는 왜곡된 내용만을 전달하고 있을 뿐이며 언론도 오랫동안 침묵으로 일관해왔을 뿐이다.

1987년 6월항쟁으로 형성된 민주화 분위기 덕분에 비로소 진상규명운동이 다시 시작됐고, 이로써 일부나마 겨우 국민의 관심을 얻게 됐으니, 도민들에게 그간의 세월은 "아무도 달려와 주지 않았던 40년"이었다. 1989년 제민일보 4·3 취재반의 4·3 기획연재 및 제주4·3 연구소의 발족은 4·3 진상규명에 획기적인 전기가 되었다. 이는 그간의 논의가 진상규명을 촉구하던 수준에 비해 직접 조사 활동에 나섰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1993년 제주도의회에 "4·3 특별위원회"가 설치되어 피해자 신고작업을 시작했으며, 1997년에는 각계 지도급 인사들이 대거 참여한 가운데 "제주 4·3사건 제 50주년 기념사업 추진 범국민위원회"가 발족되었고, 2000년 1월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공포되었다.

4·3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몇 가지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다. 우선 정부와 미국이 비밀 자료를 당당히 공개해야 한다. 미군이 한국군의 작전 통제권을 갖고 있던 상황에서 초토화작전이 벌어졌기 때문에 미국의 비밀문서 공개는 무엇보다 필요하며 정부가 가진 4·3 관련의 모든 자료 역시 공개되어야 한다. 또한 국회와 정부는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진상규명 작업과 명예 회복, 위령 사업 등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며 적절한 보상 및 지원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노력만이 지난 세월 응어리진 도민의 마음과 말문을 활짝 열고 화합의 시대, 평화의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될 것이며 4·3의 한을 승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머지 않아 냉전 이데올로기의 벽이 완전히 무너지고 남북이 통일될 때, 단선·단정에 반대한 상징적 사건인 제주 4·3이 통일조국건설운동으로서 진정한 모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4·3 취재에 10년 세월을 오롯이 바친 제민일보 어느 기자의 글에 실린 희생자의 아픈 이야기는 여전히 우리 모두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이 이야기가 용서와 화합의 증언으로 승화되기를 바란다.

"난 어릴 적부터 한번도 악한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 가족을 죽인 사람들에게 원한을 품지도 않습니다. 죄가 있다면 학살을 명령한 이승만에게 있지요. 그런데 억울한 한은 풀어야 할 게 아닙니까. 요즘 보니까 비행기 사고가 나면 뼈라도 건지고 하다못해 그곳 흙이라도 담아오던데, 나는 남편이 묻힌 장소를 정확히 모르니 그조차 못해봤습니다. 난 텔레비전 연속극은 재미가 없어서 안 보지만 뉴스는 꼭 봅니다. 정치가 잘돼 죽기 전에 억울한 한을 풀 수 있는 좋은 세상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  제주사랑역사교사모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