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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초.. 발로 비벼 꺼주기만 해도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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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국노조 조회325회 작성일 21-06-18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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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한에 얼음 깨가며 쓰레기 수거하는 환경미화원 강용산씨
“제설 작업이야 우리 일 아니지만 거들어주는 것”
 
골목길을 돌아 그가 나타났다. 약간 실망이었다. 내복 2벌을 바투 껴입은 것도 모자라 목티셔츠와 방한 조끼에 파카까지 덧입은 나는 푸르고 날렵한 빗자루를 기대했던 것이다. 지난 1월14일 새벽 5시, 경기 의정부 호원동의 거리에서 환경미화원 강용산(56)씨는 달랑 알루미늄 집게를 들고 있었다. “빗자루는 안 들고 다니세요?” “음, 눈이 왔잖아.” “리어카도 안 끌고 오셨네요?” “음, 눈이 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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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 의정부시 호원동이 환경미화원 강용산씨가 담당한 구역이다. 눈이 많이 내리면 빗자루 대신 알루미늄 집게로 거리의 쓰레기를 청소한다.

특전사, 전화국 거쳐 거리의 청소부로

100년 만의 폭설이 지겹게 몰아닥친 것은 맞다. 그런데 그게 빗자루와 리어카 없이 다니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영하 18도의 찬 바람은 두 겹의 내복을 간단히 헤집고 들어왔다. 나는 푸들푸들 떨었다. 환경미화원을 둘러싼 해묵은 오해를 털지 못했다면, 그런 추위에 새벽 취재를 자원한 호연지기를 영영 후회했을 것이다.

“고향이 어디세요?” “서울.” “서울 어디요?” “서울 용산.” “네. …근데 설마 그래서 성함이 용산은 아니시지요?” “…, 그래서 용산 맞는데.” 웃을지 말지 나는 잠시 망설였다. 한국전쟁 무렵, 강씨의 부모는 용산역 TMO(여행장병안내소)에서 헌병 식당을 운영했다. 역 앞에는 콘크리트로 지어올린 방공호가 있었다. 부부는 방공호에 살았다. 용산은 전쟁통을 살아내는 삶터이자 일터였다. “용산아.” 튼튼한 방공호에서 태어난 튼튼한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부부는 행복했을 것이다.

“대통령이 돈도 보냈어.” 붉은 모자, 푸른 마스크, 노란 조끼를 차려입은 강씨의 목소리는 걸걸했지만, 그 곁을 치일 듯 달리는 새벽 자동차 소음에 곧잘 묻혀버렸다. “네?” “대통령이 돈 5천원하고 미역을 보냈다고.” 단독정부를 세우고 가장 먼저 피난을 떠났던 백발의 대통령은 즐거운 소식이 없는 난세에 뭇사람들의 화제가 된 ‘방공호 아이’를 챙겼다. 강씨의 삶에 대통령이 개입하는 일이 그것으로 끝났다면 좋았을 것이다. 두 번째 개입은 비극이었다.

강씨의 아버지는 용산 헌병 식당에서 번 돈을 호남비료 나주 공장에 투자했다. 그런데 5·16 쿠데타가 일어났다. 선글라스를 즐겨 쓰던 군인 대통령은 비료 공장을 국고에 환수해버렸다. “그때 돈으로 700만원이었다”고 강씨는 정확히 기억했다. 추운 겨울밤, 아버지는 아들을 무릎에 앉혀두고 졸지에 날려버린 평생의 재산을 낮은 목소리로 한탄했을 것이다. 아들의 뇌리에 700만원을 각인시켰을 것이다.

군인 대통령들은 그 뒤로도 강씨의 나이테에 흔적을 남겼다. 공부에 별 취미가 없던 강씨가 고등학교를 중간에 때려치우고 특전사에 입대했을 때, 여단장은 노태우 장군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창설하고, 전두환·노태우 대통령이 거쳐간 특전사는 “밥이 잘 나왔다”고 강씨는 말했다. 밥이 잘 나오는 특전사에서 그는 6년간 있었다. 중사 계급을 달고 전역했다.

밥을 먹기 위해 그는 전화국에 취직했다. 전화선을 설치했다. 전봇대에 오르고 철탑에도 올랐다. 하늘 보며 일했다. 그러다 1992년 의정부 시청을 찾아갔다. 환경미화원 자리를 구했다. 그때부턴 땅을 보며 일했다. “거리낌은 없었나요?” “왜 없었겠어. 아는 사람 만날까봐 많이 걱정했지.”

강씨는 새벽 4시에 일어난다. 새벽 5시부터 아침 9시까지 4km의 도로 주변을 왕복하며 청소한다. 집에 잠시 들어갔다 오후 1시부터 오후 5시까지 같은 구역을 다시 청소한다. 새벽 어둠 속에서도 그는 하얀 눈과 하얀 담배꽁초를 정확하게 분간해낸다. 알루미늄 집게로 담배꽁초, 종이컵, 비닐봉지 따위를 속속 집어낸다. “왜 빗자루를 안 쓰세요?” “이것 봐, 이렇게 꽁꽁 얼었잖아.” 강씨가 알루미늄 집게로 얼음을 탁탁 때렸다. “쓸어봐야 소용없어.” 혹한은 환경미화원을 더 힘들게 한다. 쓸지 못하고 일일이 ‘캐내야’ 한다. 알루미늄 집게로 꽁꽁 언 눈을 깨어 쓰레기를 집어내야 한다.

‘조용한 공생자’ 폐지 줍는 노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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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어카와 빗자루는 거리의 으슥한 곳에 둔다. 가끔 빗자루를 가져가는 시민들이 있다. 일을 마친 강씨가 리어카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장갑을 낀 왼손에는 비닐봉지가 거추장스럽게 들려 있다. 리어카가 편하지만, 눈 때문에 그것도 안 된다. 청소 리어카는 인도 쪽에 바짝 붙어 끌어야 한다. 안 그러면 자동차에 치인다. 그런데 쌓인 눈이 도로가에 몰려 있다. 청소 리어카 전용 차선을 꽁꽁 언 눈이 점유한 셈이다. 대신 비닐봉지에 한가득 쓰레기를 채워 정해둔 자리에 세워둔다. 쓰레기 트럭을 몰고 다니는 다른 환경미화원들이 봉지를 싣고 간다. 길가에 설치된 쓰레기통을 비우다 강씨의 비닐봉지가 끝내 터졌다. “에이 참, 비닐봉지도 언단 말이야.”

“이걸 안 줍고 지나가면 어떻게 되나요?” “모든 사람이 감시자야. 당장 민원이 들어오겠지. 청소 안 한 자리는 금세 표가 나거든.” 감시자들은 방귀 뀌고 성내는 사람들이다. 거리의 쓰레기는 시민이 버린다. 그걸 안 치웠다고 시민이 항의한다. “담배 버릴 때 발로 비벼 꺼주기만 하면 좋겠어.” 강씨가 싫어하는 시민은 담배 버리는 시민이 아니라 담뱃불을 끄지 않고 버리는 시민이다. 끄지 않은 담배꽁초는 리어카에 들어가 불을 낸다.

거리에는 감시자 말고 공생자도 있다. 폐지를 모으는 노인들이다. 새벽 6시, 강씨 앞에 리어카가 조용히 지나간다. 계란 담는 종이, 라면 담는 박스 등을 차곡차곡 담았다. 폐지 할아버지와 강씨는 조용히 거리를 분할한다. 옛날 환경미화원들은 폐지나 고철도 치웠다. 폐지를 내다팔아 헐거운 임금을 보충했다. 1990년대 후반, 환경미화원의 임금 가이드라인을 정부가 발표했다. 대신 폐지·고철을 파는 일은 금지했다. 그 일은 이제 하루 1천원이 아쉬운 노인들이 맡는다.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대문 앞 쓰레기를 치우고, 대신 일일이 수고비를 받는 일도 사라졌다. 수고비를 받으러 온 청소부 아저씨가 툇마루에서 막걸리와 김치찌개를 훌훌 마시던 기억이 나한테도 있다. 이제 사람들은 정해진 장소에 쓰레기 봉지를 내놓는다. 주택별 개인 수금도 금지됐다. 환경미화원은 더 이상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 수고하신다며 물 한잔 건네는 사람이 이젠 없다.

아침 7시가 되자 버스 정류장에 사람들이 나타난다. “이 추위에 아침 일찍 일 나가는 사람들은 전부 가난한 서민들”이라고 강씨가 말했다. 가난한 서민들은 어두워 앞이 보이지 않은 인도에서 곧잘 미끄러졌다. 인도에 내린 눈은 빙판이 돼 있다. 차도의 눈만 치우고, 인도의 눈은 치우지 않는 일이 참 부당하다고 평소에 생각했다. “그런데 왜 인도에 쌓인 눈은 안 치우셨어요?” 필요하다면 논쟁까지 해보겠다 침을 삼키며 물었다. “음, 그거.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야.”

제설 작업은 시청·구청 도로과 직원들의 일이다. 일손이 필요하면 시청 소속 계약직을 동원할 수 있다. 그런데 의정부엔 시청에 소속된 환경미화원이 없다. “네? 환경미화원은 모두 공무원 아닌가요?” 아니다. 전국 4만5천여 명의 환경미화원 가운데 절반이 민간 회사에 소속돼 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지방자치단체가 속속 민간업체에 폐기물 처리를 위탁했다. 강씨가 속한 의정부 시설관리공단은 일종의 ‘공기업’이지만, 시청 직영이 아니라는 점에선 민간업체와 똑같다. 시에 소속된 환경미화원들도 계약직이다. 언제든 해고당한다. 정년이 보장된 공무원과는 다르다.

전국 환경미화원 절반은 민간업체 소속

의정부에는 환경미화원을 채용해 시와 위탁계약을 맺는 4개 민간업체가 있다. 시설관리공단 소속 환경미화원은 78명, 4개 민간업체 소속 환경미화원은 200여 명이다. “시에서 협조 요청을 하지. 그러면 나가서 눈을 치우긴 해. 그런데 사람이 언제나 부족하거든.” 어제만 해도 오후 내내 눈을 치웠다. 원래 맡은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치웠다. 빙판길을 곡괭이로 찍고 망치로 두들겨 허물 벗기듯 벗겨냈다. 얼마나 치웠을까? 3시간30분 동안 30여 명의 환경미화원이 달려들어 겨우 1km를 처리했다. “지난주 내내, 곡괭이질을 했더니 팔이 너무 아파.” 골목길의 눈을 치우려면, 인도에 얼어붙은 빙판을 벗겨내려면, 동료 환경미화원이 더 필요하다.

그러나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이후 전국 지자체들은 반대 방향을 택했다. 시청 소속 환경미화원을 줄였다. 민간업체 위탁은 환경미화원의 감소를 부채질했다. 이익을 남기려고 인건비 지출부터 줄이고 보는 게 민간업체의 체질이다. “시에는 10명을 채용한다고 신고하고, 실제로는 8명만 쓰는 일이 종종 있다”고 나중에 ‘전국민주연합노동조합’ 사람들이 귀띔해줬다. 전국민주연합노동조합은 환경미화원들의 노조다. 청소 민간업체 사장은 전직 구청 공무원 또는 전직 시의원이 주를 이룬다. 민간업체에는 노조가 없는 경우가 많다. 임금도 덩달아 반토막 난다.

원래 의정부시에 채용됐던 강씨의 월급은 1999년 시설관리공단으로 소속을 옮기면서 50만원이나 줄었다. 노동조합을 만들고 97일간 파업을 했다. 쓰레기를 치우지 않았다. “특전사에 오래 계셨으니 데모를 싫어하셨을 것 같은데요.” “그럼, 데모하는 사람들 보고 ‘저 빨갱이 새끼들’ 했지. 그런데 내가 당사자가 되니까 그게 아니야. 칼자루 쥔 사람들은 힘들게 사는 사람들부터 죽이거든. 똑바로 살려면 내 권리부터 찾아야겠다 생각했지.”

아침 8시가 넘도록 강씨는 편의점에서 커피 한 잔, 24시간 골프연습장 사무실에서 물 한 잔을 마셨을 뿐이다. “사무실이나 휴게실은 없나요?” “없어. 눈비가 와도 잠시 피할 데가 없어. 거지 새끼처럼 마냥 남의 처마 밑에 서 있을 수도 없고.” 시설관리공단에는 환경미화원을 위한 공간이 없다. 각자 집에서 옷을 갈아입고 씻고 쉰다. 긴급한 연락사항은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받는다. 강씨에겐 거리가 사무실이자 휴게실이다.

그래도 강씨가 일을 계속하는 것은 임금 때문이다. 기본급은 95만원 정도지만 오랫동안 일했고 여러 수당이 붙어 한 달에 250만원 정도 번다. “너무 많이 버는 것 아니냐고 사람들이 뒷말하지 않나요?” 처음으로 강씨가 머뭇거렸다. “나는… 돈 많이 받는다고 생각하지 않아. 겨울도 고생스럽지만 여름엔 더해. 아스팔트 지열과 자동차 엔진열 때문에 50~60도까지 올라가면 숨이 콱콱 막혀. 쓰레기차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뒤꿈치가 망가져 다섯 달 동안 치료받은 적도 있어. 1999년엔 내 동료가 동부순환도로에서 차에 치여 죽었어. 나는… 고생하는 거에 비하면 돈 많이 받는 것 같지 않아.”

“월급 250만원… 이게 많이 받는 거라고?”

현재 국회에는 환경미화원과 관련해 수정법안이 제출돼 있다. 민주노동당은 전국 모든 지자체의 환경미화원 민간위탁을 없애는 법안을 내놓았다. 지자체가 직영하라는 것이다. 한나라당은 민간업체끼리 입찰 경쟁을 벌이자는 법안을 내놓았다. 그래야 민간업자의 비리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민간업체의 경쟁이 치열해지면 입찰가는 낮아질 것이고, 인건비도 줄여야 할 것이고, 환경미화원 수도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외동딸을 키워 이제 막 취직시킨 강씨도 18년 동안의 환경미화원 일을 그만둬야 할 것이다. 또다시 혹한이 닥치고 눈이 쌓이면 사람들은 애꿎은 청소부를 욕하며 빙판길에서 미끄러질 것이다.

글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