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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플루"에도 양극화의 비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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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국노조 조회329회 작성일 21-06-18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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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등포 지하 단칸방에 살고 있는 A씨는 머리에 열이 나는 증상이 지속돼 혹시 신종플루에 감염된 게 아닌지 걱정이 앞섰다. 때마침 퇴근길 영등포역에서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무료진료소를 발견했다. 30미터 가량을 줄지어 있었지만, 이런 기회도 흔치 않겠다 싶어 30분 이상을 기다렸다. 막상 진료를 받아보니 별게 없다. 발열증상을 체크하고, 콧물, 코막힘, 기침 등 호흡기증상이 있는지 간단한 검사를 받았다. A씨는 다시 한번 자신의 이마에 손을 얹어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병원 갈 시간도, 병원 갈 돈도 마땅히 없는데 ‘단순한 감기겠지’라고 생각하고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2. 유럽으로 해외출장 계획을 세운 서울강남구의회 소속 구 의원들이 “해외 출장 중 신종 인플루엔자 감염 위험이 있으니 예방접종과 필요한 약을 처방해달라”고 요구했다. 보건소 측은 구 의원들이 신종플루 의심환자나 확진환자도 아니고 백신 접종도 11월부터 가능해 난색을 표했지만 결국 의원들의 압박에 못이겨 타미플루를 처방해줬다.

신종플루가 ‘대유행’ 조짐을 보이면서 양극화 현상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우려가 현실이 되고 있다. 특히 백신과 치료제 처방, 검진 등 치료 과정에서 정부의 구체적인 대책이 마련되지 않으면 사회적 약자가 배제되고 결과적으로 전염병의 피해자로 남게 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신종플루 상담
대한의사협회와 서울시의사회 소속 의사들이 지난 28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시민들을 상대로 신종 인플루엔자 상담을 하고 있다.ⓒ 매일노동뉴스 조현미 기자


지난 14일 국회 보건복지가족위 안홍준 의원이 건강보험관리공단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보면 양극화 현상은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자료에 따르면 지난 6월까지 신종플루 치료제를 처방받은 사람은 4천 139명인데 이중 상위 10% 계층인 10분위 처방인원은 612명(14.8%), 하위 10% 계층인 1분위 처방인원은 178명이었다. 상위 20%와 하위 20% 차이는 더욱 크다. 상위 10%를 포함한 20% 계층은 1천 215명으로 전체 타미플루 처방인원의 29.4%에 달했고, 하위 20% 계층은 356명으로 8.6%에 불과했다. 물량이 제한된 백신과 치료제 처방, 병원 치료가 돈 있고, 힘있는 계층에게 몰리고 사회적 약자는 전염병에 대해서도 취약할 수 밖에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하지만 신종플루 사태가 사회 양극화로 나타나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은 제한된 백신과 치료제에 있는 게 아니라 정부가 신종플루 치료비 부담을 국민건강보험으로 떠넘기면서 나타난 구조적인 문제에 있다고 지적한다.

신종플루가 의심돼 병원을 찾은 C씨를 따라가보자. C씨가 찾아간 곳은 보건소. 보건소는 발열증상과 호흡기 계통에 심각한 증상을 보이자 대학병원을 찾아갈 것을 권한다. 다시 대학병원으로 향한 C씨는 발열 증세부터 살핀 뒤 피 검사 등 각종 검사를 받았다. 그리고 이어 교수라는 직함의 의사에게 직접 진찰을 받고 신종플루 ‘확진’ 판결을 받았다. 확진 검사만 12만원, 특진료와 각종 검사비를 더하니 20만원이 훌쩍 넘는다. 문제는 확진 판결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중증 환자의 경우 격리 치료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C씨는 중증 환자로 분류돼 병원에 입원했다. 격리 치료가 가능한 병실은 1~2인실이다. 1인실에 입원하는 데 하루 비용은 30만원. C씨는 무서워 덜컥 병원에 입원하긴 했지만, 확진판결부터 병원입원까지 들어가는 비용이 억울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전국가적인 전염병에 걸려 병원에 입원하는 것도 억울한데 그 비용을 고스란히 자기가 내고 있다고 생각하니 더욱 그렇다.

확진판결을 받기 전까지 자그만치 20만원이 들어가고, 중증환자로 분류되면 격리치료 비용까지 수십만원이 더 드는데 이런 만만치 않은 비용을 저소득층이 기꺼이 부담하고 치료를 받을지에 대해서 전문가들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저소득층의 경우는 또한 병원 접근성도 떨어져 치료에 관한 정보 없이 병원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신종플루에 걸릴 위험도 높다.

한 의사는 “아직까지 입원환자가 많지 않지만 증상이 심해지면 입원치료를 받아야 하고 치료비 부담으로 치료를 받지 못하는 계층이 대량으로 늘어나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소속 김종명 의사는 신종플루 사태에서 나타난 양극화 문제를 “신종플루 치료 비용을 건강보험으로 넘겼는데, 한마디로 국가가 부담해야할 문제를 국민부담으로 떠넘기면서 생겨난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백신과 치료제의 물량이 부족해도 국가가 책임지고 불평등하지 않게 공급한다면 양극화 현상은 나타나지 않는다. 문제는 정부의 태도”라면서 “정부가 초기 거점 병원으로 5개를 정해놓고 무료로 치료를 해줬는데 정부의 논리로 보면 전염병 초기 국가가 반강제적으로 격리해 치료비를 부담해줬지만 건강보험으로 돌리면서 돈이 없거나 싫으면 이제는 확진 판결을 받고도 입원하지 말라는 소리나 마찬가지”라고 꼬집었다.

타미플루
스위스 제약사 로슈의 신종플루 치료제 '타미플루'ⓒ 로슈


치료에 대한 접근도가 낮은 것도 양극화 현상을 부르고 있다. 영국 정부의 경우 타미플루를 의사의 직접적 진단 없이 소프트웨어 진단을 통해 처방했다. 지난해부터 인구대비 50%까지 치료제를 비축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영국은 또한 신종플루가 본격화되기 전부터 예방을 위한 정책에 힘을 기울였다. 지난 4월 예방대책을 담은 홍보책자를 각 가정에 배포하고 증상이 의심되는 사람들은 1,500개의 핫라인으로 전화를 연결하거나 웹사이트를 통해 자세한 증상을 설명하면 감염여부를 통보 받았다. 그리고 감염자에게 고유번호가 부여되고 감염자는 가족이나 친구를 지명해 집에서 가까운 특정 장소에서 치료제를 얻어 복용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민주노동당 곽정숙 의원실에 따르면 8월말 기준 한국의 타미플루 비축량은 190만명, 총 인구의 4%에 불과한 실정이다. 자칫 신종플루가 확산되면 재앙을 피하기 어려울 수 있다. 치료제를 조기확보는 커녕 ‘강건너 불구경’하다 뒤늦게 부랴부랴 호들갑을 떨고 있는 실정이다.

전문가들이 양극화 사태를 막는 첫번째 대책으로 꼽고 있는 것은 정부가 치료비 일체를 부담하는 것이다. 곽정숙 민주노동당 의원실에서는 신종플루 확진검사 전면 무상실시에 들어가는 예산을 약 1조 433억원으로 추정하고 있다. 4대강 사업에 쏟아붓고 있는 예산의 1/20만 투입하면 전국민이 무료로 치료가 가능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치료비 전액 보장 등 정부의 결단을 촉구한 우석균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실장은 “정부는 타미플루 무상공급과 진단비용 건강보험보장만으로 할 일을 다했다는 듯 처신을 하는데, 이러한 자세로는 신종플루 양극화를 막을 수 없다”고 단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