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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있던 우리의 역사와 땅을 찾아서 (네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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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국노조 조회230회 작성일 21-06-18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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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동북공정의 본질
 
 4일차, 어제까지는 백두산을 향해 동북쪽으로 계속 올라가는 방향이었는데 이제는 통화를 떠나 왔던 길을 되짚어 내려가는 방향이다.

 아침을 먹고 8시경 길림성 집안현으로 이동하였다. 버스안에서 ‘MBC 느낌표’에서 3차례에 걸쳐 방송했던 중국 동북공정에 관한 방송을 시청하였다. 우리가 본 것은 2회 까지 인데도 중국 동북공정의 실상을 알게되었다.

 중국은 현재 중국에 산재해있는 고구려, 발해의 역사 유물을 중국의 역사로 왜곡하여 개조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우리나라의 천리장성이 중국의 만리장성의 연장으로 되어버렸고 고구려는 중국 변방의 속국으로 되어버렸다.

 중국 동북 3성(길림성, 요녕성, 흑룡강성을 말하며 우리나라 고대 유적이 많은 지역이다.)은 물론이고 엤 고구려 영토 모두(고구려의 영토가 가장 광대했던 때에는 한강이남까지 이른적이 있었는데 중국은 이 지역 모두를 중국의 영토로 가르친다고 한다.)를 중국의 속국인 것으로 교과서에서 서술하고 가르치고 있다.

 중국은 이러한 작업을 수년 동안 치밀하게 진행하였고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신청해놓았다. 기가 막힌 일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을 막아내지 못한 것은 우리 민족이 분단된데도 원인이 있다. 통일이 되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광개토대왕비와 릉
 
 초입의 전각에 광개토대왕비가 서있다. 예전에 주변이 모두 논과 밭이었고 광개토대왕비도 밭에서 일하던 농부가 발견하였다고 한다. 광개토대왕비는 사방이 유리로 둘러친 전각 안에 전시되어 있었다. 높이 6.39m, 너비 1.35~2.0m에 달하는 동양최대크기이다. 글자는 훼손되어 알아보기 힘들고 깨진 곳이 많아 곳곳을 시멘트 등으로 메워놓았다.
 
 중국은 동북공정을 진행하면서 고구려를 중국의 속국으로 만들기 위해 일부 글자를 변조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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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개토대왕 비     ©전국노조

 
 광개토대왕비를 나와 바로 옆에 있는 광개토대왕릉으로 올라갔다. 릉 외부에 설치된 철계단을 올라가니 릉 내부를 바로 볼 수 있었다. 내부는 엎드려 들여다보아야 했는데 천정과 4면 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돌 관 두 개가 나란히 놓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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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로 보이는 것이 광개토대왕 릉이다.     © 전국노조


 릉 외부는 돌무더기와 깨진 돌조각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 드러나있었다.
 
 장수왕릉(장군총)

 장수왕릉은 광개토대왕릉에서 차로 2~3분 거리에 있다. 비교적 잘 정비되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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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수왕 무덤으로 알려진 장군총     © 전국노조

 
 장수왕릉의 내부도 두 개의 돌관이 놓여있고 지붕이 통돌을 얹어 놓았다. 성인 상반신 정도 크기의 돌들을 옮겨와 석총을 쌓은 당시 기술이 놀라웠다. 가이드의 얘기로는 겨울에는 눈을 이용하고 여름에는 물을 이용하여 옮겼다고 한다. 장군총 좌측 뒤로 작은 무덤이 하나 있었는데 부묘라고 한다. 용도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환도산성
 
 릉을 나와 버스를 달려 환도산성을 찾았다. 환도산성은 진흥왕때 건축되었는데 처음에는 위난성이었다가 산상왕때 개축하면서 ‘환도산성’으로 불렀다고 한다. 환도산성을 전쟁등 위기시에 사용하던 성이라는데 산위의 절벽을 한쪽벽으로 삼아 성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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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적을 맞서 싸운 군인들의 묘가 있는 환도산성     ©전국노조

 
 벌판에 홀로 서있는 산위에 쌓은 성은 어느 적도 침범치 못할 요새 같았다. 환도산성 앞에는 전투에서 죽은 군인들의 묘지가 여러 채 있었다. 왕릉처럼 돌로 촘촘히 쌓은것이 있는가 하면 아무렇게나 돌무더기를 쌓아올려 놓은 것도 있었다.
 
국내성
 
 길림성 집안현 시내에 있는 국내성은 고구려 성인데 평시에 사용하는 성이라고 한다. 고구려 2대왕인 유리왕이 세웠다고 하며 지금도 동서남북으로 그 흔적이 길게 남아있다. 둘레 2,686m, 높이 약 6m.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가 졸본에서 이곳으로 천도한 것은 AD 3년(유리왕 22)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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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에 보이는 주택가 앞쪽 긴 담이 국내성의 흔적이다.     © 전국노조

 
 집안현을 떠나 4시간여를 달려 단동시로 향하였다. 이동중에 대형 콘테이너 트럭이 길 중간을 막고 서있어 시간이 지체되었다. 불도저가 콘테이너 트럭 뒤를 들어주어 간신히 길이 열렸다. 

 버스로 계속 이동하여 단동시에 있는 호산장성 아니 박장성을 보았다. 박장성은 천리장성의 마지막 점인데 중국이 호산장성이라 이름을 바꾸고 만리장성의 연장이라고 주장하며 왜곡하고 있다. 박장성은 벌판에 홀로 서있는 가파른 산위로 높이 솟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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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작성, 천리장성의 하나인데 만리장성의 연장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 전국노조
 
 단동시내로 가는 버스안에서 이번 기행의 소감을 얘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새롭게 깨닫게 된 동북공정에 대해서 모두가 분노했다. 기대하지 않았던 것들을 깨닫게 되었다는 얘기도 많이 나왔다. 이번 여행으로 깨달은 것을 조합원과 함께 나누기로 다짐하는 시간이었다.

박작성을 끝으로 4일차 일정이 끝났다.

단동시내에 있는 호텔에서 마지막 밤을 보낸다. 참가자들의 단합의 시간도 가졌다.
 
5일차
 
 6시 30분경 단동시를 떠나 4시간 정도 대련에 도착하여 비사성에 들렀다. 산꼭대기까지 걸어가기엔 시간이 없어 차를 빌려 타고 올라갔다.
 
 비사성은 산둥 반도에서 해로로 평양성에 이르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요충지여서 중국세력과 여러차례 격전이 있었다고 한다. 이 성에서 당태종과 고구려의 싸움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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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사성. 중국과 우리나라의 격전지였으며 천리장성의 하나인데 당태종 이세민의 조각상을 세워놓고 중국의 역사로 왜곡하고 있다.     © 전국노조

 
 그런데 중국은 이 성에 당태종 이세민과 그의 부장들의 석상을 세워 중국의 유적지로 둔갑시켜 놓았다. 주인이 뒤바뀐 것이다. 원통한 일이다.
 
집으로 가는길

 모든 일정을 마치고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근처 전주식당에서 오랜만에 우리나라식 식사를 하고 공항에서 출국절차를 밟는다.
 
 4박5일의 짧은 여정이었지만 중국과 우리나라의 관계, 동북아시아에서의 우리나라를 느낀 시간이었다. 동북공정으로 역사를 왜곡하는 중국에 대해 다시 깨달았고 그러기에 더욱 통일이 절박했다.
 
 이번 여정에서 돌아보지 못했지만 동북 삼성은 항일 독립투쟁이 벌어지던 곳이었다.  또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항일 독립투사들의 여정을 따라가 보는 것도 좋은 교육이 될 것이다.
 
 아쉬움을 남기며 비행기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