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980년대 초반 경제안정화 정책과 기술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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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국노조 조회296회 작성일 21-06-18 13:26본문
1973년 1월 박정희 대통령은 철강, 비철금속, 기계(자동차 포함), 전자, 화학 등 6개 분야에서 중화학공업을 육성하겠다고 선언한다.
1960년대 가발, 섬유, 합판 등 경공업제품의 수출, 포항제철준공(73년 7월), 경부고속도로 완공(70년 7.11) 등 기초적인 사회간접시설 정도가 갖춰진 조건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선언은 놀라운 것이었다(70년대의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은 70년대 초반 동북아시아의 긴장완화 기류에 반발하여 독자적으로 국방력을 건설하려는 박정희 정부의 정치군사적 이해와도 맞물려 있었다).
다국적 기업의 경우 1970년대 두 번의 오일쇼크를 계기로 산업구조를 보다 고도화하기 시작한다. 극소전자혁명을 통해 설계나 기술개발 등 첨단 기능은 본국에 두고 주로 노동집약적인 단순조립공정을 해외로 이전하거나 에너지 다소비형,.공해유발산업을 후발 개도국으로 재배치하였다.
결국, 70년대 박정희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책은 생산시설을 재편하려는 다국적 기업과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책이 맞물린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러나 70년대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은 실패로 돌아갔다. 선진국에서 들여 온 생산설비 자체가 너무 낡고 생산성이 없는 상태에서 70년대 몰아닥친 불황으로 우후죽순처럼 건설된 중화학공업 시설이 제대로 가동되거나 이윤을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 연구에 따르면 70년대의 수출단가는 어림잡아 제조원가의 42~59%” 수준이었다(“한국경제의 뿌리와 열매”, 박세길, 돌베개, 1991). 이 시기 수출은 원가의 50% 수준이었다.
<표1> 1983년 가전제품의 내수가와 수출가(단위 불)
위 표에 따르면 1983년 무렵에도 내수가와 수출가의 차이는 무려 2~3배에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위 박세길의 책에서).
1970년대 중화학공업이 죽을 쑤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경제를 일으켜 세운 것은 중동 건설이었다. 오일가격 상승으로 막대한 외화를 번 중동 국가들이 대규모 건설 수주를 발주하기 시작했고 한국의 기업이 여기에 참여하여 중동 건설 붐이 불었다.
<표2> 중동 건설 수주액 (단위 억불)
1977년 한국의 수출액이 100억불이었음을 고려하면 위 중동 건설 붐이 얼마나 컸는가를 알 수 있다. 1960년대 독일에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들처럼 수많은 건설 노동자들이 열사의 땅 중동에서 숱한 어려움을 뚫고 달러를 벌여 들여 한국경제를 견인했던 것이다.
원가의 50%에 불과한 출혈수출을 메울 수 있었던 것은 정부가 대기업에 제공한 각종 특혜와 물가, 생필품 부족, 저임금 등의 방식으로 국민대중에게 고통을 전가했기 때문이다.
원가의 50%에 불과한 출혈에도 불구하고 대기업들이 수출에 주력했던 것은 수출 자체에서 벌어들인 달러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주어진 특혜였다.
“1962~82년 사이에 도입된 외국자본의 총액은 554불”인데 “60년대에 도입된 차관만을 놓고 보면 이자율이 공공차관의 경우는 3~4%, 상업차관은 6~8% 정도”인 반면 “은행금리는 25~30%, 사채이자율이 60~70%”수준이었다. 차관을 얻는 것 자체가 엄청난 특혜였던 것이다.
기타 조세, 수출금융 등에서 주어진 특혜까지를 포함하면 “지금까지 한국경제는 수출드라이브 성장가도를 달려왔고 기업의 성장도 물론 수출에 있었다. 그러나 수출 자체가 기업의 채산성을 확보해 준 것은 아니었다.”(효성물산, 조우종 기획부장의 말, 위 박세길의 책 104쪽)
“종합상사들의 수출실적 경쟁은 수출우등생이라는 명목으로 금융특혜를 비롯하여 각종 산업정책에서 특혜를 받고자 한 데 있으며 실제 그 혜택을 누려왔다. 다시 말하면 수출에서의 적자보다 정책특혜가 더 컸기 때문이다.”(김영호, “관권경제 특혜경제”, 청암, 89년, 위 박세길의 책에서)
한편, 1970년대의 중화학공업 수출에 따른 피해는 국민대중에 전가되었다. 노동자들은 저임금, 산업재해,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고, 국민대중은 생필품 부족과 통화증발에 따른 인플레이션, 징세 등의 형태로 고통이 전가되었다.
<표3> 소비자 물가지수, 한국은행 통계에서 필자 재구성
<표3>에 따르면 1972년의 소비자 물가를 100으로 했을 때 8년 후인 1980년은 356.7에 이른다. 8년만에 소비자 물가가 356% 인상된 것이다.
1980년 광주 유혈참사를 통해 집권한 전두환 정부는 1070년대 과잉 중복 투자된 중화학공업을 통폐합하는 한편 기존 정부주도의 경제성장정책에서 민간주도의 시장경제를 중시하는 정책으로 전환하기 시작한다.
당시 안정화시책을 주도했던 강경식에 따르면 “안정화시책은 78년 부동산 투기와 인플레이션 등 어지러운 경제상황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밝혀 보려는 노력에서 시작”되었는데 한국경제가 “공급부족 단계를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공급부족경제를 전제로 한 증산과 건설 정책을 기조로 하고 있기” 때문에 “자원배분이 왜곡되고 정상적인 기업활동보다는 정부정책에 따른 불로소득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진단하고 정부 주도의 성장우선 정책에서 민간주도의 시장경제 중심으로 정책기조를 바꾸었다고 한다(“80년대 경제개혁과 김재익 수석” 중 ‘금융실명제와 안정화시책’(강경식), 삼성경제연구소, 2003).
이에 따라 1980년대 초반부터 물가안정을 중시하고(안정), 정부통제 대신 시장기능을 중시하며(자율), 자국산업 보호에서 개방을 통한 경쟁촉진(개방)으로 전환하기 시작한다.
구체적으로는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주요 공산품 및 서비스요금 통제 완화, 저리의 수출지원 금융 등 관치금융제도의 개선, 독과점 규제, 공산품의 수입개방 등을 들 수 있다. 198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위 정책 기조는 이후 신자유주의의 세계적인 확산과 함께 차례차례 한국사회에 도입되었다. 그런 면에서 80년대 초반은 한국경제에서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1970년대까지의 공업화 전략은 정부가 주도하고 소수의 대기업에 재정, 금융, 세제 지원을 통해 선도 산업을 육성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위에서 밝혔듯이 이 과정에서 각종 부패와 정경유착 등이 창궐하고 국민대중에게 고통이 전가되었으며 유신 강권통치가 자행되었다.
그러나 민간 대자본의 성장 과정에서 중요하게 다뤄야할 의미있는 성과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1967년(68년) 설립된 현대자동차와 관련해 <시사IN>의 이종태 기자는 “현대차는 빅3의 동아시아 조립공장이나 저가 차량 전문 메이커로 전락할 수도 있는 기업이었다. 그러나 창립 초기에는 포드의 조립공장 지위를 박차고 나오면서 포니를 개발했고, 80년대 초반에는 GM과의 합작을 요구하는 전두환 정부에 대들면서 포니 엑셀의 대량생산-대량판매-대량 수출체제를 완성했다”고 적고 있다. (<시사IN> 2009.2.21자)
1972년 정주영 회장은 “조선소 건설 부지인 울산 미포항의 드넓은 모래사장을 찍은 사진 한 장을 들고 동분서주한 끝에 6900만불의 차관을 조달하는데 성공”했고 그와 동시에 “26만톤급 대형유조선을 수주”하여 “27개월이라는 놀라울 정도로 짧은 기간 안”에 조선소 준공과 유조선 진수식을 동시에 진행했다.(“대한민국 재벌”, 지동욱, 삼각형비즈)
1983년 2월 74세인 이병철 회장은 고심 끝에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기로 결심한다. 이른바 ‘도쿄선언’이다. 도쿄선언을 발표한 지 10개월 후인 83년 12월 삼성은 64KD램을 자체적으로 개발하여 시험생산에 성공하였다. 이 과정에서 삼성전자는 “83년에 기흥공장을 지으면서 이를 위해 연구개발과 생산라인 건설을 동시에 진행”했고 “1년 반으로 예상되었던 공사기간을 6개월로 줄여 반도체 생산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야기로 읽는 대한민국 경제사”, 석혜원, 미래의창)
“82년 초 국산 전전자교환기(TDX)의 기술개발을 담당하기로 했던 한국전기통신연구소”의 연구원들은 “‘연구원 일동은 TDX 개발에 실패할 경우, 어떤 처벌이라도 달게 받을 것을 서약한다’는 각서”를 쓰고 연구 개발에 착수하여 “86년 3월 전전자교환기 국산화에 성공하여 한국은 세계 10번째로 독자적인 통신산업 기술을 가진 나라”가 되었다.(위 석혜원의 책에서)
그리고 “공사입찰에서부터 건설과정까지 누구도 성공하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사우디의 주베일리 항만건설” 중동 건설이 있다.
위에서 예로 든 자동차, 조선, 반도체, 통신 등이 이후 한국수출에서 차지하는 역할을 고려하면 이 시기에 있었던 기술개발의 노력과 성과들은 중요하게 취급되어야 한다.
1960년대 가발, 섬유, 합판 등 경공업제품의 수출, 포항제철준공(73년 7월), 경부고속도로 완공(70년 7.11) 등 기초적인 사회간접시설 정도가 갖춰진 조건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선언은 놀라운 것이었다(70년대의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은 70년대 초반 동북아시아의 긴장완화 기류에 반발하여 독자적으로 국방력을 건설하려는 박정희 정부의 정치군사적 이해와도 맞물려 있었다).
다국적 기업의 경우 1970년대 두 번의 오일쇼크를 계기로 산업구조를 보다 고도화하기 시작한다. 극소전자혁명을 통해 설계나 기술개발 등 첨단 기능은 본국에 두고 주로 노동집약적인 단순조립공정을 해외로 이전하거나 에너지 다소비형,.공해유발산업을 후발 개도국으로 재배치하였다.
결국, 70년대 박정희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책은 생산시설을 재편하려는 다국적 기업과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책이 맞물린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러나 70년대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은 실패로 돌아갔다. 선진국에서 들여 온 생산설비 자체가 너무 낡고 생산성이 없는 상태에서 70년대 몰아닥친 불황으로 우후죽순처럼 건설된 중화학공업 시설이 제대로 가동되거나 이윤을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 연구에 따르면 70년대의 수출단가는 어림잡아 제조원가의 42~59%” 수준이었다(“한국경제의 뿌리와 열매”, 박세길, 돌베개, 1991). 이 시기 수출은 원가의 50% 수준이었다.
<표1> 1983년 가전제품의 내수가와 수출가(단위 불)
내수가 |
수출가 | |
칼라TV |
306.9 |
155.7 |
흑백TV |
62.3 |
45.2 |
녹음기 |
74.7 |
24.8 |
앰프 |
132.1 |
40.8 |
전축 |
190.3 |
62.7 |
위 표에 따르면 1983년 무렵에도 내수가와 수출가의 차이는 무려 2~3배에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위 박세길의 책에서).
1970년대 중화학공업이 죽을 쑤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경제를 일으켜 세운 것은 중동 건설이었다. 오일가격 상승으로 막대한 외화를 번 중동 국가들이 대규모 건설 수주를 발주하기 시작했고 한국의 기업이 여기에 참여하여 중동 건설 붐이 불었다.
<표2> 중동 건설 수주액 (단위 억불)
1977 |
78 |
79 |
80 |
81 |
82 |
합 |
33.9 |
79.8 |
59.6 |
78.3 |
126.7 |
113.9 |
492.2 |
1977년 한국의 수출액이 100억불이었음을 고려하면 위 중동 건설 붐이 얼마나 컸는가를 알 수 있다. 1960년대 독일에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들처럼 수많은 건설 노동자들이 열사의 땅 중동에서 숱한 어려움을 뚫고 달러를 벌여 들여 한국경제를 견인했던 것이다.
원가의 50%에 불과한 출혈수출을 메울 수 있었던 것은 정부가 대기업에 제공한 각종 특혜와 물가, 생필품 부족, 저임금 등의 방식으로 국민대중에게 고통을 전가했기 때문이다.
원가의 50%에 불과한 출혈에도 불구하고 대기업들이 수출에 주력했던 것은 수출 자체에서 벌어들인 달러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주어진 특혜였다.
“1962~82년 사이에 도입된 외국자본의 총액은 554불”인데 “60년대에 도입된 차관만을 놓고 보면 이자율이 공공차관의 경우는 3~4%, 상업차관은 6~8% 정도”인 반면 “은행금리는 25~30%, 사채이자율이 60~70%”수준이었다. 차관을 얻는 것 자체가 엄청난 특혜였던 것이다.
기타 조세, 수출금융 등에서 주어진 특혜까지를 포함하면 “지금까지 한국경제는 수출드라이브 성장가도를 달려왔고 기업의 성장도 물론 수출에 있었다. 그러나 수출 자체가 기업의 채산성을 확보해 준 것은 아니었다.”(효성물산, 조우종 기획부장의 말, 위 박세길의 책 104쪽)
“종합상사들의 수출실적 경쟁은 수출우등생이라는 명목으로 금융특혜를 비롯하여 각종 산업정책에서 특혜를 받고자 한 데 있으며 실제 그 혜택을 누려왔다. 다시 말하면 수출에서의 적자보다 정책특혜가 더 컸기 때문이다.”(김영호, “관권경제 특혜경제”, 청암, 89년, 위 박세길의 책에서)
한편, 1970년대의 중화학공업 수출에 따른 피해는 국민대중에 전가되었다. 노동자들은 저임금, 산업재해,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고, 국민대중은 생필품 부족과 통화증발에 따른 인플레이션, 징세 등의 형태로 고통이 전가되었다.
<표3> 소비자 물가지수, 한국은행 통계에서 필자 재구성
1972 |
1974 |
1976 |
1978 |
1980 | |
소비자 물가 |
100 |
128.2 |
185.3 |
233.5 |
356.7 |
<표3>에 따르면 1972년의 소비자 물가를 100으로 했을 때 8년 후인 1980년은 356.7에 이른다. 8년만에 소비자 물가가 356% 인상된 것이다.
1980년 광주 유혈참사를 통해 집권한 전두환 정부는 1070년대 과잉 중복 투자된 중화학공업을 통폐합하는 한편 기존 정부주도의 경제성장정책에서 민간주도의 시장경제를 중시하는 정책으로 전환하기 시작한다.
당시 안정화시책을 주도했던 강경식에 따르면 “안정화시책은 78년 부동산 투기와 인플레이션 등 어지러운 경제상황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밝혀 보려는 노력에서 시작”되었는데 한국경제가 “공급부족 단계를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공급부족경제를 전제로 한 증산과 건설 정책을 기조로 하고 있기” 때문에 “자원배분이 왜곡되고 정상적인 기업활동보다는 정부정책에 따른 불로소득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진단하고 정부 주도의 성장우선 정책에서 민간주도의 시장경제 중심으로 정책기조를 바꾸었다고 한다(“80년대 경제개혁과 김재익 수석” 중 ‘금융실명제와 안정화시책’(강경식), 삼성경제연구소, 2003).
이에 따라 1980년대 초반부터 물가안정을 중시하고(안정), 정부통제 대신 시장기능을 중시하며(자율), 자국산업 보호에서 개방을 통한 경쟁촉진(개방)으로 전환하기 시작한다.
구체적으로는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주요 공산품 및 서비스요금 통제 완화, 저리의 수출지원 금융 등 관치금융제도의 개선, 독과점 규제, 공산품의 수입개방 등을 들 수 있다. 198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위 정책 기조는 이후 신자유주의의 세계적인 확산과 함께 차례차례 한국사회에 도입되었다. 그런 면에서 80년대 초반은 한국경제에서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1970년대까지의 공업화 전략은 정부가 주도하고 소수의 대기업에 재정, 금융, 세제 지원을 통해 선도 산업을 육성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위에서 밝혔듯이 이 과정에서 각종 부패와 정경유착 등이 창궐하고 국민대중에게 고통이 전가되었으며 유신 강권통치가 자행되었다.
그러나 민간 대자본의 성장 과정에서 중요하게 다뤄야할 의미있는 성과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1967년(68년) 설립된 현대자동차와 관련해 <시사IN>의 이종태 기자는 “현대차는 빅3의 동아시아 조립공장이나 저가 차량 전문 메이커로 전락할 수도 있는 기업이었다. 그러나 창립 초기에는 포드의 조립공장 지위를 박차고 나오면서 포니를 개발했고, 80년대 초반에는 GM과의 합작을 요구하는 전두환 정부에 대들면서 포니 엑셀의 대량생산-대량판매-대량 수출체제를 완성했다”고 적고 있다. (<시사IN> 2009.2.21자)
1972년 정주영 회장은 “조선소 건설 부지인 울산 미포항의 드넓은 모래사장을 찍은 사진 한 장을 들고 동분서주한 끝에 6900만불의 차관을 조달하는데 성공”했고 그와 동시에 “26만톤급 대형유조선을 수주”하여 “27개월이라는 놀라울 정도로 짧은 기간 안”에 조선소 준공과 유조선 진수식을 동시에 진행했다.(“대한민국 재벌”, 지동욱, 삼각형비즈)
1983년 2월 74세인 이병철 회장은 고심 끝에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기로 결심한다. 이른바 ‘도쿄선언’이다. 도쿄선언을 발표한 지 10개월 후인 83년 12월 삼성은 64KD램을 자체적으로 개발하여 시험생산에 성공하였다. 이 과정에서 삼성전자는 “83년에 기흥공장을 지으면서 이를 위해 연구개발과 생산라인 건설을 동시에 진행”했고 “1년 반으로 예상되었던 공사기간을 6개월로 줄여 반도체 생산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야기로 읽는 대한민국 경제사”, 석혜원, 미래의창)
“82년 초 국산 전전자교환기(TDX)의 기술개발을 담당하기로 했던 한국전기통신연구소”의 연구원들은 “‘연구원 일동은 TDX 개발에 실패할 경우, 어떤 처벌이라도 달게 받을 것을 서약한다’는 각서”를 쓰고 연구 개발에 착수하여 “86년 3월 전전자교환기 국산화에 성공하여 한국은 세계 10번째로 독자적인 통신산업 기술을 가진 나라”가 되었다.(위 석혜원의 책에서)
그리고 “공사입찰에서부터 건설과정까지 누구도 성공하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사우디의 주베일리 항만건설” 중동 건설이 있다.
위에서 예로 든 자동차, 조선, 반도체, 통신 등이 이후 한국수출에서 차지하는 역할을 고려하면 이 시기에 있었던 기술개발의 노력과 성과들은 중요하게 취급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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