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있던 우리의 역사와 땅을 찾아서 (첫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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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국노조 조회239회 작성일 21-06-18 13:26본문
우리 노조에서는 간부들의 역사의식과 통일의식을 고취하고, 새로운 형태의 기행수련회를 갖기 위해 5월 24(일)부터 28(목)까지 4박5일간 고구려 유적지 및 백두산 역사통일기행을 진행했다.
대련 여순감옥 (안중근, 신채호 의사 구금 후 사망한 감옥) ->단동(압록강) ->집안(고구려유적지 및 광개토왕 무덤 및 기념비)-> 통화(백두산)-> 단동->대련의 코스로 다녀왔고, 전현직 지부장 등 22명이 참가하였다.
우리노조 조명심 법률국장의 참가후기를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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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인천공항에 오전 7시까지 집결이므로 새벽 4시에 일어났다. 전날 짐을 대충 싸놓기는 했지만 아침에 더 쌀게 있어 마저 짐을 챙기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5시 30분에 자동차로 출발하여 6시 30분경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아직 이른 시간인데도 대부분 도착해 있었다. 참가자 22명의 출석을 확인하고, 짐 가방에 이름표를 붙이고, 연두색 단체 조끼를 입었다. 초행길이고 여러 명이 움직여야 하므로 단체 조끼는 마지막 날까지 매우 유용했다. 로밍이 가능한 휴대폰은 공항에서 로밍 신청을 하였다.
공항 신한은행에서 환전을 했다. 중국돈은 인민화폐라고 하고 ‘위안’이라고 읽는다. 우리 돈 1만원이면 중국 돈 50원에 해당한다. 기내에는 액체류를 반입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으므로 짐을 한 번 더 확인했다.
비행기 티켓을 받고 수하물을 붙이고 기본적인 짐 검사 등을 거쳐 9시 10분경 비행기에 탑승했다. 안전벨트를 매고 드디어 출발! 활주로에서 비행기가 솟아오르는 동안 어지럼증이 느껴졌다. 신종플루의 영향 때문인지 사람이 많지 않았다. 소형 비행기였는데도 좌석이 많이 남았다.
1시간여 비행 후에 드디어 중국땅으로 들어섰다. 중국은 옅은 스모그가 있어 하늘에서 내려다본 땅은 뿌옇게 보였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똑같이 열을 지어 질서정연하게 지어진 주택들이 내려다 보였다.
대련공항에 도착했다. 대련과 우리나라는 약 1시간의 시차가 있어 중국시간으로 9시 30분이었다. 1시간을 이득 본 것같아 기분이 좋았다.
공항을 빠져나가자 여행사 직원이 안내하여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중형크기였는데 애초 계약보다도 좌석수가 작아 2일차에는 37인승으로 바꿔타야했다.
바로 대련에 있는 여순감옥으로 이동해서 점심식사(중국 식당 특유의 냄새에 익숙하지 않았다. 또 오이까지 기름에 볶아 내는 중국식 료리들이 입맞에 맞지 않아 식사를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중국은 식당에서 찬물을 내는 경우가 없다고 한다. 기름진 음식을 먹기 때문에 뜨거운 물과 차를 많이 마신다. 실제 일정 내내 뜨거운 차와 물을 실컷 마셨다)를 하고 여순감옥을 관람했다.
여순감옥 관람-안중근 의사의 독방과 통속의 사형수 해골
우리 나라의 서대문 형무소하고 비슷한 구조로 되어있는데 죄수들이 입었다는 옷이 걸려있는 방에 처음 들어갔다. 흙이 묻은 채로 줄을 지어 상.하의를 걸어놓았다.
교도소 내부는 3층으로 되어있고 2~3평 남짓한 방에 6~7명정도가 수용되어있었다고 한다. 내부에는 변기와 밥그릇 등이 놓여있었다. 복도 가운데가 쇠망으로 훤히 보이도록 되어있어 간수가 아래층을 동시에 감시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또 한 지점에서 동시에 여러 통로를 감시할 수 있도록 방사형으로 만들어져있었다.
안중근 의사가 수감되었던 독방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러시아 하얼빈 역에서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여 사살하였다. 이로인해 일본 경찰에 넘겨져 여순감옥에 수감되었다. 1910년 3월 26일 사형당하셨다.
안중근 의사는 유일하게 있는 독방에 수감되어 있어는데 옆칸에는 따로 방이 있어 늘 감시를 했다고 한다. 독방에는 침대와 탁자, 필기구등이 놓여있었다. 일본 간수조차 존경하였다는 안중근 의사는 나중애 사형을 당하는데 매장한 곳을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다.
일제는 사형수들을 교수형에 처하는데, 교수형한 상태 그대로 통속에 집어넣어 위에서 눌러 통째로 산에 매장하였는데 매장된 통들을 발굴하여 그대로 전시하고 있었다. 통속에서 눌린 채로 매장된 해골의 모습은 일제의 잔혹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여순 감옥에는 안중근 의사 말고도 우리나라 역사학자이며 독립운동가, 언론인인 단재 신채호 선생도 독립운동으로 수감되었다가 병사하셨다.
또 가까운 곳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있었는데 일제 시대에 법원으로 사용하던 곳이었다. 법원 내부와 고문도구가 전시되어있었다. 고문도구 전시실에는 잔혹한 고문도구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성해공원
아시아에서 최고 넓다는 성해광장에 가보았다. 공원은 바닷가에 있고 거대한 책모양의 조각상과 크고 작은 조각상, 놀러 나온 중국인들로 몹시 붐볐다. 다른 쪽에는 연날리는 사람들도 보였다.
단동으로 이동하여 1박
여순감옥에서 약 3시간 30분정도 이동하여 단동에 도착했다. 이름은 호텔이지만 우리나라의 여관 규모였고 2인 1실을 사용했다.
<홈페이지 소식마당에서 뒷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대련 여순감옥 (안중근, 신채호 의사 구금 후 사망한 감옥) ->단동(압록강) ->집안(고구려유적지 및 광개토왕 무덤 및 기념비)-> 통화(백두산)-> 단동->대련의 코스로 다녀왔고, 전현직 지부장 등 22명이 참가하였다.
우리노조 조명심 법률국장의 참가후기를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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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인천공항에 오전 7시까지 집결이므로 새벽 4시에 일어났다. 전날 짐을 대충 싸놓기는 했지만 아침에 더 쌀게 있어 마저 짐을 챙기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5시 30분에 자동차로 출발하여 6시 30분경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아직 이른 시간인데도 대부분 도착해 있었다. 참가자 22명의 출석을 확인하고, 짐 가방에 이름표를 붙이고, 연두색 단체 조끼를 입었다. 초행길이고 여러 명이 움직여야 하므로 단체 조끼는 마지막 날까지 매우 유용했다. 로밍이 가능한 휴대폰은 공항에서 로밍 신청을 하였다.
공항 신한은행에서 환전을 했다. 중국돈은 인민화폐라고 하고 ‘위안’이라고 읽는다. 우리 돈 1만원이면 중국 돈 50원에 해당한다. 기내에는 액체류를 반입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으므로 짐을 한 번 더 확인했다.
비행기 티켓을 받고 수하물을 붙이고 기본적인 짐 검사 등을 거쳐 9시 10분경 비행기에 탑승했다. 안전벨트를 매고 드디어 출발! 활주로에서 비행기가 솟아오르는 동안 어지럼증이 느껴졌다. 신종플루의 영향 때문인지 사람이 많지 않았다. 소형 비행기였는데도 좌석이 많이 남았다.
1시간여 비행 후에 드디어 중국땅으로 들어섰다. 중국은 옅은 스모그가 있어 하늘에서 내려다본 땅은 뿌옇게 보였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똑같이 열을 지어 질서정연하게 지어진 주택들이 내려다 보였다.
대련공항에 도착했다. 대련과 우리나라는 약 1시간의 시차가 있어 중국시간으로 9시 30분이었다. 1시간을 이득 본 것같아 기분이 좋았다.
공항을 빠져나가자 여행사 직원이 안내하여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중형크기였는데 애초 계약보다도 좌석수가 작아 2일차에는 37인승으로 바꿔타야했다.
바로 대련에 있는 여순감옥으로 이동해서 점심식사(중국 식당 특유의 냄새에 익숙하지 않았다. 또 오이까지 기름에 볶아 내는 중국식 료리들이 입맞에 맞지 않아 식사를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중국은 식당에서 찬물을 내는 경우가 없다고 한다. 기름진 음식을 먹기 때문에 뜨거운 물과 차를 많이 마신다. 실제 일정 내내 뜨거운 차와 물을 실컷 마셨다)를 하고 여순감옥을 관람했다.
여순감옥 관람-안중근 의사의 독방과 통속의 사형수 해골
우리 나라의 서대문 형무소하고 비슷한 구조로 되어있는데 죄수들이 입었다는 옷이 걸려있는 방에 처음 들어갔다. 흙이 묻은 채로 줄을 지어 상.하의를 걸어놓았다.
교도소 내부는 3층으로 되어있고 2~3평 남짓한 방에 6~7명정도가 수용되어있었다고 한다. 내부에는 변기와 밥그릇 등이 놓여있었다. 복도 가운데가 쇠망으로 훤히 보이도록 되어있어 간수가 아래층을 동시에 감시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또 한 지점에서 동시에 여러 통로를 감시할 수 있도록 방사형으로 만들어져있었다.
안중근 의사가 수감되었던 독방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러시아 하얼빈 역에서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여 사살하였다. 이로인해 일본 경찰에 넘겨져 여순감옥에 수감되었다. 1910년 3월 26일 사형당하셨다.
안중근 의사는 유일하게 있는 독방에 수감되어 있어는데 옆칸에는 따로 방이 있어 늘 감시를 했다고 한다. 독방에는 침대와 탁자, 필기구등이 놓여있었다. 일본 간수조차 존경하였다는 안중근 의사는 나중애 사형을 당하는데 매장한 곳을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다.
일제는 사형수들을 교수형에 처하는데, 교수형한 상태 그대로 통속에 집어넣어 위에서 눌러 통째로 산에 매장하였는데 매장된 통들을 발굴하여 그대로 전시하고 있었다. 통속에서 눌린 채로 매장된 해골의 모습은 일제의 잔혹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여순 감옥에는 안중근 의사 말고도 우리나라 역사학자이며 독립운동가, 언론인인 단재 신채호 선생도 독립운동으로 수감되었다가 병사하셨다.
또 가까운 곳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있었는데 일제 시대에 법원으로 사용하던 곳이었다. 법원 내부와 고문도구가 전시되어있었다. 고문도구 전시실에는 잔혹한 고문도구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성해공원
아시아에서 최고 넓다는 성해광장에 가보았다. 공원은 바닷가에 있고 거대한 책모양의 조각상과 크고 작은 조각상, 놀러 나온 중국인들로 몹시 붐볐다. 다른 쪽에는 연날리는 사람들도 보였다.
단동으로 이동하여 1박
여순감옥에서 약 3시간 30분정도 이동하여 단동에 도착했다. 이름은 호텔이지만 우리나라의 여관 규모였고 2인 1실을 사용했다.
<홈페이지 소식마당에서 뒷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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