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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3저호황과 내수팽창 그리고 민간대자본의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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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국노조 조회262회 작성일 21-06-18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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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직후 전 세계의 제왕으로 군림했던 미국은 1970년대 큰 고비를 맞았다. 베트남 전쟁에서의 패배, 1971년 금태환정지, 두 번에 걸친 오일쇼크, 닉슨의 워터게이트 사건 등 미국 내외에서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다.

나름대로 평화적이고 건설적인 대안은 군사적으로는 미소냉전을 완화하고, 경제적으로는 경제 재건에 성공한 일본, 독일과 경제권력을 공유하는 것이다. 그러나 1981년 1월 등장한 레이건 행정부는 평화와 권력분산을 거부하고 ‘강력한’ 미국을 재건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한다.

1980~91년 시기 상황을 근본적으로 규정했던 것은 여전히 미소 냉전 특히 핵ㆍ미사일 등 전략무기 경쟁이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1983년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지칭하고 SDI(스타워즈) 계획을 강행한다. 군사비가 급증하는 대신 감세 정책을 추진했으니 재정적자가 확대될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재정적자는 ‘국채발행-금리인상(국채를 소화하기 위해)-달러강세-경상수지 적자’의 고리를 타고 미증유의 쌍둥이 적자를 만들어 냈다.

<표1> 레이건 1기 행정부 시절, 재정ㆍ무역수지 적자 (단위 억불) 

 

1981

82

83

84

재정수지 적자

789

1279

2078

1853

무역수지 적자

280

364

671

1125

미국의 적자가 세계경제를 위협하는 상황에 이르자 G-5(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정상들은 1985년 9월 플라자 호텔에 모여 환율과 금리협조를 통해 미국의 쌍둥이 적자를 해결하기로 결정하였다.

플라자 합의의 요지는 미국의 무역수지 적자를 완화하기 위해 ‘달러 약세-엔 강세, 마르크 강세’를 추진하고 외국자본이 미국으로 계속 유입되기 위해 일본과 독일이 금리를 인상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따라 85년 달러당 240엔 수준이던 환율은 86년 달러당 120엔 수준으로 극적으로 하락한다.

한국의 원화는 달러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달러의 오르내림에 따라 원화의 가치도 동시에 오르내리게 되어 있다. 따라서 ‘달러 약세-엔 강세’가 발생하면 자연스럽게 ‘원화 약세-엔화 강세’ 현상이 발생하는데 이는 한국의 수출품들이 일본 제품에 비해 가격 경쟁력을 갖게 됨을 의미한다.

여기에 더해 국제원유가와 금리가 인하되었다. 국제금리의 경우 “미국의 프라임 레이트가 1983년 12%에서 86년 7.5%로 하락했는데 국제금리가 4% 하락하면 한국은 13억 달러가 경감된다.”(“대한민국재벌”, 지동욱, 삼각형비즈)

3저호황은 수출증가와 함께 무역수지에서 채산성을 맞출 수 있는 유리한 환경을 조성했다. 본 연재 ②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83년까지도 원가에도 미치지 못하는 출혈수출을 강행했다면 86년 3저호황이라는 유리한 조건을 배경으로 마침내 “86년, 수출단가가 제조원가보다 평균 4% 높은 수준에서 결정되었다.”(한국일보, 89.10.24, 위 박세길의 책 99쪽)

이렇게 해서 86~89년 한국경제는 무역수지에서 흑자를 낼 수 있었다.

<표2> 86~89년 경상수지 흑자 규모, 한국은행 (단위 억불) 

 

86

87

88

89



경상수지

47

101

145

53

346

무역수지

43

75

113

43

274

경상GDP

111

140

188

231

670
위 <표2>에 따르면 86~89년 경상수지 흑자액은 같은 기간 경상GDP의 50%를 상회하는 엄청난 규모였다.

85~89년 3저호황으로 경제가 급성장하고 있는 시점에 87년 6월항쟁과 7~8월 노동자 대투쟁이 이어졌다. 이는 군부 강권통치에 의해 지탱된 저임금 체제를 혁파하고 내수ㆍ건설투자와 설비투자가 선순환하는 경제 구조를 만들어 냈다.

<표3> 실질임금 증가율 및 내구재 소비 비중 추이 (단위 %) 

 

70~86

87~96

97~05

실질임금 상승률(연평균)

7.5

9.2

4.1

내구재 소비 비중

3.8

9.8

7.8

실제로 “한국 자동차 산업의 비약적인 성장은 내수시장 활성화에서 비롯되었다. 87년 이후 94년까지 매년 최저 10만대에서 최고 24만대씩 늘어나면서 자동차 물량을 대부분 국내에서 흡수한 것이다. 특히 88년까지 거의 비슷한 비중을 차지했던 내수와 수출의 비율은 88년을 고비로 내수 비중이 수출 비중을 압도하기 시작해 90년에는 거의 세 배 가까운 차이를 보인다. 구체적으로 90년 생산된 자동차는 모두 132만 2천대였는데 이 중 내수는 95만대 정도였고 34만 7천여대가 수출이었다.”(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인물과사상사, 207쪽)

아직은 유치했던 한국의 자동차 산업을 한 단계 끌어 올린 것은 87년 민주화투쟁 과정에서 저임금 체제가 무너지면서 발생한 내수 확장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기, 3저호황과 내수확장을 거치면서 민간대자본은 어떻게 되었을까?

첫째, 독자적인 자금 조달 능력을 획득했다.(이하 특별한 언급이 없으면 2006년 삼성경제연구소 심포지움, “한국경제의 역사적 전환과 도전, 한국경제 20주년의 재조명”에서)

이전 시기 재벌의 자금 조달은 대부분 특혜 금융에 의존한 것이었다. 그러나 “86~90년 중 기업들의 자금조달 중 내부자금 비중이 37.7%로 확대되었으며, 외부자금 조달 중 직접자금 비중이 42%로 상승”했다.

둘째, 독자적인 기술개발 능력을 획득했다.

“80년대 중반 이후 기업이 기술개발을 선도하는 단계에 진입”했는데 연구개발에서 정부가 차지하는 비중은 “75년 71%에서 85년 25%”로 추락한다.

특히 “80년대 중반부터 대기업이 주도하는 중화학부문의 투자가 가속화”되었고 “화학ㆍ전기전자ㆍ운수 분야” 등에 투자가 집중되었다. 구체적으로 산업별ㆍ규모별 설비투자 현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표4> 산업별ㆍ규모별 설비투자의 연평균 증가율(82~96) 

 

중화학공업

경공업

대기업

26.5%

(23.7→55.3)

17.3%

(8.6→6.5)

중소기업

17.7%

(8.2→6.5)

17.1%

(1.5→1.1)

주: ( )는 82년과 96년 해당부문의 투자액이 설비투자액에서 차지하는 비중 변화

<표4>에 따르면 대기업의 중화학공업 투자는 매년 26.5%로 증가했고 이에 따라 대기업의 중화학공업 투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82년 23.7%에서 96년에는 55.3%로 급증했다.

셋째, 대기업을 중심으로 한 독자적인 대규모 설비투자로 인해 8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산업구조와 수출품목이 바뀌게 된다.

<표5> 5대 수출 품목의 변화 

1977

1988

1996

2005

의류

의류

반도체

반도체

선박해양구조물

신발

자동차

자동차

신발

영상기기

선박해양구조물

무선통신기기

목재류

자동차

영상기기

선박해양구조물

어류

반도체

컴퓨터

석유제품

<표5> 따르면 1970년대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에도 불구하고 경공업 제품이 중심이었다면 1988년을 거쳐 1996년에 이르면 반도체ㆍ자동차ㆍ컴퓨터 등 자동차와 전기전자 분야 등 중화학공업ㆍ첨단 IT 산업이 중심이 된다.

넷째, 80년대 후반을 계기로 중소기업과 대기업, 정부와 대기업 사이의 관계가 조정(또는 역전)되기 시작한다.

<표6> 제조업 내 기업규모별 노동생산성 연평균 증가율

  

85~89

89~97

98~01

1인~9인

14.08

7.55

6.89

10~19

12.73

8.45

8.55

20~99

12.44

8.87

12.07

100~299

11.58

10.64

9.33

300인 이상

8.92

11.25

12.74
“한국의 산업경쟁력 종합연구:통계자료집”(KDI, 2003)

<표6>에 따르면 85~89년 사이에는 기업 규모가 작을수록 노동생산성이 높았다가 89~97년 사이 노동생산성 증가율이 역전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80년대 후반 대기업을 중심으로 노동력을 방출하는 대신 대규모 설비투자를 통해 자본집약적인 산업으로 탈바꿈했다는 점이다. 80년대 후반 이후 한국경제를 주도했던 것은 민간 대기업이라고 할 수 있다.

대기업과 정치권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92년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이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고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 대선에 출마하려 했던 사실은 대기업이 정치권력을 넘볼 정도로 성장했음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