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계의 연구대상이었던 자궁암에서 헤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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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국노조 조회444회 작성일 21-06-18 13:26본문
학계의 연구대상이었던 자궁암에서 헤어나
최성림
(주부, 전북 정읍시 연지동 연지아파트 106동 301호, 0682-535-2368)
세월은 유수와 같다더니 나를 두고 하는 말이리라. 5년 전 사경을 헤매던 내가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까맣게 잊고 사니 말이다.
5년 전 겨울로 접어들면서 몸에 갑자기 이상이 왔다. 생리 때가 되자 허리가 아프면서 왼쪽 무릎까지 아파왔다. 오래 걷기는커녕 싱크대 앞에서 5분 이상 서 있지를 못해 설거지조차 몇 차례씩 누워 있다 하곤 했다. 나는 월경만큼은 28일 주기로 항상 정확했고 통증도 전혀 없었다. 그런데 월경주기가 열흘씩 빨리 왔다. 나는 걱정이 되어 평소 다니던 산부인과를 찾았다. 별 이상이 없고 그저 단순한 염증이라고 하는데, 하루하루 지나면서 통증도 심해지고 심상치 않았다.
조직검사를 해보는 것이 좋을 성싶다길래 검사를 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그 착잡한 심정이라니……. 설마설마하며 일주일을 기다렸다. 일주일이 지나도 연락이 없길래 병원에 전화를 해보았더니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하며 그래도 명확히 해두기 위해 재검사를 의뢰했다고 했다. 그리고 일주일 후 암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나는 6개월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검사를 받아왔었고 그때마다 정상으로 나왔었는데 너무도 기가 막혔다. 이럴 수가 있나,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열심히 양심껏 산다고 살았는데,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믿기지 않아 전남대학병원을 찾았다. 역시 자궁암 1기 말이라고 했다.
바로 수술로 들어가야 한다며 의사 선생님은 수술할 부분을 그림으로 설명해주셨다. 너무나 두려웠다. 울지 않으려고 기를 써도 한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몇 시간을 병원 벤치에서 울었을까. 그날로 입원을 했다. 병실에 누워 있으려니 많은 생각이 들었다. 한 가닥 희망이라고는 수술밖에 없는데 수술을 받고도 살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어떻게 해야 하나. 남편과 아이들, 부모님, 형제들을 다시 볼 수 있을까. 해야 할 일들이 태산처럼 쌓여 있는데 이대로 갈 수는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느님을 찾았다. 병원에서 나가게 되면 진실로 하느님을 믿겠으니 나를 구해 달라고 기도를 올렸다. 이튿날 수술에 들어갔고, 장장 여덟 시간 반 만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 순간 살았다는 안도감에 눈을 감았다.
그러나 나는 수술 후유증으로 고통받아야 했다. 워낙 몸이 약한 편이어서 몸이 쉽게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2주일이 지나니 항암제를 맞아야 한다고 했다. 자상한 의사 선생님은 머리가 빠질 테니 모자를 준비하라고 말씀해주셨다. 항암제는 너무나 고통스러워 죽으면 죽었지 다시는 맞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2주가 지나자 또 항암제를 맞아야 한다면서 몸의 상태를 점검하였다. 하지만 평소 검사할 때에는 간기능이 좋았다가도 항암제만 맞는다고 하면 간기능이 좋지 않아 맞을 수가 없었다. 몸이 좀 나이지면 그때 항암제를 맞자길래 그대로 한 달 만에 퇴원했다. 전남대학병원 내에서 의사라면 나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서 내 차트를 찾으면 제자리에 있어 본 적이 없었다. 연구대상이었다. 의사들에게 차트가 떠돌아다닐 만큼 암 중에서도 굉장히 특이했던 모양이었다. 검사를 위한 혈액도 일본까지 보내졌고, 임상병리학회에까지 올라가 특이체질이냐 특별한 암이냐 하고 몇 차례 토론을 벌인 끝에 암이라는 최종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동안 나는 할 줄도 모르는 기도지만 마음속으로 간절히 했다. 기도중 나는 왠지 모르지만 살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생겼다.
병원에서 오라는 날짜에 갔더니 교수님께서 진찰하시고 항암제를 맞으라고 하셨다. 그래 이번이 마지막이겠지 하면서 맞았다. 방사선치료는 추이를 보아가면서 하도록 하고 2주일 후에 또 항암제를 맞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항암제 대신에 나는 자연식을 선택했다. 항암제를 맞으면서 자연식을 곁들이면 되지 않겠느냐는 선생님의 완강한 반대에도 내가 살 길이 항암제에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당시 입원해 있을 때에도 자연식 책자를 많이 보았었고, 아프기 전에도 언제부턴가 자연식에 관심이 있어 자연식 강의가 있으면 꼭 찾아가 듣곤 했었기에 나는 자연식을 믿었다. 더구나 그 무렵 유명한 재미교포 의사가 미국의 암연구 권위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인터뷰한 것과, 건강한 세포가 암세포를 잡아먹는 모습을 TV를 통해 볼 수 있었다. 나는 거기서 자신감을 갖고 그날부터 자연식요법을 시작하였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서 산책을 하고 하루 세 끼 오곡밥을 먹고 생채소를 많이 먹었다. 오후 3∼4시쯤에 간식으로 고구마 아니면 과일 같은 음식을 먹었다. 정확히 알아서 하기보다는 이 책 저 책에서 하라는 대로 해보았다. 그러기를 1년, 한참 몸무게가 늘더니 얼굴에도 살이 붙어 예뻐졌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거울을 보니 목이 굵어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살이 쪘으니 목이 통통해졌겠지 하면서도 뭔가 석연치 않았다. 의심쩍어서 몸무게에 신경을 썼다. 날마다 달아보니 조금씩 줄어드는 것이 아닌가. 목도 유심히 쳐다보니 임파선이 붓고 갑상선 부위에 밤톨만한 덩어리가 생겨 있었다. 전이라더니 이제 목으로 옮겨간 건가 싶어 정말 기가 막혔다.
나는 또 무턱대고 하느님께 매달렸다. 뭔가 자신감이 생겼다. 인간의 방법 말고 하느님이 주신 그대로 먹겠다고 다짐했고, 죽게 되면 죽겠다고 하면서 그날 이후로 내가 환자라고 의식해 본 적이 없었다. 다시 전남대병원을 찾았다. 이제는 산부인과가 아닌 내분비과로 가라고 하셨다.
내분비과 교수님을 만나기로 한 뒤 집에서 기다리고 있던 어느 날 우연히 친구가 찾아왔다. 중학교 동창인 친구는 자기 친구 남편이 간경화였는데 민족생활의학 자연건강법을 실천해서 완쾌했으니 한번 찾아가 보라고 했다. 하긴 나도 좀 잘못된 자연식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던 터라 친구를 찾아갔다. 친구는 며칠 후면 민족생활의학 교육이 10박 11일 과정으로 열린다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조건 받아 보라고 했다.
교육을 받는 동안 장두석 선생님을 뵙게 되었다. 내가 하고 있었던 것은 자연식이 아니라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자연식은 삼위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음식, 운동, 믿음이 조화가 이루어져야 되는데 나는 무턱대고 했던 것이다. 자연의 이치대로 사는 법을 하나하나 가르쳐주셨다. 하느님이 주신 가공하지 않은 그대로의 음식을 먹고 소화시키고 노폐물을 빼내며 피부를 단련시키고 온몸의 균형을 잡아주는 가벼운 운동을 같이 했다.
교육 후 나는 새벽 3시에 일어나서 풍욕을 35분 간격으로 오전 11시 반 정도까지 하고 녹즙을 하루에 석 잔 깨소금과 같이 먹었다. 생야채와 오곡가루를 점심·저녁으로 먹었으며 하루도 거르지 않고 냉온욕을 하고 열흘에 하루이틀씩 단식을 했다. 겨자찜질, 된장찜질과 관장, 각탕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오후에는 운동기구로 모관운동, 붕어운동 등을 두 차례씩 했으며 밤이면 목과 아랫배에 토란과 마고약을 붙였다. 그리고 자궁암에 좋다는 유근피와 각종 나무뿌리, 풀을 넣고 다려서 먹었다. 친정 부모님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3년 6개월을 내가 먹을 수 있는 각종 산야초를 날라다 주셨다.
1년에 한 번씩 포도철이면 포도단식도 2∼3주간씩 했으며, 몸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에는 녹즙 단식도 열흘씩 하였다. 자연식을 시작한 지 1년 만에 명현현상이 있었다. 몸의 관절마다 아팠고, 특히 무릎과 팔꿈치는 앉았다 섰다 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날이 갈수록 손과 하체가 전부 부었다. 3∼4일이면 낫겠지 했지만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이 고비만 넘기면 된다고 스스로를 달래면서 20일이 지난 후에야 조금씩 부기가 빠지기 시작하였고, 23일째 되면서 정상으로 돌아왔다.
며칠 후 전남대병원에 갔다. 산부인과 선생님이 놀라셨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2년 만에 살아서 나타났고 더구나 CT촬영, X레이 등 검사에서 모두 정상으로 나왔다. 그때 병원에서 나올 때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불치병을 이겨냈다는 사실이 삶에 자신감을 갖게 해주었다.
장두석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나는 현재까지도 자연식을 열심히 하고 있으며, 오곡가루와 생야채를 먹다가 오곡밥을 먹은 지는 이제 1년 5개월 정도 된다. 지금도 하루에 점심 한 끼밖에 먹지 않는다. 철따라 나는 과일과 감자를 주로 먹는다.
자연식을 하면서 나 자신에게 문제점이 너무 많았음을 깨달았다. 가족의 건강을 생각한다면서 볶고 튀기는 걸 좋아했던 잘못된 식생활이 병을 부른 것이다. 시집 와서 시댁 식구들과 호흡을 맞추려고 부단히도 노력하였고, 세밀한 내 성격에 빈틈없는 생활을 하다 보니 항상 긴장 속에서 살아왔던 것 같다.
이제는 자연식을 시작한 지도 5년이 지났다. 조금 일찍 민족생활의학과 장 선생님을 만났더라면 수술하지 않고 빨리 병도 나았을 것이고 수술과 항암제에 고통받지 않았을 텐데 싶어 안타까울 때가 있다. 항암제를 맞아서인지 명현현상도 수술하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늦게 나타났고, 오랜 시간 명현현상에서 헤어나지 못했었다.
4년이 지난 작년 여름에야 남편은 내게 수술하고 나서 6개월 아니면 1년 안에 재발되어 죽는다고 담당 교수님이 마음의 각오를 하라고 하셨다고 말했다. 나는 나처럼 난치병에 시달리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 글을 썼다. 나의 경험이 그분들에게 작게나마 본보기가 되길 간절히 바라며, 그분들에게도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길 기원한다.
의학적 소견
최성림 씨는 《사람을 살리는 단식》의 치험례를 쓰신 신명식 씨 부인 친구다. 그는 신명식 씨가 민족생활의학 요법을 통해 건강을 회복한 것을 보고 나를 찾아왔다.
최성림 씨는 자궁암 수술 후 항암제를 맞다가 교육을 받으러 왔다. 항암제를 두 번 맞고 나니 견딜 수가 없었다고 했다. 촉수를 해보니 목 임파선에 종양이 생겨 있었다.
나는 하던 사업을 중단하고 생식에 들어가라고 했다. 그는 내 말을 받아들여 3년간 꾸준히 생식을 한 후 건강을 회복했다.
최성림 씨는 성실하고 인정 있는 사람이다. 옆에는 신명식 씨가 있기 때문에 별 걱정 없이 든든하다. 최성림 씨는 사업을 하지만 무척 소박하다. 사업하는 사람이 욕심을 버리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여 가난한 사람이 병이 들면 반드시 살아나지만 부자가 병에 걸리면 욕심을 버리지 못해 생명을 잃는 경우를 종종 보아왔다. 최성림 씨가 살아난 것은 욕심을 버린 덕분이다. 그는 전형적인 한국의 어머니 상을 하고 있다. 그가 많은 사람의 어머니로서 덕을 베풀며 살기를 바란다.
《사람을 살리는 생채식》, 정신세계사, pp.340-3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