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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추근종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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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국노조 조회497회 작성일 21-06-18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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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 단식 치험례


척추근종암

김정애(준무형문화재 제83호, 경남 진주시 계동 149-1)

나는 평소에 쌀밥과 육식을 좋아했고, 가족들의 식탁도 그렇게 갖추어야 살림을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돼지고기는 사철 장복하다시피 하면서 식탁을 꾸며왔다. 그러한 식생활을 한 지 많은 세월이 흐른 1986년 어느 날이었다.

유서 깊은 이 고장 진주에서 해마다 전국적인 행사로 성대하게 열리는 개천예술제의 무용부문 경연을 주관하느라 여념이 없다가, 행사가 끝나고 휴식을 취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아직 여독이 풀리지 않은 상태의 어느 날 새벽, 잠결에 배를 손으로 쓰다듬다가 무심코 손에 만져지는 덩어리가 있었다. 오른쪽 아랫배에 달걀만한 크기의 덩어리가 분명히 감지되는 순간 잠이 번쩍 깨었고 긴장이 되면서 두려움을 느꼈다.

다음날, 평소에 우리 가족을 자상하고 정성스레 돌봐주시는 의사 선생님께 가서 진찰을 했더니, 꼼꼼하게 진찰을 하신 선생님은, "갱년기를 맞는 여성들에게 흔히 볼 수 있는 물혹이라는 것인데, 수술도 20분 정도면 충분하고 별 것 아니다."라고 말했다. 집에 와서 남편과 상의하고, 집안 정리를 대강 하고 난 다음날 병원에 입원했다. 그러나 결과는 전혀 예상 밖이었다. 일차로 사람 몸에 있는 혈액의 두 배가 넘는 12,000cc의 수혈을 받으면서 네 시간이 넘도록 대수술을 하고, 병실에 옮긴 지 얼마되지 않아 수술한 곳에서 출혈이 심하여 밤중에 다시 3,600cc의 수혈을 받으면서 재수술을 하고 난 후 중환자실에서 조리하게 되었다.

입원한 병원에서 혈액원을 운영하고 있던 것이 다행이었고, 집도하신 의사 선생님이 평소 우리 가족을 잘 돌봐주시는 분으로, 이분의 정성이 아니었다면 당시의 수술도 그 정도 선에서 매듭짓기 어려웠다는 사실도 나는 뒤에 알게 되었다. 중환자실에서 나흘 동안 생사의 기로를 헤매다가, 의식이 회복된 후 병실에 옮겨 치료를 계속하면서 그때까지 살아온 과거를 회상하게 되었다.

외교관이 되려는 꿈을 품고 불문과를 선택하였던 일, 외교관이 되면 그 기회에 우리 전통문화와 예술을 선양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고전무용과 거문고와 가야금 등을 배우고 수련하느라 침식을 잊은 채 노력했던 일, 대학 졸업 후 잠시 근무했던 어느 고등학교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난 것, 결혼한 후에 사표를 내고 남편의 직장을 따라 진주에 온 지 20년을 넘기면서 6남매의 어머니가 되었고, 부전공으로 닦았던 고전예술을 그냥 버리기가 아까워 무용학원을 설립하여 제자들을 기르면서 예술에 전념하는 동안 네 번의 개인 예술발표회를 가졌던 일들이 떠올랐다.

그 사이에 사회적인 직함도 여러 개 주어져 한국무용협회 진주지부장, 예총 진주지부 부회장,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3호(한량무), 무형문화재 제12호 진주검무 이수자로, 진주 교육대학 강사로 동분서주했던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곤 했다.

아울러 홀어머니와 엄격한 남편, 6남매의 얼굴이 떠올랐다. 영욕의 날들을 추억하면서 휴식을 취하는 기분으로 투병생활을 했고, 한편으로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지난날을 정리하면서 앞날에 대한 힘을 저축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안배해 주신 것으로 알고 감사한 마음으로 병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5일에 걸쳐 주사를 맞았는데, 전신에 힘이 빠지고 너무나 견디기가 어려워 남편에게 물었더니, 수술로 떼어낸 종양이 다시 재발하지 않게 하기 위해 항암주사를 투입한 것이라고 했다. 그후 20여일 만에 퇴원을 하고, 집에 온 후에도 계속 항암주사를 맞아야 했고, 문병 오는 사람들마다 어두운 표정으로 돌아가는 것이 이상했다. 특히 퇴원 직후 교회에서 실시하는 꾸르실료 교육에 봉사하러 가서 강의를 하는데, 봉사자나 수강자 모두가 눈물을 흘리면서 슬퍼하는 모습들을 보고 나는 무엇인가 개운찮은 뒷맛을 느끼긴 했다. 그러나 그저 사람들이 내 말을 듣고 통회하느라고 그런 것이겠지 하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뒤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나를 아는 모든 분들이 저 사람 생전의 마지막 강의 봉사라는 것을 알고 모두가 그렇게 몹시 울었다는 것이었다).

얼마 후 집에서 정양하고 있는데 머리가 전부 빠져버리고 흰 털이 보송보송 생겨나는데도 계속 항암주사를 맞아야 한다는 말을 듣고 무엇인가 심상찮은 일이 전개되고 있는 것 같았고 차차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 뒤 이차 삼차 항암주사를 맞는 도중에 너무 괴로워 중단하고, 좋다는 약과 음식을 먹으면서 나름대로 노력해 보았다. 원래 난치병에는 약이 많은 법인데 만나는 사람마다 좋다는 처방이 모두 틀렸다. 구할 수 있는 대로 구해 먹고, 고기와 보약을 장복하다 보니 몸은 불어나고 체중이 불어나 겉으로 보기에는 수술 이전보다 더 좋은 것 같았으나 월 1회 병원에 가서 검진을 해보면 백혈구가 몹시 부족하여 항암제 투여마저 연기해야 하는 상태였다.

그후 수술한 지 7개월째 되는 1987년 5월 22일, 검진을 겸해서 항암주사를 맞으려고 병원에 가니, 검사를 마치고 난 후 의사 선생님이 "이제 항암주사는 맞지 않아도 되겠다."고 하셔서 나는 기쁜 마음으로 집에 와 지냈다.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난 후 8월 24일 어느 자매님의 소개로 장 선생님을 만났다. 거제도에 있는 신현성당에서 체질개선과 자연건강에 대한 강의가 있는데, 강의할 분이 지금 자기 집에 와 있다는 것이었다. 와서 아픈 곳을 한 번 보여드리지 않겠는가 해서 급히 서둘러 갔더니 그분은 나를 한 번 쳐다보더니 아무 말 없이 밖으로 나가 대기하고 있는 차에 오르는 것이었다(뒤에 들은 말은 그때 나를 얼핏보면서 체모관측을 해보니 너무 위험한 상태여서 피했다고 했다).

나도 주선한 자매님의 권고로 그 차에 같이 타 거제까지 가서 그분의 강의를 듣고, 그곳 성당 신부님 어머니의 간곡한 소개로 진찰을 받았는데 촉수진찰을 마친 그분은 아주 심한 중환자라고 했다. 나는 속으로 "주치의 선생님은 이제 항암제 주사도 필요 없다고 하셨는데 이분은 왜 나를 중환자라고 하는가" 하는 의구심을 가졌다.

그러나 강의내용이 강하게 가슴에 와 닿으면서 공감이 갔다. 평소에도 주님께 병의 치유를 위해 간절히 기도를 바칠 때마다 지금 나와 우리 가족이 먹고 있는 이 식사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서 집에 온 즉시 가족들의 동의를 얻어 과거의 식단을 버리고, 강의에서 들은 대로 식생활을 바꾸고, 물리요법과 냉온욕 등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어느 날 아랫배를 만져보니 수술하기 전과 같은 혹덩어리가 있었다.

병원에 가서 보이니 의사 선생님은 다시 수술을 해야겠다고 말씀하시고, 남편에게 의논하니 "당신 배는 열어본 사람이 제일 잘 알 것 아니냐?" 하면서 의사의 권유에 따르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죽어도 재수술은 하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한 주일 동안 여러 곳을 알아보다가 문득 지난 번 거제에서 자연건강요법을 강의해 주시던 분이 떠올라서 즉시 전화를 드렸더니 "와 보시오." 하고 퉁명스럽게 허락을 해주셨다.

나는 광주에 가서 장 선생님께 보이고 그분이 시키는 대로 생채식과 단식, 그리고 풍욕, 냉온욕을 하면서 그 방법을 익히고 집에 와서는 배운 대로 행하고, 주 1회의 단식과 40분 수행을 꾸준히 하면서 열심히 투병생활을 했다. 그런 후 4개월이 지나고 나서 병원에 가서 수술하신 의사 선생님께 보였더니(장 선생님은 3개월만 하고 가서 보이라고 하셨으나 겁이 나서 1개월 더 하고 갔음) 진찰하신 선생님께서 "덩어리가 매우 컸었는데 없어졌다." 하시면서 이는 의사들 세계에서 "불가사의"한 것이라 했다.

너무도 기뻐 급히 집에 와서 알리니 그때 비로소 남편이 고백한다. 나의 병은 척추근종암이라는 희귀한 악성 종양인데 종양이 커지면서 자궁을 비롯한 근처의 여러 기관에 붙어 긴 시간 수술을 했지만, 모세혈관이 터져 출혈이 심해 겨우 종양만 떼어내고 그 나머지는 위험해서 손을 대지 못했다. 떼어낸 그 종양을 정밀검사해 본 결과 악성으로 판명되었고 이런 종류의 암으로는 6개월을 넘기기가 어렵다는 통고를 수술 후 얼마 안되어 받았고 다른 사람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큰 병원으로 옮겨 치료할 생각을 했지만 의사 선생님이 큰 병원에서 치료하는 방법 그대로 시술해 줄 테니 집에서 통원치료하라고 배려해 주셨다는 것이었다.

다시금 지난날을 회상해 보았다. 얼마나 많은 분들이 나를 위해 기도하고 애써 주셨는가를 생각하면서 크나큰 은혜를 입었다는 것을 알았다. 얼마나 하느님께 나를 살려달라고 매달려 애원하고 빌었던가? 그때마다 "지금의 네 밥상에 오르는 음식을 먹으면 안된다."는 그 강한 느낌이 바로 하느님께서 응답하시는 말씀이었음을 깨닫지 못한 나의 우둔함을 생각했다. 하느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셔서 장두석 선생님을 만나게 하시고 그분의 가르침과 요법으로 불치의 병이 치유된 이 과정이 바로 주님께서 보여주신 기적임을 얼마 후 나는 깨달았다. 특히 기억나는 것은 투병중 어깨 밑에 큰 혹이 생겨 장 선생님께 문의하였더니 "항암주사로 인하여 불순물이 모여 그렇게 된 것인데 병원에 가서 떼어달라고 하시오." 하시기에 그렇게 했더니 얼마 후 완치되었다. 그후에도 얼굴과 목 뒤에 반점이 생기면서 진물이 흘러 3일간의 단식을 몇 번 하고, 마감한다는 결심으로 7일간의 단식을 하면서 안정을 찾았는데 뒤에 알고 보니 그것이 명현현상이었다.

이제 새로 태어난 나는, 모든 것이 나를 위해 존재한다는 오만한 생각에서 벗어나, 우주만물 모든 것이 절대자의 섭리에 의해 운행되면서 물과 공기와 풀 한 포기까지도 생명의 동반자로 소중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앞으로는 이웃을 위해 봉사하면서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능력과 재주를 더 열심히 갈고 닦아 그것으로 하느님을 찬미할 것을 다짐한다.

병이 완쾌된 후 하느님은 내게 또 하나의 은혜를 베푸시어, 지난 1992년 7월 1일 전국 준무형문화재 제83호(거문고)로 지정받아 예술과 후배양성에 정진할 수 있게 해주셨다. 내년에는 내 생애 다섯번째의 예술발표회를 갖고 능력을 총동원하여 하느님을 찬미하고 그 이익을 불우한 이웃에게 돌릴 준비를 하고 있다. 나를 위해 마음을 써주신 분들과 특히 직접 가르침을 주시고, 용기를 주신 장두석 선생님께 감사드리면서 그분의 가정에 하느님의 가호와 축복이 함께하시길 빈다.

의학적 소견

김정애 씨의 경우는 처음에 딱 보니 암의 재발이었다. 수술한 뒤 재발한 암의 경우는 소생이 힘들다. 그는 진주 J병원 원장으로부터 다시 수술하자는 권유를 받은 뒤 나를 찾은 환우였다.

처음에는 소생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교육을 시키지 않으려 했다. 만일 교육생이 잘못되면 나로서는 이만저만 부담스러운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잘 아는 진주 간호전문대 이사장님이 간곡히 부탁하며, "책임은 우리가 지겠다."고 하였다. 그래도 죽으면 곤란했으므로 나는 계속 거절했다. 그러나 환우 자신과 주위의 간곡한 부탁을 마다할 수 없어 우선 체모관측(양의사 식으로 말하면 진찰. 그러나 기계는 절대 사용하지 않고 관상을 보고, 손과 기로써 한다)을 해보았다.

이 사람은 육식을 많이 해 얼굴에 개기름이 흐르고, 피부가 두껍고 거칠었다. 당연히 몸 안에 일산화탄소가 많이 정체되어 있었다. 또 물과 채소를 잘 먹지 않아 심한 변비에 시달리고 있었다. 게다가 옷을 두껍게 입어 체내에 산소가 부족하고 따뜻한 방에서 자면서 땀을 많이 흘리는 듯했다.

차고 오만한 성격의 여성이었다. 거기에 부부간의 음양의 조화에도 조금 문제가 있는 듯했다. 내가 그에게 기대하는 단 하나는 얼굴이 길고 콧대가 바로 섰다는 것이었다. 의지가 있어 보이고 명이 길어 보이는 관상이었다.

본인의 의지와 철저한 지도만 있다면 인간 몸 안의 자연치유력은 소생의 길을 열어주게 되어 있다. 김정애 씨의 경우도 본인의 의지가 대단하여 나는 어려운 결심으로 그를 지도했다. 사실 암의 경우는, 간암과 폐암을 제외하고는 단식을 시켜도 큰 무리는 없다. 그리고 피부염, 간장 계통의 이상과 함께 암에는 쑥뜸, 겨자찜, 원적외선요법 등 열요법이 좋은 치료효과를 나타낸다.

단식과 생식 등 민족의학적 요법을 열심히 실행한 그녀는 4개월 만에 종양을 이겨낸 의지의 여인이다. 그후 준무형문화재 83호로 지정되어 열심히 국악활동을 하고 있다.

《사람을 살리는 단식》, 정신세계사, pp.227-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