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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두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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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국노조 조회417회 작성일 21-06-18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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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 단식 치험례

후두암

양 마리 요한(1943년 2월 생, 천주교 성남교구 수녀)

나는 오래 전부터 변비, 소화불량으로 병원에 자주 갔었다. 늘 소화제와 변비약을 복용해야만 음식을 먹을 수가 있었다. 섬유질이 많고 거친 음식이나 영양 많고 소화가 어려운 음식은 마음 놓고 먹을 수가 없었다. 늘 피곤하고, 끊임없이 입 안팎으로 구강염이 계속되었다. 혈색은 좋을 때가 별로 없어 늘 검거나 노랗고, 감기는 마치 내 전유물인 것처럼 늘 걸리다시피 했다.

고열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한 적도 있다. 그때의 병명은 과로와 영양실조로 인한 신우신장염이라고 했다. 퇴원 후 위경련이 심하게 오면서 몸이 불편했다. 나는 다시 병원에 가서, 이번에는 간기능검사를 해보자고 했더니 의사 선생님은 그보다도 쓸개검사를 해보자는 것이었다. 엑스레이를 찍어본 결과 담석이라고 하면서, 약물치료를 해보자고 3일분의 약을 주셨다. 나는 약을 한 번 먹고 밤새 통증에 시달리고 다음날 다시 병원으로 달려갔다. 다시 진찰 후 소화기능이 너무나 무력해서 약을 소화시키지 못한다고 하시면서 약 단위를 낮추어 다시 처방해 주셨다. 하지만 그것도 복용할 수가 없어서 결국엔 한약을 먹게 됐다.

한약으로 증세가 조금은 호전되었지만, 여전히 심한 변비와 구강염에 시달렸다. 나는 계속 변비약과 소화제를 복용해야만 했다. 그때 의사 선생님께서는 사람이 정신만으로 살 수 없으니 육신도 좀 생각하면서 일하라고 야단치셨다. 하지만 공동체생활을 하는 수도자로서는 쉴 수 없을 때가 많기에 중병의 경우가 아니고는 쉬기가 힘들었다.

그런대로 고비를 넘기며 생활하던 중 어느 겨울에 심한 몸살을 앓은 후 목이 쉬면서 목 안이 그득한 느낌이 들었다. 구강염 때문에 이비인후과를 자주 다니게 되었는데, 의사 선생님이 목 안이 언제부터 그랬느냐고 하시면서 입 안에 염증이 생길 때는 즉시 뛰어오라고 하셨다. 그때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다.

입 안에 염증만이라도 없으면 음식을 먹을 때나 말을 할 때 불편이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목 안의 병명은 만성 인두염이라고 했다. 그래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염증만 가시면 괜찮겠지 했다. 점점 심하게 피곤을 느꼈고, 몸을 가누고 일을 하기도 힘겨웠지만 여전히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점점 구토가 심해지면서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다. 죽을 먹어도 속에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입 안에서는 냄새가 심하게 나고 속은 메스껍고 뭐라고 표현할 수 없게 힘들었다. 그때 어느 분이 동양의학을 연구하시는 유능하고 연세가 많은 박사님께 안내해 주셨다. 진찰 후 그분은 "수녀님이 소식을 했기에 지금까지 살 수 있었다."고 하시면서 이대로 두면 위암이 된다고 하셨다. 식이요법을 하라고 적어주시며 박사님이 쓰신 책도 주셨다. 약은 7일분을 주시고 병원에 오는 날을 정해 주셨다. 약값이나 치료비도 받지 않으셨다. 너무 미안해 하는 나에게 "수녀들이 무슨 돈이 있느냐, 날 위해서 기도나 해달라."고 하셨다. 그 박사님의 주장은 인간의 수명은 125년이니 그 나이까지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생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다. 그렇다. 하느님이 건강한 삶을 살도록 인간을 내리셨지 병든 육신을 내리지는 않으셨을 거라는 생각에, 이것은 바로 내 탓이요, 내 죄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인간은 자기 육신을 관리할 의무가 있다고 볼 때 나는 관리소홀죄를 지은 셈이므로 온전히 내 탓임을 절감했다. 오! 하느님,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

이런 나를 하느님은 불쌍히 보셨는지 어느 수녀님을 통해 지금의 장두석 선생님을 알게 해주셨다. 전화문의를 하니 장 선생님은 수녀님 네 분이 치료를 받고 있으니 와서 함께 하라며 오늘 당장 내려오라고 하셨다. 나는 다음날로 내려가 그 수녀님들과 같이 장 선생님이 하라시는 대로 민족의학요법을 실행했다. 그중에 제일 어려웠던 것은 생야채 범벅을 먹을 때였다. 속이 메스꺼워 넘기기가 힘들어서 결국엔 옆의 수녀님처럼 채로 썬 것을 청했더니, 소화를 못 시키니 이렇게 먹어야 된다고 하셨다. 너무 힘들어 하니까 다음날은 생채와 생현미가루를 주셨다. 조식을 금하고 점심, 저녁만을 했는데도 공복감보다는 점점 편안함을 느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옆에 있는 수녀님들에게는 3일씩 단식을 하라고 하면서 나는 중간에 하루만 먹게 하신 것이다. 그런데 나는 하루 단식만으로도 몸이 가벼움을 느꼈다. 그리고 뭐든지 먹을 것 같은, 먹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10일 동안 운동하고, 된장찜질하고, 겨자찜질, 각탕, 족탕 등등 쉴 사이 없이 강행군을 했다. 냉온욕과 풍욕은 저녁에 집에 가서 하라고 하셨다.

10일간의 치료를 끝내고 돌아와서 생채식을 나름대로 열심히 하면서 냉온욕을 꾸준히 했다. 그런데 풍욕은 하지 못했고, 더구나 된장찜질은 생각하기도 힘든 환경이었다. 나중에는 생식을 못하고 현미잡곡밥에 생야채와 다른 반찬도 마음대로 먹기 시작했다. 마그밀을 먹지 않으면 변통이 안되기에 마그밀은 계속 복용했다. 그러면서 소금은 먹지 않았다.

자연건강법을 시작한 지 3년쯤 지났을 때(90년 10월), 한 달 피정을 마치는 날 아침에 목에서 핏덩이가 넘어왔다. 그때도 염증이 있는 상태라서 그렇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그후 목 안에서 냄새가 올라오면서 말하기가 힘들고 목 밑 식도 쪽이 아프고 불편했다. 참다 못해 병원을 다시 찾아갔다. 선생님은 치료만 해주고 말이 없으셨다. 나는 왜 그런지 물을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은 퉁명스럽게도 "그렇게 죽어도 수녀님 팔자라고 생각하라."면서 "의사로서 이런 말 할 때가 제일 싫다."고 했다. 이제부터 말도 하지 말고 성가도 부르지 말라고 하셨다. 불안한 예감은 있었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가능성이 없구나 하고 생각했다. 선생님은 다음 진료일을 정해 주면서 약을 처방해 주셨다. 약은 간단했다. 무슨 약인지 약국에 알아보니 약국에는 공급이 안되는 소화제와 항암제라고 했다.

후두에 이상이 생겼으니 소리를 마음대로 내기도 힘들고 지금도 성가는 부르지 않는다. 나는 절망을 느끼고 남모르게 마음의 준비를 했다. 나는 간절히 "주님 뜻에 맡깁니다."라고 마음을 평안히 가지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약한 인간은 어쩔 수가 없었다. 다시 장 선생님께 전화로 문의했다. 장 선생님은 풍욕은 했느냐, 죽염을 먹느냐, 겨자찜질을 했느냐 등등 물으셨는데, 나는 냉온욕만 했기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장 선생님은 즉시 풍욕을 하루에 11번 하고 죽염과 녹즙요법도 가르쳐 주시면서 "그까짓것 걱정할 것 하나도 없다."면서 그렇게 하면 틀림없이 좋아진다고 하셨다. 내가 "단식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물으니 못하게 하셨다. 하지만 속이 종종 불편할 때는 하루씩 단식을 해왔었다. 육식만 안하고 현미, 잡곡, 생야채만 먹으면 다 되는 줄 알았던 내 방법이 잘못된 것임을 알고 다시 시작했다. 더 확실하게 알고 싶어서, 나바위에서 있었던 11일간의 민족생활학교 교육에 참가했다.

장 선생님은 그때서야 이제 단식을 해도 된다고 하셨다. 나는 책대로 5회를 해보리라 결심을 하고 계속 진행시키는 중이다. 지금은 4회째, 7일 단식 중반이다. 생채식 시작 후 40 ∼60일 사이에도 무염일마다 단식을 했다. 단식 후 매우 힘들었지만 자신감 때문인지 걱정은 없다. 이제는 누구에게든지 건강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단식을 해보라고 권한다. "네가 중병에 들었으면 하느님께서 네게 단식을 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라."는 말씀은 정말 지당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유치원 부모교육을 하면서도 자연건강교육은 빼놓지 않는다. 가공음식 배제, 우리 밀 살리기 운동, 환경오염에 관계되는 폐기물에 관해서도 교육을 시킨다.

어린이 간식도 우리 땅 곡식으로 만든 콩떡, 영양떡과 보리와 쌀을 혼합해 떡볶이 떡을 만들어 해주면 아이들은 너무 잘 먹고 좋아한다. 밥은 늘 잡곡밥을 해준다. 밥에 콩이 안 보이면 아이들은 오늘은 왜 콩밥 안 주느냐고 묻는다. 어린이는 어른과 달리 교육의 효과가 대단히 크다. 이제 우리 유치원 어린이들은 햄, 소시지, 콜라, 사이다, 사탕 등등 해로운 음식을 안 먹는다. 집에서 자기 부모가 콜라 마시는 걸 보면 다음날 와서, "우리 엄마는 콜라를 자꾸 마셔요." 하고 고자질할 정도로 아이들은 교육이 되어 있다. 배가 아프거나 머리가 아프다고 하면 나는 절대로 약을 먹이지 않고 마그밀이나 손발을 지압해 응급처치를 한다. 놀다가 손이나 발을 다쳤을 때에는 즉시 모관운동으로 처치한다. 이 요법은 어린이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가 집에 가서 가족에게 전달한다. 약을 먹지 않았는데도 아프지 않기에 아이들은 신기하게 생각하고, 수녀님이 저를 만져준다는 것이 심리적으로 대단히 기분 좋게 느껴지기 때문에 시샘이 많은 아이는 아프지 않아도 아프다고 하기도 한다. 나는 "어린이는 천사"라고 말한다. 거짓 없이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은 천사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이런 순수함이 없는 어른들은 병이 많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어디에든 욕심이 있기 때문이다. 일 욕심 많은 나 자신을 보면서도 많은 것을 깨닫게 된다.

"너희가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새기면서 늘 감사하고 기쁘게 어린이처럼 살려고 노력한다. 자연건강법은 하느님이 주신 법임을 재삼 확신하면서 주님이 부르실 때까지, 또 나에게 주어진 환경 안에서 나 아닌 남을 위해서도 일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 은혜를 구하면서, 이 건강법을 알게 해주신 장 선생님께 감사드리고, 하느님의 축복이 있기를 기도한다. 지금 단식중인 나의 마음은 평온한 기쁨으로 가득하다.

의학적 소견

이 수녀님의 경우는 병이 너무 고약해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바짝 여위고 빈혈이 심해 단식이나 생식도 권하기 힘든 상태였다. 소생불능이었다. 그런데 수녀님들의 경우 생각보다 많은 신체이상을 겪고 있는지 나를 많이 찾아온다. 옷을 두껍게 입고 공동체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자기 탓으로 돌리고 참는 것이 때론 화근이 되는가 싶다. 양 마리안나 수녀의 경우도 싱겁게 먹고 침대생활을 했으며 물을 꼭 끓여 먹은 것이 발병의 원인이었다.

양 수녀는 특별히 내성적이고 치밀한 성격이었다. 수녀이기 때문에 며칠 교육을 시킨 뒤 돌아가라고 했다. "부활"은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런데 3∼4년 지나 느닷없이 그가 동료 수녀 몇 명을 교육에 보냈다. 그는 연간 계획을 세워 단식을 실천했다고 했다. 3일, 3일, 7일, 7일, 이런 식으로 단식을 한 것이다. 그는 튼튼한 신앙적 기초 위에 자기 의지로 소생한 분이다. 동료 수녀님과 신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내게 다시 한번 자연치유력의 위대한 힘을 일깨워준 분이다.

《사람을 살리는 단식》, 정신세계사, pp.257-2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