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홍희덕<br> "새벽길 청소하다가 죽은 동료가 제 인생 바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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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국노조 조회455회 작성일 21-06-18 13:26본문
홍희덕 “새벽길 청소하다가 죽은 동료가 제 인생 바꿨죠”
ㆍ사상 첫 환경미화원 출신 국회의원 당선자
지금까지 허다한 선량들이 국회 의사당을 드나들었지만, 18대 국회에서 만날 홍희덕 의원 당선자(59)만큼 이질적인 존재는 없었다. 사상 첫 환경미화원 출신 국회의원 당선자. 아무리 노동자를 대변하는 민주노동당이라고 할지라도, 아무리 비정규직의 대표가 필요한 세상이라고 하더라도 환경미화원이 의정 단상에 서는 모습은 상상하기 쉽지 않다. 그 복잡한 정치의 세계에서 그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그의 역할에 대한 고민은 쉬 불식되지 않는다. 밖에서 비판하기는 쉬워도 막상 들어가서 해 보면 어려운 곳이 국회다.
홍희덕, 그는 한껏 당겨진 고무줄처럼 팽팽히 긴장하고 있었다. 인터뷰 내내 그의 입에선 “부담” “걱정” “잘해야 한다”는 말이 떠나지 않았다. 그 자신만 아니었다. 부인과 두 딸 등 가족 또한 그가 앞으로 수행해야 할 직책의 무게를 느끼고 있었다. “힘들잖아요. 걱정이에요.”
그러나 그는 차분했다. 자그마한 체구지만 소명 의식과 의무감으로 그는 똘똘 뭉쳐 있었다. 가끔 답변을 유보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노동자를 위해 한 몸을 다 바치겠다는 마음 하나만은 변치 않을 것 같은 분위기를 강하게 내뿜었다. 청소부든, 환경미화원이든 표현은 그에겐 상관이 없는 듯했다. 그에겐 노동자만, 힘없는 서민만 보이는 듯했다. 부인과 딸과 함께 나타난 그는 인터뷰 내내 꼿꼿하게 의정활동에 대한 계획과 그의 삶을 증언하기 시작했다.
-우선 축하합니다. 당선된 기분이 어떠십니까.
“축하받을 일인가요? 고생길로 접어들었죠 뭐. 비례대표 후보로 선택받아 전국을 돌면서 보란듯이 성과를 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개표 방송을 보면서부터 떨리고 초조해지더라고요. 출구조사 보면서 비례대표 안 나올 것 같아서 걱정했는데, 또 당선되니까 떨려요. 아쉬운 것은 비례대표 득표율이 예상보다 밑돌았다는 것이죠.”
-당선이 되셨는데 무슨 생각이 들었습니까.
“어리벙벙합니다. 노조위원장 등으로 외곽에서 활동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직접 (정치에) 나서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죠. 평소 국회에 대한 관심을 가져왔고, 비정규직 법안 처리 등을 보면서 느낀 점은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로 부족한데 당과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기여하고 잘해야겠다는 생각뿐입니다. 평생 해오던 것과 전혀 다른 세계에 뛰어들어야 하는데….”
-누가 가장 기뻐했습니까. 그래도 의원에 당선되었으니 축하인사는 있었을 텐데요.
“알리지도 않았는데 먼 친척들이 축하 인사를 하더군요. 가문의 영광이라면서. 그러나 그런 인사에 현혹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가족들이 출마를 반대했다고 하던데.
“그랬죠. 집사람과 아이들은 반대를 많이 했습니다. 그동안 파업하면서 함께 하는 시간을 갖지 못했거든요. 지난 1월 전국민주연합노동조합 위원장 임기가 끝나 모처럼 가족들과 함께 하려 했는데 다시 나서니까 아내가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때 부인이 ‘걱정이 되어서 그렇죠 뭐’라며 거들었다) 동료들과 청소 마치고 휴일에 가까운 곳에 나들이도 다니고 그러고 싶었죠. 결국 여기까지 왔으니 제가 익숙하지는 않지만 해야 하듯이 가족들도 부담을 같이 느끼면서 처신해야죠.”
-국회의 쓰레기를 청소하는 기분으로 다 쓸어버리겠다고 했습니다. 국회에 쓰레기가 많다고 생각하십니까.
“아, 그 표현이 생소하게 들렸던 것 같은데요, 저희 미화원들은 자주 쓰는 말이에요. 2002년 지방자치단체 선거에 참여(그는 경기도 지역을 중심으로 환경미화원들을 지방의원 등으로 출마시켰다)하면서 쓴 말입니다. 그런데 시청이고 군청을 들여다보니 복마전이에요. 그래서 부정부패를 다 쓸어버리자고 했죠. 그때부터 저희들이 늘 쓰는 말입니다. 국회가 또 부패의 상징처럼 돼 있으니 그렇게 말한 겁니다. 국민들이 힘들게 사는데, 적자로 사는 가정이 얼마나 많은데 의원들의 재산이 불어납니까. 국회가 깨끗해져야 합니다.”
-앞으로 의정활동이 어떨 것으로 생각합니까.
“17대 때 민노당 의원이 10명이었는데도 힘들었습니다. 이제 그걸 5명이 하려니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러나 저 개인을 앞세우지 않고 활동하겠습니다. 진정성을 가지고 철저히 당과 민주노총에 복무하겠습니다. 등원하자마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도 있는데, ‘족수’에서 밀리고, ‘거대한 소수(보수)’의 사람들은 떼거리로 덤빌텐데 부담이 됩니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이 노동정책에서 악수를 둔다면 노동자들이 가만 있지는 않을 겁니다.”
-꼭 이것만은 하고 싶다는 정책이나 법안이 있습니까.
“특수고용직 노동자 산재 적용 문제는 발의가 돼있지만 사실상 물건너갔습니다. 재발의해서 해결하도록 할 생각입니다. 또 개인적으로 쉽지 않겠지만 장기 투쟁 사업장 문제만은 해결하고 싶습니다. 포스콤이며, 이랜드, 뉴코아 노조 등이 현재 장기 투쟁 중인데 등원한 뒤에 풀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과거엔 장기 투쟁이라봐야 한 두달이면 끝났는데, 지금은 몇백일씩 갑니다. 혼자는 어렵겠지만 당과 논의하고 민주노총과 힘을 합쳐 풀도록 하겠습니다.”
-17대 민노당 의원들의 활동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국회에 여러 가지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당 의원들은) 세금을 흥청망청 써대면서 패거리 정치를 했지만, 민노당 의원들은 특권을 반납하고 깨끗한 정치를 하지 않았습니까. 홍보가 제대로 안 되어서 그렇지 비정규직 보호를 위한 입법활동이나 저소득층을 위한 의료보험 혜택 확대 등 한 일이 많습니다. 상가임대차 보호법, 카드 수수료 인하, 개인파산 정리 등에서도 활약이 컸습니다.”
-16년째 환경미화원으로 일해 왔고, 그 중 9년동안 노동운동을 하셨지요? 어떻게 시작하게 된 겁니까.
“원래 의정부시청 소속 미화원이었는데 시설관리공단으로 민간위탁이 되었어요. 외환위기 직후였습니다. 시장이 와서 밥을 사면서 달래 정년을 줄이고 사직서를 쓰라고 해서 다 썼습니다. 월급도 줄지 않는다고 하대요. 그런데 가서 일을 해보니 그게 아닌 겁니다. 한달 만에 받은 월급은 30만~50만원씩 줄고, 근무 여건도 열악해졌어요. 그래서 이대론 안되겠다고 생각해서 나서게 된 겁니다.”
-특별한 계기는 없었습니까.
“지금도 그 친구를 생각하면 얼굴이 어른거리고 가슴이 답답합니다. 저와 같은 조에서 일하던 친구가 새벽에 교통사고로 사망했습니다. 장마철 비오는 날 새벽이었는데, 담배 한 대 같이 피우고 반대방향으로 청소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기다려도 안오는 겁니다. 나중에 병원으로 가보니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바로 ‘이건 아니다. 노조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처음엔 어떻게 노조를 만드는 줄도 몰라 애를 먹었죠. 이후 노조를 만들자 이곳저곳에서 엄청난 탄압이 들어왔습니다. 한편으론 많은 문제를 노조를 통해 해결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투쟁을 잘 했어요. 그래서 조직이 점점 커졌습니다. 현재 조합원은 2600여명이고, 이중 1500명이 당원입니다.”
-원래 노동운동에 관심이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였죠. 1980년대 노동운동 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저러면 나라 경제가 어려워지는데…. 저 사람들 저러면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하하). 그런데 알고 보니 그때까지 속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북한이 항상 위협이다 뭐다 하면서 자유를 유보하더라도 안보가 우선이라고 하니 그런 줄 알았죠. 한마디로 180도 바뀐 거죠.”
-노동운동이 힘들 때 후회한 적은 없습니까.
“쉰 두살 때부터 노동운동을 시작했는데, 이후 모든 게 바뀌었어요. 그 전까지는 적당히 살았다는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솔직히 노조 하기 전에는 명절 때 고기라도 한 근 주면 받고, 안 주면 섭섭해 하고 그랬어요. 양심의 가책도 없었어요. 또 높은 사람한테는 잘 보이고 싶은 생각도 있었고, 쉬는 날에는 그저 지인들과 소주도 한 잔 하고 그러고 지냈죠. (술 좋아하시니요?) 좋아하죠.”
-이젠 노조도 합법투쟁으로 가야 한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저쪽이 잘 안 지키는데 신사적으로 하면 되겠습니까. 정치권이 상식이 너무 없습니다. 이명박 대통령도 이석행 민주노총 위원장을 그렇게 대해선 안됩니다. 만나기로 했다가 약속 파기하는 게 어디 말이 됩니까. 요즘은 과거 군사독재 시절보다 더 막무가내로 할 때도 있어요. 노조의 합법투쟁 여부는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이 하기에 달렸습니다.”
-미화원이 되기 전에는 어떻게 보냈습니까.
“경북 상주가 고향인데 집안이 부유했어요. 그런데 6·25전쟁 와중에 아버지가 몸을 다치면서 가산을 탕진하셨죠. 제가 장남이고 동생이 다섯 있는데, 어머니가 힘들게 가계를 꾸려갔어요. 저도 고향에서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농장, 공장, 목재소 일, 우유배달, 보일러 공사, 사료회사 상하차 일 등 안 해본 게 없어요. 경북 안동에서 농장일을 하다 집사람을 만나 결혼한 뒤 78년에 상경했습니다. 동서가 소 한마리 팔아 꿔준 돈으로 방 한칸을 얻었어요. 아이들 학비가 나온다고 해서 93년에 미화원이 되었죠.”
-재산은 얼마나 됩니까.
“이번에 재산 등록을 했는데, 한 3억원쯤 됩니다. 집사람이 미싱(봉제업)을 오래 했어요. 20여년동안 맞벌이 해서 알뜰히 모았습니다. 의정부에 단독주택이 있고, 두 딸을 위해서 조그만 주공아파트도 한 채 마련했어요.”
-민노당이 분열된 것이 이번 총선에 큰 영향을 미쳤죠?
“총선 내내 민주노총 사업장을 돌면서 당의 분열상이 엄청난 악재라는 걸 느꼈습니다. 어떤 사업장에서는 노조 지도부와 노조원들이 (정파가 달라서) 따로 민노당과 진보신당을 불러요. 아직도 현장의 상처는 치유되지 않았습니다. (두 당이 합쳐질 것으로 봅니까?) 당장은 어렵다고 봅니다. 정파주의는 정말 반성해야 합니다.”
-강기갑 의원의 지역구 당선을 어떻게 분석하십니까. 박근혜 의원 지지자들 덕분에 당선됐다는 분석도 있는데.
“강 의원이 반 FTA투쟁 과정에서 농민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거 아닌가요? 농민을 위해 헌신적으로 투쟁한 게 평가받았다고 봅니다. 또 보기보다 지역을 열심히 챙겼습니다. 지역주민들과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부족한 2%를 소위 ‘반 이방호 정서’가 메워준 셈이고.”
-임기가 끝났을 때 어떤 의원으로 기억되고 싶습니까.
“임기를 잘 마칠지 모르겠습니다. (열심히 활동하다 잘 안 되면 언제든지 사퇴할 수 있다는 뜻입니까) (그는 말없이 고개만 약간 끄덕였다). 어쨌든 의리 변치 않고 잘했다는 평가를 받고 싶습니다. 계급을 배신하지 않고 의원직을 마쳤다는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동료 노동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지금 노동자와 민중, 서민들이 힘든 시기입니다. 정치적 민주화는 이뤄냈지만 경제적으로는 더 독재화되고 있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작들에게는 더 큰 고통의 시기가 오고 있습니다. 이것이 숙명이 아니라 구조가 잘못된 데서 왔다는 것을 노동자들이 자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바꿀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 이중근기자 harubang@kyunghyang.com 〉
ㆍ사상 첫 환경미화원 출신 국회의원 당선자
지금까지 허다한 선량들이 국회 의사당을 드나들었지만, 18대 국회에서 만날 홍희덕 의원 당선자(59)만큼 이질적인 존재는 없었다. 사상 첫 환경미화원 출신 국회의원 당선자. 아무리 노동자를 대변하는 민주노동당이라고 할지라도, 아무리 비정규직의 대표가 필요한 세상이라고 하더라도 환경미화원이 의정 단상에 서는 모습은 상상하기 쉽지 않다. 그 복잡한 정치의 세계에서 그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그의 역할에 대한 고민은 쉬 불식되지 않는다. 밖에서 비판하기는 쉬워도 막상 들어가서 해 보면 어려운 곳이 국회다.
“혹 사주팔자에 큰 벼슬한다는 괘가 있느냐”는 질문에 홍희덕 당선자는 “점 한번 본적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뒤에 앉아 있던 부인은 “큰 딸 결혼식 날 잡을 때 ‘늦게 괜찮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김영민기자> |
홍희덕, 그는 한껏 당겨진 고무줄처럼 팽팽히 긴장하고 있었다. 인터뷰 내내 그의 입에선 “부담” “걱정” “잘해야 한다”는 말이 떠나지 않았다. 그 자신만 아니었다. 부인과 두 딸 등 가족 또한 그가 앞으로 수행해야 할 직책의 무게를 느끼고 있었다. “힘들잖아요. 걱정이에요.”
그러나 그는 차분했다. 자그마한 체구지만 소명 의식과 의무감으로 그는 똘똘 뭉쳐 있었다. 가끔 답변을 유보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노동자를 위해 한 몸을 다 바치겠다는 마음 하나만은 변치 않을 것 같은 분위기를 강하게 내뿜었다. 청소부든, 환경미화원이든 표현은 그에겐 상관이 없는 듯했다. 그에겐 노동자만, 힘없는 서민만 보이는 듯했다. 부인과 딸과 함께 나타난 그는 인터뷰 내내 꼿꼿하게 의정활동에 대한 계획과 그의 삶을 증언하기 시작했다.
-우선 축하합니다. 당선된 기분이 어떠십니까.
“축하받을 일인가요? 고생길로 접어들었죠 뭐. 비례대표 후보로 선택받아 전국을 돌면서 보란듯이 성과를 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개표 방송을 보면서부터 떨리고 초조해지더라고요. 출구조사 보면서 비례대표 안 나올 것 같아서 걱정했는데, 또 당선되니까 떨려요. 아쉬운 것은 비례대표 득표율이 예상보다 밑돌았다는 것이죠.”
-당선이 되셨는데 무슨 생각이 들었습니까.
“어리벙벙합니다. 노조위원장 등으로 외곽에서 활동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직접 (정치에) 나서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죠. 평소 국회에 대한 관심을 가져왔고, 비정규직 법안 처리 등을 보면서 느낀 점은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로 부족한데 당과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기여하고 잘해야겠다는 생각뿐입니다. 평생 해오던 것과 전혀 다른 세계에 뛰어들어야 하는데….”
-누가 가장 기뻐했습니까. 그래도 의원에 당선되었으니 축하인사는 있었을 텐데요.
“알리지도 않았는데 먼 친척들이 축하 인사를 하더군요. 가문의 영광이라면서. 그러나 그런 인사에 현혹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가족들이 출마를 반대했다고 하던데.
“그랬죠. 집사람과 아이들은 반대를 많이 했습니다. 그동안 파업하면서 함께 하는 시간을 갖지 못했거든요. 지난 1월 전국민주연합노동조합 위원장 임기가 끝나 모처럼 가족들과 함께 하려 했는데 다시 나서니까 아내가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때 부인이 ‘걱정이 되어서 그렇죠 뭐’라며 거들었다) 동료들과 청소 마치고 휴일에 가까운 곳에 나들이도 다니고 그러고 싶었죠. 결국 여기까지 왔으니 제가 익숙하지는 않지만 해야 하듯이 가족들도 부담을 같이 느끼면서 처신해야죠.”
-국회의 쓰레기를 청소하는 기분으로 다 쓸어버리겠다고 했습니다. 국회에 쓰레기가 많다고 생각하십니까.
“아, 그 표현이 생소하게 들렸던 것 같은데요, 저희 미화원들은 자주 쓰는 말이에요. 2002년 지방자치단체 선거에 참여(그는 경기도 지역을 중심으로 환경미화원들을 지방의원 등으로 출마시켰다)하면서 쓴 말입니다. 그런데 시청이고 군청을 들여다보니 복마전이에요. 그래서 부정부패를 다 쓸어버리자고 했죠. 그때부터 저희들이 늘 쓰는 말입니다. 국회가 또 부패의 상징처럼 돼 있으니 그렇게 말한 겁니다. 국민들이 힘들게 사는데, 적자로 사는 가정이 얼마나 많은데 의원들의 재산이 불어납니까. 국회가 깨끗해져야 합니다.”
-앞으로 의정활동이 어떨 것으로 생각합니까.
“17대 때 민노당 의원이 10명이었는데도 힘들었습니다. 이제 그걸 5명이 하려니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러나 저 개인을 앞세우지 않고 활동하겠습니다. 진정성을 가지고 철저히 당과 민주노총에 복무하겠습니다. 등원하자마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도 있는데, ‘족수’에서 밀리고, ‘거대한 소수(보수)’의 사람들은 떼거리로 덤빌텐데 부담이 됩니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이 노동정책에서 악수를 둔다면 노동자들이 가만 있지는 않을 겁니다.”
-꼭 이것만은 하고 싶다는 정책이나 법안이 있습니까.
“특수고용직 노동자 산재 적용 문제는 발의가 돼있지만 사실상 물건너갔습니다. 재발의해서 해결하도록 할 생각입니다. 또 개인적으로 쉽지 않겠지만 장기 투쟁 사업장 문제만은 해결하고 싶습니다. 포스콤이며, 이랜드, 뉴코아 노조 등이 현재 장기 투쟁 중인데 등원한 뒤에 풀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과거엔 장기 투쟁이라봐야 한 두달이면 끝났는데, 지금은 몇백일씩 갑니다. 혼자는 어렵겠지만 당과 논의하고 민주노총과 힘을 합쳐 풀도록 하겠습니다.”
-17대 민노당 의원들의 활동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국회에 여러 가지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당 의원들은) 세금을 흥청망청 써대면서 패거리 정치를 했지만, 민노당 의원들은 특권을 반납하고 깨끗한 정치를 하지 않았습니까. 홍보가 제대로 안 되어서 그렇지 비정규직 보호를 위한 입법활동이나 저소득층을 위한 의료보험 혜택 확대 등 한 일이 많습니다. 상가임대차 보호법, 카드 수수료 인하, 개인파산 정리 등에서도 활약이 컸습니다.”
-16년째 환경미화원으로 일해 왔고, 그 중 9년동안 노동운동을 하셨지요? 어떻게 시작하게 된 겁니까.
“원래 의정부시청 소속 미화원이었는데 시설관리공단으로 민간위탁이 되었어요. 외환위기 직후였습니다. 시장이 와서 밥을 사면서 달래 정년을 줄이고 사직서를 쓰라고 해서 다 썼습니다. 월급도 줄지 않는다고 하대요. 그런데 가서 일을 해보니 그게 아닌 겁니다. 한달 만에 받은 월급은 30만~50만원씩 줄고, 근무 여건도 열악해졌어요. 그래서 이대론 안되겠다고 생각해서 나서게 된 겁니다.”
-특별한 계기는 없었습니까.
“지금도 그 친구를 생각하면 얼굴이 어른거리고 가슴이 답답합니다. 저와 같은 조에서 일하던 친구가 새벽에 교통사고로 사망했습니다. 장마철 비오는 날 새벽이었는데, 담배 한 대 같이 피우고 반대방향으로 청소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기다려도 안오는 겁니다. 나중에 병원으로 가보니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바로 ‘이건 아니다. 노조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처음엔 어떻게 노조를 만드는 줄도 몰라 애를 먹었죠. 이후 노조를 만들자 이곳저곳에서 엄청난 탄압이 들어왔습니다. 한편으론 많은 문제를 노조를 통해 해결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투쟁을 잘 했어요. 그래서 조직이 점점 커졌습니다. 현재 조합원은 2600여명이고, 이중 1500명이 당원입니다.”
-원래 노동운동에 관심이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였죠. 1980년대 노동운동 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저러면 나라 경제가 어려워지는데…. 저 사람들 저러면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하하). 그런데 알고 보니 그때까지 속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북한이 항상 위협이다 뭐다 하면서 자유를 유보하더라도 안보가 우선이라고 하니 그런 줄 알았죠. 한마디로 180도 바뀐 거죠.”
-노동운동이 힘들 때 후회한 적은 없습니까.
“쉰 두살 때부터 노동운동을 시작했는데, 이후 모든 게 바뀌었어요. 그 전까지는 적당히 살았다는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솔직히 노조 하기 전에는 명절 때 고기라도 한 근 주면 받고, 안 주면 섭섭해 하고 그랬어요. 양심의 가책도 없었어요. 또 높은 사람한테는 잘 보이고 싶은 생각도 있었고, 쉬는 날에는 그저 지인들과 소주도 한 잔 하고 그러고 지냈죠. (술 좋아하시니요?) 좋아하죠.”
-이젠 노조도 합법투쟁으로 가야 한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저쪽이 잘 안 지키는데 신사적으로 하면 되겠습니까. 정치권이 상식이 너무 없습니다. 이명박 대통령도 이석행 민주노총 위원장을 그렇게 대해선 안됩니다. 만나기로 했다가 약속 파기하는 게 어디 말이 됩니까. 요즘은 과거 군사독재 시절보다 더 막무가내로 할 때도 있어요. 노조의 합법투쟁 여부는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이 하기에 달렸습니다.”
-미화원이 되기 전에는 어떻게 보냈습니까.
“경북 상주가 고향인데 집안이 부유했어요. 그런데 6·25전쟁 와중에 아버지가 몸을 다치면서 가산을 탕진하셨죠. 제가 장남이고 동생이 다섯 있는데, 어머니가 힘들게 가계를 꾸려갔어요. 저도 고향에서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농장, 공장, 목재소 일, 우유배달, 보일러 공사, 사료회사 상하차 일 등 안 해본 게 없어요. 경북 안동에서 농장일을 하다 집사람을 만나 결혼한 뒤 78년에 상경했습니다. 동서가 소 한마리 팔아 꿔준 돈으로 방 한칸을 얻었어요. 아이들 학비가 나온다고 해서 93년에 미화원이 되었죠.”
-재산은 얼마나 됩니까.
“이번에 재산 등록을 했는데, 한 3억원쯤 됩니다. 집사람이 미싱(봉제업)을 오래 했어요. 20여년동안 맞벌이 해서 알뜰히 모았습니다. 의정부에 단독주택이 있고, 두 딸을 위해서 조그만 주공아파트도 한 채 마련했어요.”
-민노당이 분열된 것이 이번 총선에 큰 영향을 미쳤죠?
“총선 내내 민주노총 사업장을 돌면서 당의 분열상이 엄청난 악재라는 걸 느꼈습니다. 어떤 사업장에서는 노조 지도부와 노조원들이 (정파가 달라서) 따로 민노당과 진보신당을 불러요. 아직도 현장의 상처는 치유되지 않았습니다. (두 당이 합쳐질 것으로 봅니까?) 당장은 어렵다고 봅니다. 정파주의는 정말 반성해야 합니다.”
-강기갑 의원의 지역구 당선을 어떻게 분석하십니까. 박근혜 의원 지지자들 덕분에 당선됐다는 분석도 있는데.
“강 의원이 반 FTA투쟁 과정에서 농민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거 아닌가요? 농민을 위해 헌신적으로 투쟁한 게 평가받았다고 봅니다. 또 보기보다 지역을 열심히 챙겼습니다. 지역주민들과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부족한 2%를 소위 ‘반 이방호 정서’가 메워준 셈이고.”
-임기가 끝났을 때 어떤 의원으로 기억되고 싶습니까.
“임기를 잘 마칠지 모르겠습니다. (열심히 활동하다 잘 안 되면 언제든지 사퇴할 수 있다는 뜻입니까) (그는 말없이 고개만 약간 끄덕였다). 어쨌든 의리 변치 않고 잘했다는 평가를 받고 싶습니다. 계급을 배신하지 않고 의원직을 마쳤다는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동료 노동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지금 노동자와 민중, 서민들이 힘든 시기입니다. 정치적 민주화는 이뤄냈지만 경제적으로는 더 독재화되고 있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작들에게는 더 큰 고통의 시기가 오고 있습니다. 이것이 숙명이 아니라 구조가 잘못된 데서 왔다는 것을 노동자들이 자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바꿀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 이중근기자 harubang@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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