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대표가 살아 돌아왔다. 권영길 의원은 진보정당 최초의 지역구 재선이라는 역사를 새로 썼다. 권 의원은 4만 412표로 47.96%의 지지율을 얻어서 3만 8051표로 45.15%의 지지를 얻은 한나라당 강기윤 후보를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다. 권 의원의 당선은 대선패배의 아픔을 딛고 일궈낸 지역구 재선이라서 더욱 값진 성과이다.
| | △ 당선이 확정된 직후 꽃다발을 받고 지지자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는 권영길 의원 ⓒ 정택용 기자 |
대선 패배 후유증 딛고 진보정치 부활 목표로 18대 총선 출마>
권의원은 대선패배 이후 당내 일부(지금의 진보신당)로부터 “대선패배 책임지고 정계은퇴하라”는 압박을 받았다. 졸지에 진보정당의 ‘창업주’에서 ‘낡은 진보’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12월 29일 중앙위원회에서 백의종군을 표방했지만 일부에서는 여전히 ‘책임을지지 않는다’는 비아냥을 들어야했다. 지난 1월 권의원은 홀로 창원 지역구로 내려갔다. 언론사의 인터뷰 요청을 물리치고 조용히 중앙 정치권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일각에서는 칩거라 표현했다. 같은 시간 중앙당은 분당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복잡한 서울 상황과는 달리 창원의 당원들은 차분하게 맘을 다잡고 있었다. 김대하 창원지역위 사무국장은 “권 의원이 지역으로 내려왔을 때 창원시위원회 밑바닥 정서는 ‘창원 수성’으로 이미 모아졌다”고 말했다. 민주노동당 창원시위원회 당원들은 당시 동별로 당원모임을 열고 권영길 재선을 기획하고 있었다.
2월부터 시작된 집단탈당사태는 믿었던 노동현장마저 싸늘하게 식게 만들었다. 다시 권의원 책임론과 출마 포기설이 고개를 들었다.
권의원은 겉으로 아무런 의사표명을 하지 않았다. 묵묵히 지역구 국회의원으로서 자기 소임을 다했다. 결국 지난 2월 28일, 공식 출마를 선언하는 자리에서 “18대 총선은 진보정치 세력의 생존이 가장 중요한 목표”라며 자신의 출마결심이 당의 생존을 위한 무거운 책임감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드러냈다.
‘민주노동당 망했다’ 탈당 후폭풍 극복
권 의원은 핵심지지층인 노동세력의 결집을 위해 선거 초반까지 노동현장에 공을 들여야 했다. 하지만 쉽사리 현장의 분위기는 극복되지 않았다. 급기야 창원 갑에선 민주노동당의 강영희 후보와 진보신당의 최재기 후보가 대결하는 양상으로 치닫게 되면서 노동현장의 갈등은 극단으로 치닫는 듯 했다. 결국 민주노동당의 강영희 후보가 사퇴하면서 노동현장에선 단결의 기운이 잡히기 시작했다. 김동석 경남도당 조직국장은 “민주노동당은 분당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는데 실망감이 컸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핵심지지층을 분당 이전으로 복원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고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부단속이 됐다고 선거가 술술 풀리는 게 아니었다. 한나라당은 끊임없이 “민주노동당 망했다”는 악성 소문을 흘렸다. 결국, 선거운동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탈당 비판 여론이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권 의원이 4~12% 이상 앞서고, 상대후보가 “(국회의원)감이 아니다”고 할 정도 약세로 평가됐으나 선거기간 내내 긴장감을 늦추지 못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탈당에 대한 혹독한 비판여론을 잠재울 수 있었던 비결은 후보의 인지도가 높고, 인물 평이 좋다는 것이었다. 지난 4월 5일 벚꽃축제가 열리는 내동공원을 찾은 권 후보를 보고, “팬이다”며 사진을 찍기 위해 몰려드는 시민들로 인해, 도로가 꽉 막힐 정도였다. 권 의원은 선거운동 기간 내내 연예인 못지않은 큰 인기를 누렸다.
창원을 선거구의 인물구도는 “권영길이냐, 아니냐”로 압축할 수 있지만, 결국 권영길이라는 인물이 한나라당이라는 거대세력과 맞서 싸운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새로운 4년의 과제, 지역의 진보집권 모델 마련
권 의원은 출마 당시 “창원을 새로운 진보집권의 모델로 만들겠다”는 구상을 밝힌 바 있다. 이제 권 의원은 재선을 통해 새로운 4년의 과제를 부여받은 것이다. 지역 진보집권은 2010년 지방선거에서 창원시장을 당선시켜 지역집권을 이루는 것을 일차적 목표로 하고 있다. 인구 50만 명의 중소도시로, 재정자립도가 높으며, 노동자 밀집 도시인 창원은 지역의 진보집권을 이룰 수 있는 마춤의 조건을 갖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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