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은 저 세상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찾아야 한다”(토마스 뮌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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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국민주연합 조회172회 작성일 26-07-01 17:24본문
전국노동자정치협회 편집위원 백철현
- 역사로 쉽게 배우는 맑스주의 4강 -
《공산당선언》에서는 “인류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라고 했습니다. 이 명제에 맞춰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인류 역사상 세계를 뒤흔들고 발전시킨 4대 계급투쟁은 고대 노예제 하에서 스파르타쿠스 항쟁 같은 노예 항쟁과 봉건제 하에서의 농민항쟁, 현대자본주의와 제국주의 하에서의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민족해방전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투쟁은 완전히 별개의 투쟁이 아니라 서로 겹쳐있기도 했습니다.
수공업자들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중세 봉건제는 농촌이 중심이 되는 사회로 농민이 기층 기본 계급이고, 자본주의 하에서는 도시가 중심이 되는 사회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중심 계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세 봉건제에서 수많은 농민봉기가 있었지만, 가장 대표적인 3대 봉기는 1524년부터 1525년 사이 중부 유럽에서 광범위하게 펼쳐졌던 독일 농민전쟁과 1850년에서 1864년까지 중국 대륙에서 벌어진 대규모 농민 봉기로 난징을 수도로 장악할 정도로 대규모로 전개된 농민항쟁인 중국 태평천국운동, 1894년 척양척왜·보국안민을 내걸고 봉기한 조선의 갑오농민전쟁을 꼽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 농민봉기는 봉건지배계급의 학정에 맞서 농민들이 봉기에 나섰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각각의 봉기가 종교의 영향을 받았는데 독일 농민전쟁은 종교 개혁운동 속에서 재세례파, 태평천국운동은 중국식으로 수용된 기독교, 갑오농민전쟁은 동학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가운데 중국과 조선에서의 농민봉기는 반봉건 투쟁인 동시에 식민지배에 맞서 싸운 반외세 투쟁이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맑스는 1853년 “중국과 유럽의 혁명”에서 태평천국운동에 대해서 ‘아편전쟁’으로 촉발된 외세의 개입으로부터 시작되어 내부 봉건세력과의 투쟁으로 발전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지난 10년간 중국에서 지속되어 온 반란들이 이제 하나의 강력한 혁명으로 결집된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그 사회적 원인과 종교적, 왕조적, 국가적 양상이 어떠했든 간에, 이번 반란의 발발 원인은 영국이 중국에 아편이라는 진정제를 강제로 보급한 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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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는 “중국문제”에서 이 운동이 종교적 성격을 띠었지만, 단순하게 종교 운동이 아니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이 운동은 주로 종교적 성격을 띠고 있었지만, 이는 모든 동양 운동과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이 운동이 등장한 즉각적인 원인은 유럽의 개입, 아편 전쟁, 결과적으로 기존 정부의 분열, 외국 땅으로의 은 유출, 외국 상품 수입을 통한 경제 균형의 교란 등이 있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아편은 진정제가 아닌 각성제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을 두고도 그 명칭에서부터 지배계급의 관점인 “동학란”부터 시작하여 “동학혁명”이냐 “갑오농민전쟁”이냐를 두고 논란이 일었습니다. 이는 단순하게 명칭의 문제가 아니라 이 전쟁의 계급적 성격을 둘러싼 논란이었습니다.
90년 6월「동학농민혁명 용어와 성격」이란 제목의 토론회가 열려 학계의 자율적 명칭합의를 시도한 적도 있지만 진보와 보수진영의 현격한 인식차이를 확인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학계의 논란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우선 농민이란 표현의 포함 여부로 혁명주체에 대한 인식차이를 반영하고 있다. 둘째는 동학이란 표현을 포함하느냐는 문제. 종교적 성격 부여에 관한 문제를 빼자는 측은 대신 갑오라는 간지를 앞세우는 게 보통이다. 셋째는 혁명으로 보느냐, 전쟁으로 보느냐는 점. 전체적 성격규정에 대한 문제로 두 진영 간 견해차이가 가장 첨예한 부분이다. 정권탈취 의도를 전제로 한 亂이란 표현은 더이 상 쓰이지 않고 있다. 갑오농민전쟁이란 표현을 채택하고 있는 姜萬吉(高大). 愼鏞廈(서울대). 鄭昌烈(한양대)교수, 동학농민전쟁을 내세우는 李離和역사문제연구소장 등은 진보적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鄭교수는『동학이 당시 상황에 일정한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나 동학세력을 봉기주체로 보기는 어려우며 특 히 이념적 토대를 동학이 제공한 것으로 보기 힘들다』면서 동학이란 단어를 빼고 있다. 또 혁명이라면 성공여부에 관계없이 기존질서에 대체되는 국가구상이나 생산구상을제시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전쟁으로 본다는 입장이다. 반면 朴成壽(정신문화연구원). 李炫熙(성심여대). 金昌洙(동국대). 趙恒來(숙대)교수 등은 과거부터 일반적으로 사용돼온 동학혁명이란 명칭을 견지하는 보수적 입장에 있다. 李교수는『동학은 당시 봉기의 「外皮」와도 같은 것으로 이걸 빼고는 성격 규정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면서 북한 사학계가 갑오농민전쟁이란 표현을 쓰고 있음에 주목하고 있다.(동학운동 명칭 싸고 학자들 간 감정대립, 중앙일보, 1994.03.28.)
현재 공식명칭이 국가법령으로 “동학농민혁명”으로 절충적으로 정리되지만, 아직까지 그 성격을 두고 의견이 나눠져 있습니다. 그러나 “농민혁명”으로까지 격상되었지만, 그 앞에 “동학”이 붙음으로써 이 항거는 종교적인 운동이고 종교적 혁명에 그칠 수 있다. “갑오농민전쟁”이야말로 외세와 외세와 손잡고 농민을 진압하는데 앞장섰던 봉건 통치배에 맞서 반외세, 반봉건을 내걸고 전국적 봉기를 일으켰던 이 투쟁의 성격을 제대로 부각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갑오농민전쟁 농민들의 집강소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민중자치 권력기구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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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농민전쟁
1524-1525년까지 오늘날의 독일 서남부 및 알자스 지역에서 산발적으로 시작되어 독일 중부와 동부, 오늘날의 오스트리아까지 확산되었던 독일 농민 전쟁 역시 종교개혁운동에서부터 재세례파운동까지 종교적 명칭으로 불려 지기도 하나 엥겔스는 명확하게 “독일농민전쟁”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른바 16세기의 종교전쟁에서도 매우 적극적인 물질적 계급이해가 나타나 있었으며, 이후 영국과 프랑스에서의 충돌과 마찬가지로 이 종교전쟁은 계급전쟁이었다. 비록 당시의 계급투쟁이 종교적인 특징을 띠고 있다 하더라도, 그리고 당시의 다양한 계급의 이해관계와 요구가 종교적인 장막에 가려졌다 하더라도 이것은 실제 정황을 조금도 변화시키지 않으며, 당시의 제조건을 통해 해명되어져야 한다.
당시 농민들의 처지는 봉건제 하에서 수탈과 억압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엥겔스는 당시 “전계급의 최하층부에 대규모 피착취 국민대중, 즉 농민”들의 처지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농민이야말로 사회의 다른 모든 계층의 부담을 떠맡고 있었다. 즉 제후, 관리, 귀족, 성직자, 도시귀족과 중간계급의 부담을 떠맡고 있었다. 농민이 제후의 피지배민이든 아니면 제국직속귀족이나 주교, 수도원 또는 도시의 피지배이든 간에 모든 곳에서 농민은 우마(牛馬)나 그 이하의 취급을 당했다. 그가 농노였다면 그는 전적으로 영주의 손아귀에 장악되어 있었다. 그가 예농이었다면 협정에 의해 규정된 법률상의 급부는 자신을 파멸시키기에 충분하였고, 이러한 법률상의 급부가 매일 증가하고 있기까지 하였다. 대부분의 시간을 그는 영주의 토지에서 작업하여야 했다. 얼마 안되는 자유시간을 이용하여 올린 수입에서 농민은 십일조와 조세, 지대, 전쟁세, 토지세, 제국세, 그리고 그 외의 지불금을 지급하여야 했다. 영주에게 돈을 바치지 않고는 농민은 결혼할 수도, 죽을 수도 없었다. 영주를 위한 정규부역 이외에도 농민은 두엄을 모우고, 딸기를 따고 월귤나무열매를 거두어들이며, 달팽이 껍데기를 모우고 사냥을 위해 사냥감을 몰고, 나무를 패는 등등의 일을 하여야 했다. 낚시와 사냥은 영주들만 할 수 있었다. 농민은 거친 사냥으로 그들의 곡식이 파괴하는 것을 목도하였다. 농민의 공동목장과 산림지는 거의 모든 곳에서 영주들에 의해 강탈당했다. 농민의 재산을 지배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영주는 농민의 인격과 그의 아내와 딸에 대해 강제력을 행사하였다. 영주는 초야권(初夜權)을 지니고 있었다. 또 원할 때는 언제든지 영주는 농민을 감옥에 집어 넣었는데, 거기는 현대에서 취조 검사가 범죄자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고문이 농민을 기다리고 있었다. 또 원할 때는 언제든지 영주는 농민을 죽이거나 처형을 명령하였다. “귀 자르기”, “코베기”, “눈멀게 하기”, “손가락 자르기”, “목베기”, “차열형(車裂形)”, “화형”, “부젓가락 끼우기”, “능지처참형” 등의 형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저 교훈적인 카롤리나(Carolina) 헌장은 자비로운 영주가 자의적으로 실행에 옮기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농민은 우마(牛馬)나 그 이하의 취급을 당했다.”는 주장은 과장이 아니라 농민들의 당하는 끔찍한 현실이었습니다. 이러한 중세적 노예상태에 맞서 농민들은 끊임없이 투쟁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농민들의 저항이 빈번하게 일어났지만 전국적인 차원에서 조직적인 봉기는 잘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엥겔스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광대한 지역에 걸쳐 분포되었기 때문에 농민이 공통된 이해에 도달한다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 수세대를 통하여 계승된 굴복하는 오랜 습관, 많은 지역에서의 무기사용의 경험부족, 영주의 인간성에 따라 생기는 착취정도의 불균형함 등이 모든 것들이 농민들을 잠잠하게 하였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비록 중세에서 지역적인 농민봉기가 빈발하였음이 드러난다 하더라도, 특히 독일에서 농민전쟁전까지는 어떠한 전 국가적인 농민봉기도 발생하지 않았다.
농민들에게 남아 있는 굴종성, 고립분산성, 폐쇄성, 무장투쟁 경험의 부족, 착취조건의 불균등성 등으로 인해 농민들은 봉건 착취배들에 맞서 투쟁했지만 “전 국가적인 농민봉기”, 즉 전국적인 항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봉건시대에는 크게 보아 세 가지 계급으로 나눠져 있었습니다.
보수적 카톨릭 세력은 기존의 제국의 권력을 유지시키는 데 이해가 놓여있는 분자들, 성직자, 세속 제후의 일분파, 부유한 귀족, 고위성직자와 도시귀족을 포괄하고 있었다. 중간계급적 루터파의 온건 개혁진영은 그들의 기치하에 모든 유산계급 반대파, 즉 하층 귀족, 중간계급, 그리고 교회영지를 몰수하여 부를 획득하고 제국으로부터 보다 확고한 독립을 확립하기 위한 기회를 장악하고자 희망하였던 세속 제후의 일부마저도 규합하였다. 농민-빈민 진영에 대해 말한다면, 그들은 스스로 혁명적 파당을 중심으로 무리를 이루었는데, 이 혁명적 파당의 요구와 교의는 뮌쩌를 통해 가장 대담하게 표현되었다.
이는 1789년 프랑스대혁명에서의 계급구성과 거의 동일하였습니다. 프랑스대혁명 당시에도 봉건 지배세력과 여기에 맞서는 온건좌파인 지롱드당과 급진좌파인 자코뱅이 있었습니다. 지롱르당파와 자코뱅당파는 봉건세력에 맞서 투쟁을 할 때에는 같은 길을 걸었지만, 반봉건 혁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격렬하게 다투며 갈라섰습니다. 독일농민전쟁 당시에 루터와 뮌처가 온건파와 급진파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면, 프랑스대혁명 당시에는 당통과 로베스피에르가 각각 당파를 대표하는 인물이었습니다. 물론 급진파 내에서도 “혁명의 화신”이라는 마라라는 인물이 기층 근로민중을 대변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러시아혁명 당시에도 계급구성이 유사했습니다. 레닌은 이를 이렇게 분류했습니다.
러시아에는 세 개의 기본적인 정치세력과 그에 따라 세 개의 기본적인 정치노선이 있다. 즉 흑백인조(농노주적 지주의 계급적 이해를 대표한다) 및 그들과 병행하는 또는 그들 위에 있는 ‘관료’, 다음으로 자유주의적.군주주의적 부르조아지, ‘중앙파’ㅡ 그 좌파(카데트)와 우파(10월당), 마지막으로 부르조아민주주의파(트루도비키, 나로드니키, 무당파적 좌익)와 프롤레타리아민주주의파가 그것이다.(레닌의 선거와 의회전술Ⅱ)
물론 러시아 내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파 내부에서도 혁명이 진행되면서 다시 분화가 진척되어 각각 러시아형 지롱드와 자코뱅으로 표현되는 멘셰비키와 볼셰비키가 있었습니다.
봉건 시대를 정신적으로 지배하는 사상은 종교 이데올로기였습니다. 농민들에 대한 봉건 영주와 귀족, 성직자들의 억압과 착취는 종교 이데올로기를 빌어 정당화 되었고, 이에 맞서는 농민들의 항쟁도 종교의 이름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기층 성직자들은 농민들의 삶에 직접 영향을 미쳤는데 이들이 농민들에게 지식을 전파하기도 하였고, 이들 중 일부는 농민들의 투쟁을 이끌기도 했습니다.
종교적 영향력이 막대했기 때문에 사회문제는 종교의 문제로 나타났고 종교개혁이 곧 사회개혁으로 나타났습니다.
중세 교회는 영적으로 사회를 지배하였는데, 그 영적지배의 배후에는 그 지배를 실현시키는 물질적 근거인 토지 소유가 있었습니다. 중세 교회는 서유럽 전체 토지의 3분의 1에서 2분의 1가량을 차지하는 최대의 지주였습니다. 황제권력과 교회는 봉건시대의 양대 대토지 소유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면죄부를 통해 막대한 치부를 했습니다.
레오 10세가 면죄를 처음 생각해낸 성직자는 아니었다. 면죄부는 연옥에 갇힌 영혼의 죄를 사해 천국에 보내준다는 것으로, 이전에도 교황청의 짭짤한 수입원이었다. 그러나 레오 10세는 면죄부를 아주 대대적으로 판매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각지로 주교를 파견하여 ‘영업’을 뛰게 했는데, 특히 요하네스 테젤이라는 사기꾼 주교는 괄목할 성과를 올렸다. 그는 “금화가 돈통에 ‘쩔렁’하고 떨어질 때 죄인의 영혼은 천국으로 향한다”며 면죄부는 과거의 죄를 물론 앞으로 지을 죄까지 사해준다고 설교했다. 그는 살인죄를 사하는 데 얼마, 도둑질을 사하는 데 얼마 하는 식으로 금액을 정해놓고 돈을 긁어모았다. 물론 제정신 가진 사람들이 이런 사기극을 좋아할 리 없었으므로 면죄부 판매는 거의 강매로 이뤄졌다.
이렇게 면죄부 판매가 늘자 양피지에 손으로 써서는 수요를 맞출 수가 없었다. 교황청은 면죄부를 대량 인쇄할 생각을 했고, 이 때문에 활판 인쇄기를 유럽 각지에 보급시켰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이 활판 인쇄기는 교황을 ‘예수의 적’으로 규정하는 마르틴 루터의 이단 책자를 꽝꽝 찍어냈다. 그리고 그 책자들은 천 년 이상 지속된 유럽의 가톨릭 세계를 둘로 쪼개버렸다.(반란의 세계사, 오준호 지음, 미지북스)
교회의 이러한 사기적 작태에 분노한 마틴 루터는 1571년에 유명한 ‘95개 반박문’을 작성해서 이를 폭로했습니다.
28조, 금화가 돈 통에 쩔렁 떨어질 때 늘어나는 것은 탐욕밖엔 없다! 75조, 면죄부를 샀다는 이유로 어떤 죄도 사할 수 있다면 성모를 범하는 죄도 사할 수 있다는 것인가? 86조, 로마 교황은 세계에서 큰 부자이면서 어째서 제 돈으로 성 베르도 성당을 짓지 않고 신자들에게 손을 벌리는가?(반란의 세계사)
루터는 교회의 행태에 반대하여 처음에는 과격하게 싸울 것을 요구했습니다.
만약에 [로마 교회 성직자들의] 광기가 계속 사납게 날뛴다면 나로서는 이에 대한 다음과 같은 처방이나 치유책이 가장 최선이라고 여겨진다. 즉 왕과 제후들이 무력을 제공하고, 스스로 무장하여 전세계를 감염시키는 악인들을 공격하고 이번으로 이 놀이를 끝내는 것이다. 그것도 말로서가 아니라 무기를 사용하여서. 도둑은 칼로 처벌되고 살인자를 교수형용 밧줄로, 그리고 이단자는 화형으로 처벌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손에 무기를 들고 처절한 파멸의 사악한 설교자들, 즉 그러한 교황, 주교, 추기경, 로마의 소돔의 무리 전체를 정복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이들의 피로 손을 씻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엥겔스, 독일농민전쟁)
물론 루터에게 로마 교회 성직자들을 처벌하는 주체는 기층 농민들이 아니라 “왕과 제후”들이었습니다. 이것이 이후 루터가 농민반란에 직면에 왕과 제후의 편을 든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당시 루터의 과격한 호소는 농민과 빈민에게 반란을 하라는 요구로 받아들여졌습니다.
특히 뮌처는 루터의 95개 조항을 읽고 감명을 받아 1519년 7월에는 비텐베르크로 가서 루터를 만났습니다. 루터는 그를 종교개혁의 열성당원으로 인정해 츠비카우의 교회 사제로 추천을 했습니다. 그러나 뮌처는 하층민들이 출입하는 교회를 담당하고 하층민들의 삶을 알게 되고 점점 더 급진적으로 변해갔습니다.
성마리아 교회의 구성원들이 상류층과 중산층이었다면 그가 담당한 카타리파 교회는 수공업자, 광부, 그리고 직조공 등 하층민들이 출입하는 교회였다. 그는 이 교회를 통해 하층민들의 비참한 삶과 고통을 알게 됐다. 이때부터 그는 루터와 다른 종교개혁적 성향을 띤 츠비카우의 예언자들에게 관심을 쏟는다. 그들은 종교개혁뿐만 아니라 급진적인 사회개혁도 주장했다. 그들의 대표자격인 니콜라우스 스토르히는 ‘8항목’을 통해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위정자와 성직자들에 대해 비판한다.
“만약 모든 사람이 똑같고 평등한 위치라면 또한 모든 것이 공동의 필요에 따라 사용되고 쥐새끼 같은 왕을 더 이상 섬기지 않아도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색욕에 가득 차고 나쁜 성직자들과 뚱뚱한 호색가들은 없어져야 한다.”
이때부터 뮌처는 자신이 관심을 기울여 왔던 신비주의와 또한 츠비카우 예언자들의 영향으로 성서 문자에 집착하는 인문주의적 입장을 떠나 직접적인 성령체험을 주장하기 시작한다.
프라하 선언에서 뮌처는 루터의 ‘문자적 믿음’에 대해 ‘영적 믿음’을 대립적으로 내세웠다. 그가 영적 믿음을 내세운 이유는 루터가 주장하는 문자적 믿음이 성령과의 만남이 없을 때 얼마나 현학적이고 기만적으로 변질될 수 있는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대다수 민중이 문맹자였던 시대에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사람들은 소수였다.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사제들은 그러한 점을 이용해 성서의 내용을 차단하며 은폐시킬 수 있다. 뮌처는 성서를 통해 증언되는 ‘가련한 민중의 살아 있는 목소리’가 그렇게 차단되고 은폐되었다고 보았다. 이와 관련해 뮌처는 이 프라하 선언에서 세 부류의 무리들에 대해 비판한다. 첫 번째 부류는 성서를 은폐시키는 사제들과 승려들이며, 두 번째는 민중을 착취하며 살아가는 영주들이고, 세 번째 부류는 ‘죽은’ 지식을 대변하는 ‘멍청한 불알 달린 박사들’이었다.(혁명적 신학자 토마스 뮌처,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쿠키뉴스, 2011.12.12.)
뮌처는 마침내 루터가 온건한 방식으로 개혁을 요구하고 봉건영주와 귀족들의 편을 들자 그를 새롭게 등장한 ‘비텐베르크의 교황’으로 노골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이 전에 보름스에서 주권을 그렇게 고백했던 것은 당신이 그 주둥이를 잘 어루만져 꿀을 발라 주었던 귀족들 덕분일 것이오. 왜냐하면 그 귀족들은 당신이 당신의 설교로 그들에게 보헤미아의 선물(교회 재산의 세속화)을 주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이기 때문이요. 당신이 영주들에게 주기로 약속한 수도원들이 바로 그것이요. 만일 당신이 보름스에게 주춤거렸다면 당신은 석방되기는커녕 귀족들에 의해 창에 찔려 죽었을 것이요.”(같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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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의 방법론 차이 정도로 여겨졌던 둘의 차이는 투쟁의 주체 차이로 심각하게 갈라져 서로 다른 길을 걷는 것으로 변모해버렸습니다. 뮌처가 농민반란의 정신적 무기를 농민들에게 제공하였다면, 루터는 체제를 수호하려는 반동 봉건영주들에게 정신적 무기를 제공하였습니다. 농민들은 루터가 배신자라면서 완전히 등을 돌렸습니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은 만물의 자유로운 주인이므로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고 주장한 반면에 뮌처는 “하나님은 가난한 자의 편이며, 불의한 통치자들은 몰아내야 한다”며 “칼을 들어 불의한 자들을 심판하라”며 무장 투쟁을 선동하기까지 했습니다.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가져다 주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고 말씀하신 이기 그리스도 아니신가?...우리들의 칼의 도움없이 신의 권능만으로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다는 헛된 주장에 귀기울이지 말라. 왜냐하면 그렇지 않을 경우 칼은 칼집 안에서 녹슬고 있어야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계시를 가로막는 자들을 무자비하게 처단하여야 한다.”(엥겔스, 독일농민전쟁)
엥겔스는 뮌처가 “중간계급적 종교개혁을 명백히 거부하고, 이와 동시에 직접적인 정치선동가로서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엥겔스는 “뮌쩌의 신학적·철학적 교의는 카톨릭신앙 뿐만 아니라 기독교 그 자체의 모든 핵심점을 공격하였다. 그는 기독교의 외양을 빌어쓴 채 일종의 범신론을 설교하였는데 그것은 교묘하게도 현대의 사변적 명상방식과 유사하였으며, 때로는 공공연한 무신론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는 성서만이 유일한 무오류의 계시라는 주장을 반박하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유일하게 현존하는 계시는 이성으로서 언제나 모든 사람 속에 존재하는 계시라는 것이다”라고까지 평가하였습니다.
엥겔스는 “천국은 저 세상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찾아져야 하며, 이 땅에서 천국, 즉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는 것이 신앙인의 임무라고 주장하였다. 또 그에 의하면 저 세상에는 천국이 없기 때문에 지옥도 없다. 그리고 저주도 없고 악마도 없으며 있다면 단지 사악한 욕심과 인간의 열망뿐이다”라며 그의 사상이 사실상 기독교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엥겔스는 마침내 뮌처를 현대 공산주의의 시조라고까지 찬사를 보냈습니다.
뮌쩌의 종교철학이 무신론을 다루고 있는 것처럼 그의 정치강령도 공산주의를 언급하고 있다. 현대 공산주의 분파 가운데는 2월혁명의 전야에, 16세기의 뮌쩌만한 풍부한 이론적 장치를 가지지 못했던 분파가 한둘이 아니었다. 뮌쩌의 강령은 당시의 빈민들의 요구를 집대성한 것이라고 보다는 빈민을 사이에서 발전하기 시작한 프롤레타리아적 요소의 해방을 위한 제조건을 한 천재가 예견한 것에 가까운 것으로 신의 왕국, 즉 예언된 천년왕국이 이 땅에서 즉각적으로 수립되도록 요구한 것이다...뮌쩌가 신의 왕국이라는 말로 이해한 것은 계급차이, 사유재산, 그리고 사회성원들에 대립적인 위로부터 강요된 국가권력이 없는 사회로 이루어진 국가에 다름아니다. 그가 설교한 바에 의하면 모든 기존의 권위는, 이들이 혁명에 항복하고 가담하지 않는 한 전복되어야 하며, 전 노동과 재산이 공유되어야 하고 완전한 평등이 도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엥겔스는 뮌처의 사상이 천재의 사상이었지만 그 사상을 실현할 주체와 조건이 마련되지 못한 것이 한계라고 주장했습니다.
루터는 1524년 7월 경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와 요한 공에게 《반란적 정신에 대항하여 작센의 제후에게 보내는 서한》을 보내 반란을 경계하고 엄격하게 대처하라고 촉구했습니다. 여기서 반란적 정신은 바로 뮌처였고, 루터는 뮌처를 '지옥에서 온 사탄의 도구'로 간주하고는 그가 혹세무민하며 농민들에게 폭력혁명을 선동하고 있다며 그를 추방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결국 1524년 6월 농민 반란이 남부 독일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러시아에서 전함 포템킨 수병 반란이 썩은 고기 지급에서 촉발되었듯이. 농민들의 반란도 뤼펜 백작 부인이 연회에 쓸 딸기와 달팽이 껍데기를 모아 올 것을 요구하자 농민들이 이를 거부하면서 시작됐습니다. 한스 밀러라는 농민이 주도한 반란은 순식간에 독일 전역으로 번져 나가면서 농민전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1524년 말에는 독일의 3분의 1을 농민들이 장악하기 시작했습니다. 농민들은 일부 귀족들을 학살하기조차 하면서 극렬하게 투쟁했습니다. 뮌처는 튀링엔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봉기를 지휘하였습니다.
루터는 급기야 “강도질하고 살인하는 농민폭도들에 반대하여”에서 농민봉기를 격렬하게 비난하며 ‘폭도 무리’ 농민들을 때려죽이라고 요구했습니다.
할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들을 비밀리나 공개적으로나 녹초가 되도록 두들겨 패야 하며, 목졸라 죽이고, 찔러 죽여야 한다. 마치 우리가 미친 개를 죽여야 하는 것처럼!(엥겔스, 독일농민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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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가 루터는 이제 반동 무리로 타락해버렸습니다.
“영주이든 백작이든 귀족이든 만인은 평등하다는 이런 원리를 행하고자 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그 목을 치거나 교수대에 매달려야 한다.”
독일 농민 전쟁에 가담한 30만여 명의 가난한 소작농 가운데 10만여 명이 귀족들에 의해 학살되고 진압 당했다
《독일 농민전쟁》의 집단적 주인공이 1500년대 봉건제 압제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가난한 농민들이라면, 그 중심에 있는 개별 인물은 단연 토마스 뮌처(Thomas Münzer, 1489년? ~ 1525년 5월 27일) 였습니다.
엥겔스의 《독일농민 전쟁》은 유럽에서 수백년 동안 이어진 독일 농민 전쟁의 한 시대를 역사적 유물론으로 조명하고 있습니다.
“천국은 저 세상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찾아야 한다”는 뮌처의 주장은 당시 억압당했던 농민계급에게나 오늘날 프롤레타리아트에게나 모두 해당되는 진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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