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김세창의 으랏차차 : 전평에 대한 몇가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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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국민주연합 조회603회 작성일 22-01-10 09:54본문
이 땅의 차별과 불평등 철폐를 위한 투쟁과 함께 2021년을 힘차게 달려 오신 으랏차차 동지들께 건강과 건승의 인사를 드립니다.
2022년에도 노동자가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위해 굳세게 손잡고 억세게 살았으면 합니다. 투쟁!
이번에는 ‘전평에 대한 몇가지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일장기가 내려 가고 성조기가 올라 가니 해방이 분단으로 이어 지고, 노동자들은 배고픔의 생지옥으로 떨어 졌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되자마자 이남은 이승만 친미친일세력을 내세운 유일합법정부를 자처한 미국 군사정권(미군정)의 통치하에 들어 가게 되었습니다.
미국은 9월 9일, 맥아더 태평양 사령관의 포고령을 통해 38선 이남의 모든 영토와 조선인민에 대한 모든 권한을 갖는 점령군임을 선포했습니다.
45년 7월까지만 해도 47억원이던 전체 통화 발행액은 8월 들어 갑자기 80억원으로 불과 한 달 사이에 거의 2배로 늘어 났는데 이러한 통화남발은 각급 관·공사를 비롯한 국책회사 직원들의 퇴직금, 70여만명에 달하는 재조선 일본인들의 귀국 경비로 무차별 지급된 때문이었습니다. 심각한 인플레가 왔습니다. 1946년의 물가는 1944년에 비해 92배 뛰었고, 1946년 한해 임금보다 물가는 13배 인상되었습니다. 1946년 1월에 쌀 한 말에 180원 하던 것이 9월에는 1200원으로 올랐습니다.
설상가상으로 1946년 8월 20일, 미군정 운수부는 ‘산업합리화’명분으로 철도노동자 25%를 줄이고, 월급제를 일급제로 바꾸겠다고 발표했는데, 이것은 전평에서 투쟁력이 가장 강했던 4만여명의 철도노조를 무력화하기 위한 술책이었습니다. 당시 교섭에 나왔던 미군정 운수부장 코넬슨은 “인도 노동자는 굶고 있는데 조선노동자는 강냉이라도 먹으니 행복하다.”는 망언으로 노동자들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었습니다. 9월 총파업이 시작되었고, 2개월에 걸친 10월항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당시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1945년 11월 5∼6일 서울 중앙극장(명동 입구)에서 210,000조합원으로 결성. 1946년 2월 15일에는 574,479명의 조합원 규모로 확대)의 요구는 점심밥 지급, 식량 배급, 임금인상, 전재민과 실업자에게 주택 제공, 노동운동의 자유 보장, 테러 배격, 노동법 실시, 민주주의 인사 체포금지 등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은 배고픔과 실업에서 벗어 나기 위해 친일잔재 청산과 민족자주독립, 토지개혁과 노동법령 제정 등을 포함한 민주화를 위한 새로운 투쟁에 나서야 했습니다.
여론조사로 본 당시의 민심
46년 7월 3일 창립된 한국여론협회에서 종로와 노량진에서 4,782명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했습니다.
“미군정이 잘했다고 생각하는 점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98%인 4,686명이 응답을 기권했다고 합니다. 뭐 하나 딱 집어 말할 게 없었다는 것입니다. “미군정이 무엇을 잘못했는가”라는 질문에는 53%가 식량정책, 31%가 산업운영과 주택관리를 꼽았다고 합니다.
이어 미군정청 여론국이 실시한 여론조사(8,453명 응답)가 8월 13일자 동아일보에 소개되었습니다.
“어떤 경제체제를 원하는가”라는 질문에 70% 이상이 사회주의 국가라고 응답하였다는데, 일제 식민통치하에서 혹독한 착취와 탄압을 받았던 노동자 농민들의 일반적 의식은 ‘쌀이 곧 사회주의’이며, ‘일자리가 곧 사회주의’라는 인식이 일반적인 상식처럼 간주되던 세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47년 7월 조선신문 기자회가 서울시내에서 2,495명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한 것인데요.
‘국호’에 대한 질문에서 대한민국을 선호한 응답은 24%인데, 조선인민공화국이라고 응답한 비율은 70%가 되었고, ‘정권 형태’에 대한 질문에서는 인민위원회라고 응답한 비율이 71%에 달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승만-김구가 주도한 ‘반탁운동’이 ‘독립의 길’이라고 응답한 비율은 26%인 반면, ‘독립의 길이 아니다’라고 응답한 비율이 71%라고 응답하였습니다.
그 다음은 ‘토지개혁방식’에 대한 것인데 유상몰수 유상분배에 찬성한 비율이 17%였고, 무상몰수 무상분배에 찬성한 비율은 68%에 이르렀습니다.
그렇지만 미군정청은 산하기관인 신한공사(동양척식회사의 후신이자 농림부의 전신)를 내세워 48년 3월에 농지개혁을 실시하는데 일본인 소유의 농지를 경작하던 소작민들에게 15년 분할상환으로 유상매각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말았습니다. 농민들의 바람을 철저히 짓밟고 미군정이 땅장사를 해먹은 것입니다.
반일에서 반미로
일제 식민치하에서 ‘자주’라는 것은 일본의 수탈과 억압을 반대하는 것이었기에 자주는 곧 생존권이자 노동조합 활동의 자유였으며, 차별과 빈곤을 가중시키는 매판예속경제를 반대하고 자주독립경제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아가 일제를 반대하는 것은 곧 노동해방이자 민족해방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놈들에 이어 미군정이 점령통치를 하게 되었으니 미군정을 반대하는 것이 노동자 민중의 생존권과 권리를 쟁취하고 동시에 자주통일독립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해방 이후 해방자요 원조자로 자칭했던 미군정의 실체는 오래지 않아 만천하에 드러났습니다.
미국은 친일친미세력을 자신들의 대리자로 내세웠고, 민중의 권리는 미군정의 친미단독분단정부 수립에 방해되지 않을 만큼만 허용되었습니다.
미국은 이남을 사회주의를 막는 반공·반소련의 전진기지로 만들기 위해 좌우분열을 일으켜 진보세력을 말살하고 숭미사상과 사대주의를 이식하는 한편, 저임금노동력과 값싼 원료공급지로 전락시키는 동시에 미국 잉여상품소비지로 미국의 부속경제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전평의 깃발아래 모인 노동자들은 반일에서 반미로 나설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노동자여! 도탄에 빠진 나라와 민중을 구하라! - 3월 총파업과 2.7 구국총파업
47년에 3월 총파업이 일어납니다.
전평은 이 시기부터 임금인상과 생활조건개선투쟁에서 ‘미군정 반대’와 ‘이남지역 단독정부수립 반대’라는 정치파업으로 전환하기 시작했습니다.
1946년 9월 7일, 미군정은 박헌영 등 조선공산당 간부에게 체포령을 내리고 진보계열 신문들을 폐간하였고, 47년 3월초에는 전평 집행위원장인 허성택, 부집행위원장 박세영을 비롯한 전평 간부들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등 진보인사들에 대한 대대적이고 살인적인 탄압을 가합니다.
3·1절 기념 평화시위를 하던 제주도민을 향해 미군정이 발포하여 6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이남의 정당·사회단체는 ‘테러폭압반대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전평은 ‘남조선해고폭압반대투쟁위원회’를 조직(3월 22일)하고 미군정의 노동자 해고, 테러, 폭압 근절을 요구하는 ‘24시간 총파업투쟁(3월 28일)’을 전개합니다. 전국 주요 공장의 동조파업은 물론 16만여명의 농민과 시민, 8만여명의 학생들도 파업에 동참합니다.
이 파업은 전체 진보민주진영의 합동파업으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즉시 실시”, “정권을 인민위원회로 넘기라”는 등의 정치투쟁이었습니다. 24시간 총파업으로 전국에서 2,000여명의 간부들이 검거됩니다.
이어 48년 2월 27일, 전평은 이남지역의 친미단독정부수립을 강행하기 위한 유엔조선임시위원단을 반대하는 정치동맹파업을 일으킵니다. 역사에서는 2.7구국투쟁이라 부릅니다.
전평은 2월 7일 ‘유엔조선위원단 항의 남조선 단선단정반대투쟁 총파업위원회’를 조직하는데, ‘총파업위원회’는 미국을 명백히 제국주의 침략자로 규정하고, ‘토지의 무상몰수, 무상분배, 적산과 중요 산업의 국유화와 인민의 관리’ 등의 경제적 요구 뿐만 아니라 ‘단선단정의 반대와 외국 군대 철퇴와 남북통일 자주정부 수립’ 등의 정치적 요구와 주장을 담은 ‘총파업 선언서’와 ‘항의서’를 유엔조선위원단에 보냈습니다.
2월 7일부터 3일간 진행된 총파업투쟁에는 파업, 시위, 동맹휴학 등의 다양한 형태로 약 150만여명이 동참하였는데, 미군정의 살인적인 진압으로 57명이 사망했고 11,000여명이 검거되었습니다.
마침내, 미군정은 47년 6월 전평 불법화를 선포하는 폭거를 자행합니다.
47년 4월 18일부터 미주둔 사령관 하지중장의 명령에 의하여 38선 월경자를 모두 체포하는 방침을 세워 이때부터 38선은 실질적으로 금단의 선이자 분단의 벽이 되어 버렸습니다.
당시의 상황을 볼 수 있는 몇가지 여론조사가 있습니다.
48년 2월 17일, 조선여론조사협회에서 제1회 거리 여론조사를 했는데, 미군정의 총선거안에 대하여 남북통일 총선거는 70.5%가 지지한데 반해 남조선 단독선거는 17.2%만이 지지한다는 답변을 하였고, ‘미소양군 철퇴에 대해서’는 즉시 철퇴가 62.2%, 선거 후 철퇴는 28.8%로 나타났습니다. 민의는 자주적 통일과 독립을 뚜렷히 지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조선여론조사협회가 2월 21일〜22일 이틀 동안 당시 긴급한 정국을 풀어 나가는 4가지 방안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였는데, 남북회담 지지가 71%, 유엔임시조선임시위원단 철수 12.5%, 단선·단정 11.5%, 단선 5% 등으로 나타나 통일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남북회담을 압도적으로 지지하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48년 4월 1일, 유엔임시조선위원단의 통계를 보면, 이남인구를 19,947,000명으로 조사하면서 유권자 수는 49.3%인 9,834,000명으로 집계하였고, 5.10단독선거의 유권자 등록율은 74%라고 발표합니다.
이에 48년 4월 12일, 조선여론협회가 종로와 충무로의 통행인 1,26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의하면, 유권자 등록자 중 자발적 등록은 9%에 불과하였고, 강요받은 등록이 91%나 되는 것으로 응답하였습니다.
전평이 가열차게 벌인 단독선거저지, 단독정부 수립반대 투쟁은 미군정의 폭압과 강요에 대한 강한 저항이 넓게 퍼져 있었으며, 분단과 전쟁으로 이어질 단독선거를 저지하자는 민심과 일치한 투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35,000여명의 경찰로는 13,800개에 달하는 투표소를 지켜 낼 수 없다고 판단한 미군정과 이승만은 18세-55세이하의 남성들을 의무적으로 선거 경비를 위한 ‘향보단’에 가입시켜 5.10단독선거를 강행하는데 동원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아예 사람들이 길거리에 모이는 것 자체를 금지시킨 것도 이런 민심과 깊은 관련이 있었던 것입니다.
46년 전평 총파업의 선봉에 섰던 철도노조 조합원 이수갑 선생(2013년 별세)의 증언을 들어 봅니다.
“노동자계급은 미국의 침략야욕으로 인한 조국분단의 비극을 저지하기 위한 총력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2.7 구국투쟁은 단독정부 수립으로 조국과 민족이 영구분단되는 것은 절대로 막아야 한다는 역사적 사명으로 전평 노동자계급의 총파업을 선두로 모든 정당·사회단체를 비롯한 전 인민이 총궐기한 투쟁이었습니다.
‘단독정부 수립 반대, 조국분단 절대 반대, 미군은 즉시 물러가라’는 등을 강력히 주장하며 전국 중요도시에서 구국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노동자들은 계급의식이 확고하며 제국주의를 반대하고 조선의 자주독립국가 건설에 대한 사명감이 누구보다 강하였습니다.”
으랏차차 동지들,
불평등을 갈아 엎기 위해 우리 노동자 민중들은 1월 15일 민중총궐기 투쟁에 나섭니다.
수십년전 전평 선배님들의 투쟁은 오늘날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을 끝장내고, 자본과 사이비개혁정부에 의해 강요된 차별과 불평등을 벗어 던지며, 우리 민족의 자주적 평화통일에 한발 더 다가서기 위한 투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세월이 아무리 흐르고 강산이 어떻게 변한다 해도 자주적으로 사는 참세상을 위해 투쟁해야 하는 노동자들의 역사적 책임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2022년 범띠 해, 투쟁으로 열고 투쟁으로 승리하는 한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다음은 <사랑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찾아 뵙도록 하겠습니다.
### 필자의 사정으로 원고가 늦게 게재된 점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말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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