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임용현이 말하는 쉴 권리! : 예외와 유예가 난무하는 정부의 노동자 건강권 파괴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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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국민주연합 조회695회 작성일 22-05-06 09:34본문
예외와 유예가 난무하는 정부의 노동자 건강권 파괴 정책
임용현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집행위원)
얼마 전 차기 정부의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110대 국정과제를 발표했다. 인수위 국정과제 중에는 선택적 근로시간제 확대를 통한 주52시간제 완화, 사무직 초과근무수당 지급제외 제도, 연장근로시간 총량관리와 근로시간 저축계좌제 등의 추진 계획이 담겨 있다. 그동안 경영계가 어려움을 호소해 온 ‘노동시간 단축에 따른 부작용’에 대해 새 정부가 다각도로 유연화 조치를 시행하겠다고 화답한 것이다.
윤석열 당선인은 대통령 후보 시절부터 노동시간 유연화 필요성을 줄곧 제기해 왔다. “필요하다면 주 120시간이라도 바짝 일하고 이후에 바짝 쉬어야 한다”는 망언도 서슴지 않는 등 극단적인 노동시간 유연화 방침을 시사한 바 있다. 이 같은 대통령 당선인의 인식은 새 정부의 국정과제에 경영계 입장을 고스란히 반영한 정책으로 이어졌다.
▲2018.8.15 서울정부종합청사 앞에서 <적정 노동시간과 휴게시간 보장않는 민간 사업주를 정부가 관리감독 해야한다>는 기자회견을 열고있다.
OECD 최상위권의 ‘과로사회’
국제 수준에서 한국은 ‘과로사회’, ‘일중독workaholics’ 대표 국가로 자리매김한 지 이미 오래다. 2020년 기준 한국의 연간 노동시간은 1908시간에 달해,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 노동시간(1687시간)보다 221시간(9.2일)이나 긴 것으로 조사됐다. OECD 가입국 가운데 한국보다 노동시간이 긴 나라는 멕시코(2124시간)와 코스타리카(1913시간)가 유이하다. 연간 1332시간을 일하는 독일보다는 무려 576시간(24일)을 더 일하는 셈이다.
그런데도 새 정부는 경영계가 원하는 대로 노동시간을 한껏 유연하게 만들겠다고 밝혔다. 하루 8시간 노동이라는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작업량에 맞춰 노동시간을 고무줄처럼 ‘늘였다 줄였다’ 신축적으로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자본 입장에서는 금상첨화가 따로 없다. 노동시간을 줄여 일감을 나눔으로써 일자리를 늘리기보다는, 일감의 많고 적음에 따라 노동시간을 탄력적으로 할당하면 구태여 추가 고용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새 정부의 노동시간 유연화 정책은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표방해 온 윤석열 당선인의 철학에 딱 들어맞는 방안일 따름이다. 초장시간 노동 현실을 개선하겠다는 의지는커녕, 사용자에게 노동시간을 떡 주무르듯 재량껏 처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겠다는 으름장만 놓은 격이다.
시간 주권은 자본만이 행사할 수 있다는 선언
노동조건의 최저한도를 법으로 규정한 근로기준법에는 노동시간의 상한선을 분명히 정해놓고 있다. 이에 따르면 주 40시간 노동이 기본 원칙이고, 노사 합의로 주 12시간 한도에서 연장근로를 시행할 수 있다. 법 취지대로라면 주 52시간을 초과하는 노동은 원칙적으로 금지해야 한다.
그런데 근로기준법상 노동시간 상한규제는 이미 문재인 정부 시절부터 무력화되고 있었다. 일주일에 40시간 노동을 원칙으로 못 박아 놓고(근로기준법 제50조(근로시간) ‘1주간의 근로시간은 휴게시간을 제외하고 40시간을 초과할 수 없다.’) 온갖 예외 규정을 덕지덕지 갖다 붙여 입법 취지를 무색케 한 것이다. 법정 근로시간 40시간에 연장근로시간 12시간을 허용한 것도 문제이지만, 코로나19 시기를 기점으로 정부는 특별연장근로 인가사유를 확대하고 탄력근로제 단위기간을 연장하는 등 노동유연화를 확대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방향과 원칙을 정해 놓고 정부가 이런 식으로 각종 예외와 면책 규정을 만든 결과, 이제는 무엇이 원칙이고 무엇이 예외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을 지경이다. 문재인 정부가 물꼬를 튼 노동유연화는 윤석열 정부에서 원칙을 완전히 허물어 봇물을 이루게 될 가능성도 그만큼 커졌다.
시간에 대한 낮은 지배력은 노동자 건강권을 위협한다
새 정부의 노동시간 관련 정책에서 핵심 줄기는 바로 노동시간을 둘러싼 결정권을 누가 가지느냐에 관한 것이다. 즉, 노동시간을 처분할 수 있는 선택권(또는 재량권)을 노동자가 아닌 자본에게 선사하겠다는 게 차기 정부 계획이다. 이는 ‘시간 주권’ 쟁탈전에서 자본에 막강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도록 정부가 제도적으로 보장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미 자본은 노동시간뿐 아니라 노동자의 고용과 임금, 그 밖의 노동조건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크나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노동자들이 개별로 흩어져서는 사용자에 대항해 자신의 권리를 지킬 수 없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노동자들의 자유로운 결사와 단체교섭, 단체행동을 헌법이 ‘노동3권’으로 보장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하지만 상위법에서 이러한 대원칙을 정했다 하더라도, 국회를 거쳐야 하는 별도의 법 개정 절차 없이 정부 시행령이나 행정규칙(훈령) 변경만으로도 얼마든지 우회가 가능하다. 이런 조건하에서는 사실상 자본이 독점하고 있는 시간 주권을 노동조합이 회복할 수 있는 법적 수단마저 차단될 가능성이 높다.
노동시간이 이럴진대, 하물며 휴게시간은 어떻겠는가. 자본에 포획된 시간 주권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노동자의 휴게시간 역시 하찮게 취급되는 상황에 처할 것이다. 시간에 대한 낮은 지배력은 삶의 질을 악화하는 데 기여할 뿐이다. 자본이 노동시간을 극도로 유연화한다면, 그에 부수되는 휴게시간 또한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주 52시간 노동시간 상한이 폐지될 경우, 근로기준법이 명시하고 있는 휴게시간(근로기준법 제54조(휴게시간) ‘사용자는 근로시간이 4시간인 경우에는 30분 이상, 8시간인 경우에는 1시간 이상의 휴게시간을 근로시간 도중에 주어야 한다.’)도 널뛰기를 거듭할 수밖에 없다.
시간 주권의 상실은 단지 노동자의 선택권을 앗아가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것이 시사하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일과 시간에 대한 지배력이 낮을수록 노동자의 안전과 건강도 위협받게 된다는 사실이다. 자본이 구획한 질서에 좀처럼 저항하기 힘든 구조에서 노동자는 한낱 소모품처럼 취급되기 일쑤다. 그리고 자율권을 박탈당한 노동자가 일터에서 스스로의 건강과 안전을 도모하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시간으로만 할당되지 않는 노동자의 권리
세계인권선언 제24조는 “모든 사람은 휴식을 취하고 여가를 즐길 권리가 있다. 이러한 권리에는 노동시간을 적절한 수준으로 제한할 수 있는 권리, 그리고 정기적인 유급휴가를 받을 권리가 포함된다”고 밝히고 있다. 일하는 사람 모두가 장시간 노동 관행으로부터 탈피해 적정한 수준의 휴식과 여가를 누릴 권리가 있음을 천명한 것이다.
근로기준법의 휴게시간 규정 역시 ‘노동자의 쉴 권리’를 명문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쉴 권리에 관한 법령이 마련된들, 노동자의 노동시간을 조직하고 할당하는 자본의 힘이 무한대로 커진다면 별 소용이 없게 된다. 자본이 짜 놓은 시간표대로 작업장의 규칙과 속도에 맞출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는 휴게시간조차 노동자의 시간으로 온전히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해보자. 사용자가 법령에 따라 4시간마다 30분 휴게시간을 부여하면 정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걸까? 극심한 노동강도나 상시적인 인력부족의 문제를 겪는 현장이라면 법정휴게시간의 준수만으로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이 확보된다고 말할 수 없다.
또 다른 경우가 있다. 사용자가 휴게시간을 제대로 부여한다 해도, 노동자가 편히 쉴 공간이 없다면 어떻겠는가? 직접고용 쟁취 투쟁 이후 도로공사가 톨게이트 노동자들에게 내맡긴 ‘현장 지원직’ 업무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현재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고속도로 법면(경사면)과 졸음쉼터 화장실, 휴게소 주변 등을 청소하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지만, 정작 노동자들이 업무 수행 도중 쉴 공간은 마땅치 않다. 도로 위를 달리는 차량의 돌진 위험은 물론, 매연과 분진으로부터 안전하고 쾌적한 공간에서 쉬는 것은 엄두조차 내기 어렵다. 현장 지원직 업무용 차량(승합차)이 휴게공간을 대신한다지만, 특히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 노동자들에겐 제대로 된 쉼터의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다.
▲전국민주연합노동조합 톨게이트조합원이 졸음쉼터 청소를 하고 있는 모습.
쉴 권리마저 차별하는 정부의 휴게시설 의무설치 입법예고
지난 4월 25일, 정부는 ‘산업안전보건법 시행령 일부개정령안 입법예고’를 공고했다. 이번 입법예고안은 산안법 개정에 따른 사용자의 휴게시설 설치 의무 기준을 구체화한 것이다. 그런데 정부는 이번에도 모든 노동자의 쉴 권리보다 사용자의 재정 부담을 더 염려하는 듯하다. 입법예고된 내용에 따르면, 20인 미만 사업장에는 휴게시설 설치 의무를 부과하지 않겠다고 한다. 게다가 50인 미만 사업장은 1년 적용을 유예했고, 휴게시설에 대한 1인당 면적기준조차 제시하지 않았다.
휴게시간에 뒤이어 휴게시설에 대해서도 법적 기준을 마련하고 쉴 권리에 있어서 사용자의 책임과 노동자의 권리를 명시했지만, 또 다시 납득하기 어려운 예외 및 유예 조항을 둔 것이다. 노동시간과 휴게시간이 동전의 양면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문제이듯, 휴게시간과 휴게시설의 관계 또한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둘 중 어느 하나라도 권리를 제대로 보장하지 않는다면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 역시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다.
기업하기 어렵다는 경영계의 볼멘소리에 정부는 ‘민간 자율’이라는 이름으로 어느새 국가 책임을 하나둘 내려놓고 있다. 노동시간 유연화든 휴게시설 설치의무화든 이러한 정부 정책은 시‧공간에 대한 노동자의 권리를 상당 부분 사용자 재량으로 위임하겠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경영계를 향한 새 정부의 ‘최소규제’와 ‘최대지원’ 약속은 결국 노동자의 권리를 분할하고 배제하는 결과로 나타날 것이다. 정부와 자본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그에 맞선 민주노조 운동의 대응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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