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김세창의 으랏차차 : 여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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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국민주연합 조회630회 작성일 22-10-05 10:44본문
『여의도』
범민련 남측본부 중앙위원 김세창
으랏차차 동지들!
건강하십니까!
아무데도 가지 말고, 아무것도 하지 말고, 아무말도 하지 말라는 속시원한 명언이 생겨났습니다.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아시겠죠?
손가락 짜른다고 큰소리치던 놈이 병원갔다는 말도 아직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매에 장사없다는 말처럼 3고(高)(고환율, 고금리, 고물가)에 버틸 수 있는 정권도 없습니다.
노동자 서민생계든, 전쟁위기든 이 모든게 미국이라는 나라의 세계지배정책에서 비롯된 재앙인 것인데 진짜 도둑놈은 때려 잡을 생각은 아예 없고 서민들에게 허리띠만 졸라 매라고 방귀낀 놈이 성을 내는 꼴입니다.
이제 노동자는 임금인상투쟁만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그야말로 생계비 폭등시대에 들어 섰고, 촉구하고 규탄하는 집회만으로는 비정상적인 국가운영을 바로 잡을 수 없는 지경에 들어 섰습니다.
집에서 생활폐기물 버릴 때도 봉투를 사고, 딱지를 붙여 내와야 합니다.
아무 짝에도 쓸 수 없고, 재활용조차 되지 않는 정치폐기물들은 어떻게 버려야 할까요?
“옛다, 너나 가져라”
“아뇨, 저는 눈꼽만치도 필요없습니다. 인정사정 볼 것 없습니다.”
‘여의도’라는 말이 생긴 것에 여러 의견이 있기는 하지만 “모래땅이라서 아무 짝에도 쓸모없으니 너나 가져라”는 데에서 생겨났다는 설도 있습니다.
명근이는 우리 부서에서 말 귀도 못알아 듣는다고 소문이 난 친구였습니다.
저래서 연애는 어떻게 하고 장가는 어떻게 가겠는지 걱정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손발이 안맞으니 사람들은 명근이와 같이 일하는 것을 꺼려할 때도 있었습니다.
부서들마다 “옛다 너나 가져라”는 식으로 명근이를 데려 가라고 떠밀었지만 아무 곳에서도 명근이를 원하는데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명근이가 어떻게 노조간부가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불만이나 의심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왜 이런 기적같은 일이 벌어졌을까요?
내노라하는 ‘뺀질이’들이 명근이만 보면 그저 양같이 고분고분하게 되었다는 전설의 주인공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노조안에서는 “불법파견은 투쟁으로 잡고, 뺀질이는 명근이가 잡는다”는 말이 나돌기까지 했습니다.
발단은 이러했습니다.
노조 창립기념 체육대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명근이는 배구와 족구팀에 부서대표로 출전하였는데 차마 말릴 수도 없었고 걱정만 태산같았습니다.
아뿔싸, 불길한 예감은 왜 그리 잘 들어 맞는지 명근이는 누구 편인지 도저히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빛나는 헛발질’이었습니다. 결국 명근이는 배구팀에서도 족구팀에서도 권고퇴출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명근이는 이에 굴하지 않고 잔심부름하는 쪽으로 인생의 살길을 찾았고, 젓가락 챙기기에서부터 쓰레기 치우기까지 묵묵히 허드렛일을 다 했습니다. 아마도 명근이가 없었으면 쓰레기 휘날리는 체육대회가 될 뻔 했습니다.
몇일이 지나 명근이는 체육대회가 끝나기도 전에 회사밖에서 술을 마신 형님들을 모시고 따로 술자리를 만들었습니다.
“형님들, 앞에서 이리저리 뛰어 다니는 노조간부들의 고충에 대해서 한번이라도 생각해 보셨습니까? 회사 임원들이 형님들을 보았더라면 뭐라고 손가락질을 했겠습니까. 체육대회는 노조의 단결을 위한 시간이고 우리노조의 규율을 과시하는 자리 아닌가요? 형님들이 이러니 관리자들이 형님들을 물로 보고 술이나 사주면서 회유하는거 아닙니까!”
명근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형님들은 “야, 우리 노조에 젊은 꼰대 탄생하셨네”라며 비아냥 거렸지만 명근이는 좀처럼 물러날 기색이 전혀 없었습니다.
명근이는 다른 간부들이 꺼내기 주저했던 말까지 내놓았습니다.
“지난 파업때 형님들은 점심집회나 퇴근집회에도 잘 참석하지 않으셨고, 간부들이 부탁할 때도 이런저런 사정을 얘기하며 적극적으로 투쟁하지 않으셨잖습니까? 형님들이 모범을 보이시면 우리 노조가 몇배나 더 단결이 잘 되리란건 누구보다 형님들이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조합원 형님들은 옳은 소리만 골라서 하는 명근이에게 곤혹을 치루며 반감도 생겼지만 노조를 위해 묵묵히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명근이가 한편으로는 고맙고 대견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명근이가 이런 저런 제안을 하면 형님들은 허심하게 마음을 잘 합쳐 주게 되었습니다.
한번은 노총각 형님이 일하다가 손가락을 다치는 산재로 2주간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형님도 사실 뺀질이로 소문나서 인심을 많이 잃은 조합원이었습니다.
당연히 문병가는 조합원들도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명근이는 누가 뭐라하든 저녁마다 거의 매일 문병가서 수건에 물을 적셔 등도 닦아 주고 입맛에 맞는 반찬도 시장에서 사다 주었습니다.
명근이는 갈 때마다 노조 조직국장님이 각별히 부탁해서 제가 오는 것이라는 있지도 않은 말을 곁들였습니다.
노총각 형님은 그 후로 제삿날은 빼먹더라도 노조에서 하는 교육이나 투쟁에 빠짐없이 참가하였고, 년차를 내서 통일선봉대까지 참가할 정도로 멋진 조합원이 되었습니다.
말귀도 못알아 먹는 명근이가 가지고 있는 장점은 사람에 대한 애정어린 관심과 끈기였습니다.
이제 명근이는 모래섬이었던 ‘여의도’와 같은 존재가 아니라 함께 하면 즐거운 우리 노조의 소중한 동지가 되었습니다.
굼뱅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고 합니다.
명근이는 사람마다 갖고 있는 장점이나 잠재력을 믿었고, 노조를 중심으로 살았기 때문에 자신 또한 동지들속에서 빛이 날 수 있었던 거죠.
여행다니기 좋고, 술먹기 좋은 계절입니다.
명근이를 생각하면서 가슴이 훈훈해지는 동지들에 대한 추억을 떠올려 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참 좋을 듯 합니다.
일교차가 심합니다.
언제나 으랏차차 동지들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다음에는 『생각은 보름달처럼 환한데 글을 쓰려니 그믐밤같이 까맣다』 라는 주제로 찾아 뵙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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