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김세창의 으랏차차 : 멋진 일꾼이 멋진 민주주의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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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국민주연합 조회927회 작성일 21-10-01 10:56본문
으랏차차 동지들! 모두 건강하신가요?
20대 대선이 가까워져 오고 있습니다.
뉴스를 보고 있노라면 참으로 개탄스럽고 분노가 치미는 일이 한 둘이 아닙니다.
한국의 기성 보수정치판이라는 건 부정과 비리의 온상, 협잡의 난장판이라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습니다. 도둑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겨도 이 정도로 개판은 아닐 겁니다.
이런 자들이 국회 배지를 달고 국민에게 월급 받으며 온갖 이권과 특혜를 누리며 불법과 탈법을 저지르지만 썩은 정치의 숙주들은 좀비처럼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는 현실에 또 한 번 경악을 금할 수 없습니다.
대통령을 탄핵하는 것보다 국회의원 물갈이하는 게 더 어렵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서로 대통령 후보가 되기 위해 물고 뜯는 광경을 보면서 결국 역사와 정치를 바로 잡자면 노동자 민중 외에는 답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
오늘은 ‘민주주의’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질까 합니다.
먹을 게 없고 일자리가 부족하던 시절에는 “민주주의가 밥을 주냐”는 유행어가 있었습니다.
미국의 비호 아래 쿠데타와 유신독재로 18년 장기집권하다가 비명횡사한 박정희 통치 시절에 저질러진 수많은 비리와 폭정은 새마을운동과 고속도로, 경제재건이라는 명분 아래 미화되었습니다.
박정희에게 민주주의란 오로지 자신의 집권연장을 가로막는 거추장스러운 허례허식에 불과했기 때문에 비상계엄과 긴급조치를 동원해 정권을 유지했습니다. 헌법을 유린하고, 일제의 불법 식민통치에 면죄부를 주고, 원조와 차관을 끌어들여 외세의존경제를 만들고, 온갖 특혜편법으로 재벌을 키워 정경유착하고, 사회를 병영화하여 반공반북체제를 공고화하면서 정치적 반대세력은 정치인이든 노동자든 학생이든 가리지 않고 무참히 짓밟았습니다.
박정희는 “(국민의 상위 1%를 제외한 나머지 99%인)민중은 개돼지로 보고 먹고 살게만 해주면 된다”(나향욱 전 교육부 정책기획관 2016.7.7)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국민들은 먹고 사는 데만 몰두해라. 나는 평생 대통령만 해 먹겠다는 거였죠.
한국장학재단 이사장인 안양옥은 “청년들은 빚이 있어야 파이팅한다”(2016.7.4)는 망발을 늘어 놓았는데 이런 자들은 정치가 뭔지 민주주의가 뭔지 아예 개념조차 없는 망종이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정말 사색이 필요한 대목이 뭐냐 하면 말이죠. 고문과 의문사. 그리고 구속이 판치던 당시에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겠다고 한 것이 정말로 하루 세끼 밥을 해결하려고 했겠냐 이겁니다. ‘인간답게 살아 보자’는 절규를 밥을 달라는 말로 왜곡·훼손하는 관제언론과 어용학자들이 판을 치던 때이니 그럴만도 했습니다.
임진왜란 때 의병과 승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킨 절세의 애국자들이 목탁 대신 칼을 들고 호미 대신 창을 든 이유가 밥을 달라는 이유였겠습니까. 우리의 영웅적이며 통찰력이 높았던 조상 선열들은 나라가 주권을 잃으면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니고 끼니를 때워도 상가집 개신세를 면치 못하고 농사를 지어도 노예살이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분연히 일어섰던 것 아니겠습니까.
열 받다 보니 사설이 좀 길었습니다만 하나 더 말씀드려볼까요.
전두환 신군부세력은 정권탈취과정에서 무력으로 5.18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당시 존 위컴 주한 미군 사령관으로부터 광주 병력투입을 승인받았는데, 광주학살 진짜 주범인 위컴 사령관은 1980년 8월 8일 뉴욕타임스에 “한국인에게 민주주의는 적합한 체제 아니다. 한국인은 들쥐와도 같아서 누가 지도자가 되어도 따를 것이다.”라고 내뱉었습니다.
이로부터 7년이 지나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국민들은 최루탄과 군화발을 뚫고 87범국민항쟁으로 일어 섰습니다.
66년생 이한열 열사는 학생으로, 66년생 이석규 열사는 노동자로 민주화 투쟁에서 산화하였습니다.
다시 몇 년이 흘러 문민정부로 등장한 김영삼 정부(1993-1998)는 ‘우루과이라운드’협정으로 개방화 세계화의 포문을 열고, 1996년 12월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면서 자본투자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였고 한국경제를 무장 해제시켜 해외자본과 국제금융 수탈체제에 편입시키고 말았습니다.
자본에 대한 규제 완화, 변형근로시간제 및 정리해고제의 입법화, 근로자 파견제, 파업요건의 강화, '무노동 무임금' 법제화,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 등을 포함한 신노사관계와 노동법 개정은 노동자에 대한 자본의 전반적 공격이었습니다. 국제경쟁력 강화라는 미명아래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융단폭격이 전면화된 것입니다. 결국 김영삼 대통령은 반노동자적이고 예속적인 세계화로 국가 부도 사태를 낳았고 경제 식민통치기구인 IMF의 강요 아래 전면적 구조조정을 받아들여 매판(외세의 정치·경제적 착취의 안내자, 부역자라는 의미)의 역할을 톡톡히 하였습니다.
노동시장 유연화나 개방화를 민주주의의 척도라고 말하는 것은 제국주의 세력이나 강대국 논리일 뿐이고 노동자 민중에 대한 자본의 억압과 수탈의 방편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국, ‘민주주의’라는 것은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사회 전반 분야에 작동하는데 민중의 삶과 권리를 억압하는 방향으로 가게 되면 말로 할 수 없는 참담한 피해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노동자의 민주주의는 무엇인가?
위에서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노동자의 민주주의는 동지애와 신뢰, 단결과 투쟁으로 자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크든 작든 투쟁에 들어가면 역할이 없는 조합원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역할이란 게 알아서 하는 게 아니라 민주주의가 살아 있는 조직 속에서 나오게 됩니다. 우리가 외치는 구호 하나에도 삶의 애환과 절박함이 배어 있고, 투쟁이라는 게 아무 때나 시작해서 힘들면 끝내는 게 아닌 것입니다. 하나의 투쟁을 넘어서면 또 하나의 투쟁이 생깁니다. 이런 무수한 과정을 거쳐 노동조합은 노동자의 투쟁대오로, 새세상을 만들어 가는 투쟁의 기관차로 다듬어 집니다.
노동자가 법을 만드는 주체가 되었다면 불법파견과 비정규직 철폐는 물론 재벌구조는 이미 해체되었을 것이고, 주택, 교육, 의료, 세금, 금융 등 전반 분야에서 더 이상 양극화와 차별을 허용하지 않고, 돈 놓고 돈 먹는 투기경제를 타파하기 위한 노력과 투쟁이 왕성하게 벌어졌을 것입니다.
‘내부자들’이라는 영화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유력신문사의 논설위원 이강희(백윤식)가 비자금 문제로 궁지에 몰린 기업 총수 오 회장에게 “어차피 대중들은 개돼지입니다. 뭐하러 개돼지한테 신경을 쓰고 그러십니까. 적당히 짖어대다 알아서 조용해 질겁니다”라고 무마시키는 장면입니다.
계급사회에서 수구 기득권세력들이 정치를 장악한 사회에서 국민에 대한 지배세력들의 생각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장면입니다.
결과적으로 노동자들이 정치의 주인으로 정권의 주인으로 될 때 비로소 민주주의는 비로소 성숙되며 완성단계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할 것입니다.
노동자의 민주주의는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잡고, 2%의 소수특권이 아닌 대다수의 공정과 정의를 위한 유일한 해법이라 하겠습니다.
멋진 일꾼은 멋진 민주주의를 만든다.
노동조합에서 민주주의의 역할이란, 활동과 투쟁에서 조합원을 주인으로 세움으로써 압도적 대다수의 힘으로 투쟁의 압도적인 힘을 발휘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을 운동이론에서는 ‘대중노선’이라고 말합니다.
말 잘하고 똑똑한 몇 사람의 머리로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라 혼연일체가 되는 것, 같이 만들고 함께 하는 것이 노동조합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전투에서는 정찰, 정탐이 승패를 결과를 좌우합니다.
노조 활동에서는 일반적으로 조사 활동이나 정책업무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운동경기에서 상대의 전력과 장단점 등을 연구하고 경기전략을 짜는 것과 같습니다.
상철이가 그저 오지랖이 넓고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라서 조직부장이 되었다고 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입사한 지 2년 차에 파업이란 걸 처음 경험해 봤는데 부서 축소와 권고사직이라는 통지문을 회사 정문 게시판에서 보고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되지 않겠나’라는 불안감 때문에 파업에 찬성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파업에 참가해 보니까 상철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앉아서 자리 지키는 것과 투쟁가요 배우고 구호 외치는 것 외에는 별로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조합원들이 지겨워하는 게 당연해졌습니다. 회사 안에만 있으니 먹는 것도 씻는 것도 점점 불편해졌습니다. 분반 토론이라는 걸 하기는 하는데 형식적이다 싶을 정도로 회사 동향이나 주고받고 끝까지 투쟁하자는 얘기로 마무리하는 식이었습니다.
상철이는 회사 안 농성 텐트에서 입사 동기들과 마주 앉아서 서로 비슷한 경험담을 나누다가 이왕 할 거 좀 신나고 재미있게 해보자는 얘기가 나왔고, 노래자랑대회나 반별 소규모 운동시합이나 퀴즈대회 같은 것을 건의해 보자고 하게 되었고, 하루 이틀 지나 투쟁 분위기는 눈에 띄게 활기차게 되었습니다. 내친김에 상철이는 외출외박, 환자 점검, 식단 짜기, 경조사 점검 등의 역할을 자처하게 되었습니다. 상철이가 얼마나 부지런하게 조합원들을 만나며 파업을 승리로 이끌게 했는지는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상철이가 조직부장이 된 것은 조합원들이 준 훈장이었습니다.
상철이가 가장 많이 나눈 얘기는 “파업은 지도부가 알아서 하는 게 아니다”, “조합원들은 거수기가 아니다”, “노동조합의 주인은 조합원이다”라는 말이었습니다. 파업에 승리하기 위해 ‘1 조합원 1 역할 하기’는 상철이가 제안했던 첫 번째 모범사례였습니다. 상철이는 전체 집행일꾼 회의에서 이런 것도 제안했습니다. “대안을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조합원들에게 발언권을 제한하지 말아야 한다. 사회자가 강의도 하고 지적질도 하고 다른 사람 발언에 대해 평가도 하면 회의가 산으로 가고 바다로 가고 결국 조합원들은 관객이 되고 만다. 사회자는 조합원들이 토론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이끄는 것이다.” 그다음 날 상급연맹에서 분반 회의 진행자들에 대한 집단교육이 즉각 실시되었고, 조합원들은 지긋지긋하던 분반 회의가 이제는 은근히 기다려진다고 할 정도로 분위기기가 좋아졌습니다.
파업승리보고대회에서 상철이가 받은 모범상장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위 동지는 파업은 노동자의 학교라는 진리를 솔선수범하여 실천하여.... 조합원이 투쟁의 주인으로 되는데 기여하였기에...”
민주주의는 힘을 모으는 과정이자 방법입니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모두가 주인으로, 세상의 중심으로 되기 위한 것입니다.
변하지 않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힘은 노동자의 민주주의입니다.
노동자 민중이 가장 큰 힘을 낼 수 있는 민주주의를 꽃피워 나갑시다.
으랏차차 동지들의 건강과 건승을 기원합니다.
다음에는 ‘아전인수’라는 주제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