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명숙의 인권산책 : 달을 가리는 손가락이 차별을 지운다 - 서울교통공사의 사회적 약자와의 여론전 문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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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국민주연합 조회832회 작성일 22-03-22 09:48본문
달을 보라고 손가락을 가리켰는데 손가락만 보다가 정작 달을 보지 못한다는 말(견월망지)이 있다.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진리를 배우지 못하는 사람의 어리석음을 일컫는 이야기로 대승불교 경전에 나오는 이야기라고 한다. 최근 인권의제를 둘러싸고 펼쳐지는 양상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문제는 단지 사람들이 어리석어서 발생하는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힘이 있는 누군가가 달이 아니라 손가락을 자꾸 보도록 여론을 몰고 가기 때문이다. 지난 3월 17일 YTN은 서울교통공사가 장애인들의 시위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도록 여론전을 형성하기 위한 문건의 존재에 대해 보도했다. 문건에는 장애인 지하철 시위에 대한 공사의 대응 지침이 담겨 있었다. 사회적인 비판이 커지자 공사 측은 공식방침이 아니라 직원 개인의 의견일 뿐이라며 책임회피성 사과를 발표했다.
갈라치기, 차별의 시작
<사회적 약자와의 여론전 맞서기>라는 제목에서 보이듯,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나쁜 여론을 만들기 위한 방침이 들어있다. 문건에는 “공사는 실질적 약자, 실점방지&디테일 발굴 중요…여론전 승부는 디테일이 가른다”며 자신들을 약자로 규정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인식도 없으며 ‘사회적 약자와 대다수 시민들’을 갈라치기 하고 있다. 공존을 위한 사회와 국가책임 등을 위한 내용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들을 나누려 하고 있다.
차별이 사회적으로 권력과 자원이 없는 사람들, 즉 사회적 소수자들을 분리하고 배제하고 차등 대우하는 것이라 할 때, 분리-갈라치기는 차별의 첫발이다. 인간사회는 다양한 정체성의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다. 다수의 사람들을 위주로 사회 제도나 공간이 설계되었기 때문에 차별과 불평등이 발생한다. 사회가 불평등하기에 어떤 사람들은 불리한 위치에 자신의 권리를 누리지 못하며 살게 된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모두가 권리를 골고루 누릴 수 있도록 제도를 바꾸고 공간과 관행을 바꾸는 일이다.
그런데 오히려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이해관계가 다르다며 나누고 대립시키고 있다. 차별이다. 심지어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가를 뿐 아니라 장애인은 시민이 아니라고 상정한다. 마치 이해관계가 대립하는 것처럼 느끼도록 만들 것이 아니라 ‘공존이 우리의 이해관계’라고 제시하고 설명하는 일이 마땅하다. 당장은 지하철 운행 시간이 길어져 불편할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함께 살기-공존이라는 공동의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고 설득할 수 있다. 장애인용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비장애인인 아동이나 노인이나 아픈 사람들도 편하게 되었던 일을 생각해보라. 그러나 이는 말하지 않는다.
언더도그마? 구조적 차별을 부인하는 것과 같아
문건에서는 갈라치기라는 차별을 하는 것도 모자라서 개념을 뒤집고 있다. <언더도그마와의 싸움>이라며 사회적 소수자들을 적대시하고 있다. 문건에는 “노숙인, 성소수자를 포함한 사회적 약자들의 대사회투쟁”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지는 다루고 있다. 모든 사회적 소수자는 서울교통공사, 공공기관의 적이라고 설정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들은 약자가 아니고 선하지도 않다고 주장하고 있다.
인권활동가들은 ‘언제나 약자인 사람을 상정’하지 않는다. 사안과 맥락별로 차별받는 주체와 차별하는 주체는 달라진다고 말한다. 왜냐면 한 사회의 억압은 하나의 억압체계만이 작동하는 것이 아니어서 때로는 차별의 피해자기도 하지만, 때로는 특권을 누리는 자가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비장애인 여성인 필자는 장애와 관련한 이슈에서는 주류로서의 특권을 누리지만, 성별 관련해서는 여성으로서 차별을 받는 상황에 쉽게 처한다.
그런데 언더도그마란 용어는 마치 항상 약자이거나 항상 강자인 경우가 많은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언더도그마는 미국의 보수 유권자 결사체 ‘티파티’ 논객인 프렐이 만들어낸 용어라고 한다. 언더독(underdog)과 도그마(dogma)를 합친 단어로 ‘힘의 차이만으로 무조건 약자는 선하고 강자는 악하다고 인식하는 현상’을 지칭한다. 한국의 역차별이란 단어와 닮아 있다. 현실을 극단적으로 납작하게 만들어 사실관계와 차별의 구조를 가리는 효과를 낳는다.
더구나 장애인이동권 투쟁에서 차별의 제도나 공간을 개선할 의무가 있는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를 상대로 한 투쟁에서 의무주체인 정부나 공공기관이 약자일 수가 없다. 그런데도 “실질적 약자는 공사”라고 주장한다. 대다수 비장애인 위주로 지하철이 설계되어 장애인은 자유롭게 이동할 자유와 권리가 빼앗겼는데 그것은 도그마일 뿐이라고 강변하는 것이다. 이러한 프레임은 차별에 대한 인식과 차별의 구조를 흩트려 놓아 무엇이 차별인지 헷갈리게 만든다. 구조적 차별이 없다고 말한 국민의 힘 대통령 당선자 윤석열의 논리구조와 닮았다.
또한 서울교통공사의 문건은 장애인차별을 알리는 장애인들로 인한 일시적 불편만을 과대포장 할 뿐 아니라 왜곡한다. 사람들은 장애인차별에 대해 관심을 갖기보다 장애인들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 불편함을 겪은 감정만을 떠올리게 된다. 결국 사람들은 장애인차별의 현실이란 달을 보지 못하게 된다. 사람들이 자신이 사는 사회의 현실에 관심을 갖고 우리 옆의 이웃이 겪는 차별에 대해 알게 되는 걸 가로막는다. 나아가 사회적 소수자나 약자에 대한 적대감을 키운다. 서울교통공사처럼 달이 아니라 손가락만 보게 만드는 이들을 우리가 경계해야 한다.
광고조차 거부하는 공공기관, 이제는 바뀌어야
서울교통공사가 사회적 소수자들을 배제하고 적대시한 것은 장애인만이 아니다. 지하철공사는 작년 트랜스젠더라고 육군이 강제전역(해고)시킨 고 변희수 하사와 관련된 지하철 광고를 거부했고, 세월호 참사 추모와 관련한 광고도 거부한 적이 있다. 겉으로는 정치적 중립이라고 말했지만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것도 아닌데 추모하는 광고까지 막는 것은 표현의 자유를 막는 일이다.
게다가 노숙인들은 지하철 화장실을 쓰지 말라는 안내판을 붙이기도 했다. 공공화장실임에도 노숙인은 사용하지 말라는 것은 명백한 차별이지만 이에 대한 반성도 없이 언더도그마, 운운하고 있다니!
이제라도 서울교통공사가 할 일은 공공기관답게 공공성과 공익성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지하철, 즉 공익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사회적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차단하는 광고 거부가 아니라 적어도 공공기관에서는 소수자들의 목소리가 들릴 수 있도록 조치해야 한다. 그러할 때 누구나 사회의 다양한 존재에 대해 배우고 익히는 여론이 형성되고 그 힘으로 차별의 구조를 바꿀 수 있다.
‘사회적 약자와 적대하는 여론전’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와 함께 하는 여론에 힘 싣기’를 하는 날이 빨리 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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