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명숙의 인권산책 : 이름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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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국민주연합 조회652회 작성일 21-06-18 16:33본문
<특별기획> 명숙의 인권산책 : 이름에 대하여
회의하러 간 자리에서 본 과일은 처음 본 것이었다. 포도인데도 동그란 방울이 아니라 방울을 두세 개 겹쳐놓은 길쭉한 것이었다. 그냥 검정이라기보다는 보랏빛을 조금 먹은 것 같은, 오디 같은 색의 포도였다. 포장지를 보니 블랙사파이어, 호주산 포도다. 처음 본 사람들은 신기해서 “이거 포도 맞아?”, “꼭 가지 같네, 뭔지 찾아보자.” 한명이 핸드폰으로 인터넷 검색을 한다. 블랙사파이어의 이름은 가지포도란다. 가지 같다고 말한 사람은 신이 나고 그 옆에 있는 사람은 가지버섯도 있는데, 등등의 이야기를 나누며 웃었다.
이처럼 사물이나 동물, 직업의 이름을 지을 때는 그 특성이나 외양을 고려해서 짓는다. 그러다보니 이름을 듣고 그 사물의 특징이 떠오른다. ‘붉은부리갈매기’, ‘긴꼬리딱새’ 등의 이름을 들으면 대략의 생김새를 상상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청소원에서 환경미화원으로 바꾼다고 달라지나
그런데 어떤 이름은 특성을 지우려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게 청소노동이다. 청소노동이라는 직업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바꾸기 위해 직업명을 바꾸었다. 1988년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청소담당 상시고용노동자들인 청소원의 명칭을 환경미화원으로 바꾸었다. 최근 충북 충주시는 환경미화원들의 사기진작과 자긍심을 높이고자 호칭을 '환경관리원'으로 바꾸기로 했다고 한다.
청소노동에 대해 사람들의 편견을 바꾸기 위해 필요한 것이 과연 직업명 변경일까? 이런 식의 변경 사유는 우리를 씁쓸하게 한다. 청소노동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청소노동자들의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 때문이 아닌가. 이름을 바꾸는 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이다.
게다가 88년 올림픽을 앞두고 직업명을 바꾼 것은 정말 청소노동자들을 위한 것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당시 수많은 빈민촌의 철거에서 보이듯, 겉으로 그럴싸하게 보이고 싶어서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보이지 않게 했다. 같은 맥락에서 청소노동을 하찮게 여긴 고위공직자들의 편견이 직업명을 바꾼 것이다. 청소노동을 청소노동이라 부르는 것이 왜 부끄러운 일인가. 청소노동을 하찮게 보는 고위공직자들의 시선이 문제가 아닌가. 오히려 필요한 것은 존중과 존중에 걸맞는 처우개선이다.
장애인을 장애인이라고 부르지 마라고?
얼마 전에 장애인운동가 박경석 씨는 주변에 사회복지학을 연구하는 사람들로부터 이름에 관한 황당한 이야기를 들었다.
“장애인이라 부르지 말고 좋은 말로 부르는 것은 어때요?”
“좋은 말, 어떤 말요?”
“너무 장애인만 이야기하니 정상인, 아니 일반인들이 다가가기 힘들잖아요.”
장애인이라는 말이 좋지 않다거나 비장애인의 시선에서 하는 말이 아닌가. 게다가 아직도 장애인이 우리 사회에서 비주류임에도 ‘장애인만 이야기한다니?“ 이는 결국 사회적 소수자인 장애인의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는 말일 뿐이다.
장애인차별의 현실을 바꾸기보다 장애인이란 이름을 바꾸어 장애인의 존재 자체도 비가시화하겠다는 발상이야말로 차별적이다. 이름을 그럴싸하게 다른 이름으로 바꾸어 착취의 현실을 가리고 존중하는 것인양 은폐하려는 청소노동자의 처지와 비슷하다. 이름에 대한 접근이 주체의 삶의 조건 개선과 관련 없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철저히 타자의 시선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인권적인 접근은 아니다.
이렇게 이름 짓기는 여러 권력관계와 정책의 본질을 드러내거나 숨기기 위한 매개가 된다. 이른바 명명의 정치학이 작동된다. 사회학자이자 운동가인 레베카 솔닛이 “명명은 해방의 첫 단계다.”라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병신이나 바보에서 장애자로, 장애자에서 장애인으로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투쟁이 있었던가. 신라대에서 청소노동자가 집단해고 당하고, 최근에서야 투쟁을 마무리한 LG트윈타워 청소노동자들의 집단해고 등 청소노동자들은 여전히 저임금과 해고에 시달린다. 이름을 바꾸는 것으로 자기 일을 당한 것인양 생색내기는 그만하고, 청소노동자의 처우를 개선하라! 청소노동자의 이름으로 말하노니, 일에 대한 존중을 국가와 기업은 지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