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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쉽게 읽는 맑스주의 1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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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국민주연합 조회155회 작성일 26-02-28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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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쉽게 읽는 맑스주의] 1강




죽은 나뭇가지를 줍는 것이 절도라는 산림 소유자들에 맞서 

가난한 민중의 권리를 강력 옹호하다





전국노동자정치협회 편집위원 백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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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시절 맑스의 모습



첫 번째 강연은 맑스주의 일반을 둘러싼 논쟁점과 맑스가 집필활동을 본격 시작한 청년 시절의 대표 저작을 중심으로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왜곡과 궤변의 맑스주의가 아닌 쉽고도 정통한 맑스주의 해설이라고 선전이 돼 있던데 어깨가 무겁습니다.


맑스주의는 여전히 인류의 지적 보고이고 진리입니다. 

과거 맑스주의 초기에는 이에 대한 직접적인 반대자들이 많았는데 맑스주의의 과학성과 권위가 확고하게 확립된 이후로는 맑스주의를 참칭하며 맑스주의를 왜곡하는 흐름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맑스주의를 참칭하며 맑스주의를 부정하는 흐름들은 크게 보아 그 방식이 우선 현실 사회주의를 중상비방하여 부정하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현실사회주의를 중상비방하기 위해 소련사회주의의 실질적 건설자이자 파시즘을 격퇴한 지도자인 스탈린을 독재자, 살인마로 비난하고 그 사상을 정치적으로 왜곡합니다. 그리고 스탈린주의를 낳은 배후에 레닌주의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레닌주의 뒤에는 엥겔스의 잘못된 철학이 소련사회주의를 잘못된 방향으로 만드는데 영향을 주었다고 하여 맑스와 엥겔스를 분리합니다.


자, 이제 남은 것은 맑스입니다. 이제 홀로 남은 맑스는 온전하게  인식이 될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은 맑스주의를 초기 맑스와 후기 맑스 또는 청년 맑스와 청년 이후 맑스로 나눕니다. 

이들은 후기 맑스는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독재를 강조한 맑스주의고 소외와 휴머니즘을 말한 초기 맑스에서 맑스주의의 원형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은《경제학철학수고》(줄여서 경철수고)를 그 예로 듭니다. 맑스주의의 바탕에 인간존중 사상이 깔려 있고 맑스주의가 노동해방을 지향하고 궁극적으로 계급이 철폐되면 인간해방으로 나아가지만 그럼에도 인간해방의 조건은 노동자 민중의 적대자들과 싸우는 것입니다.


맑스주의는 초기 인류애를 강조하면서 급진민주주의 면모를 가졌지만 이후 변증법적 유물론자로 발전한 다음부터는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성과 계급투쟁을 강조하게 됐습니다.

선언의 기초가 된 엥겔스의 《공산주의의 원리》에서는 모든 인류의 형제적 단결을 외쳤지만 《공산당선언》부터는 프롤레타리아의 국제적 단결을 외쳤습니다.


성숙한 맑스주의, 변증법적 유물론자로서의 맑스주의의 출발은 1845년《독일이데올로기》와 1847년 푸르동의 빈곤의 철학에 반대해 쓰인 《철학의 빈곤》과 1848년《공산당선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면 청년 맑스와 성숙한 맑스주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신좌파는 전자를 강조합니다. 맑스의 초기 저작 중 하나인 《경제학철학수고》를 들면서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이야기하는 후기 맑스에 비해 휴머니즘과 소외를 말하는 전기 맑스가 맑스주의의 참모습이라고 강조합니다. 소련에서 시작한 현실 사회주의가 레닌과 스탈린부터 맑스의 본연의 휴머니즘을 내다버렸다고 주장합니다.


 "‘마르크스주의’를 마르크스 자신으로부터 떼어내는 방식으로 마르크스의 의미를 재해석하려는 경향이 엿보인다. ‘현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두드러지는 흐름이다. 책마다 그 결은 다르지만, 영국의 정치사상사가인 개러스 스테드먼 존스가 쓴 마르크스 평전 <카를 마르크스-위대함과 환상 사이>(아르테), 프랑스 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의 <마르크스의 철학>(오월의봄), 16개 열쇳말로 마르크스를 조명한 토머스 스타인펠트의 에세이 <마르크스에 관한 모든 것>(살림) 등이 대체로 이런 흐름 위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최원형 기자, ”신화도, 유령도 아닌 200살 마르크스“, 한겨레, 2018-05-04).



 "가장 최근인 2016년 나온 평전 <카를 마르크스>는 <마르크스 전기>와 여러모로 대척점에 위치한다. 경제학자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이 옮긴 이 책은 ‘위대함과 환상 사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데, 마르크스에게 덧씌워진 ‘환상’을 걷어내야 19세기 정치사상사 속 마르크스의 ‘위대함’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이를 위해 지은이는 마르크스 자신을 ‘마르크스주의’로부터 떼어놓을 뿐 아니라, 그의 사상적 동반인 프리드리히 엥겔스, 더 나아가 마르크스의 최대 저작인 <자본론> 및 정치경제학으로부터도 떼어놓으려 시도한다. 거칠게 옮기자면, 마르크스는 독일 관념론의 영향을 받은 철학적 사변으로부터 노동, 소외 개념 등 자기 이론의 주된 틀거리를 도출해내긴 했으나 이를 정치경제학적으로 증명하는 데에는 실패했다는 것이 지은이의 주된 논지다."(한겨레, 같은 기사).



맑스주의를 맑스 자신으로부터 떼어놓는 방식으로 맑스를 재해석한다는 이들의 사고야말로 참으로 기이하지 않습니까? 

맑스주의가 맑스의 두뇌로부터 나온 사상이 아니란 말인가요?

맑스와 엥겔스는 《신성가족》부터 《독일이데올로기》, 《반듀링론》에 이르기까지 공동으로 저술했습니다. 심지어 《자본론》도 맑스의 유언집행인으로서 맑스의 미완성 초고를 엥겔스가 2권, 3권을 정리함으로써 공동저작에 가깝습니다. 각자의 저술에 대해 서로 의견을 구하고 소통했습니다. 이 둘은 역사를 통털어도 흔치 않는 평생 지적ㆍ정치적 동반자였습니다. 그런데 양자를 떼어놓는다니요? 더욱이 맑스를 맑스주의의 최고의 업적인 《자본론》으로부터도 떼어놓는다니요? 《자본론》이 맑스에게 "덧씌워진 ‘환상’"이라니요? 《자본론》은 맑스 자신의 저작을 넘어 인류사 최대의 지적 성취이고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본질을 밝히는 최고의 이론서입니다.

이쯤되면 이들이 단지 부정직한 것을 넘어 맑스주의의 정수를 제거하여 맑스주의의 혁명적 사상을 해체하려는 음험한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반면 알튀세르는 이러한 흐름에 반대하여 싸웁니다. 그러나 인식론적 단절을 주장하며 전기 맑스와 후기 맑스가 대립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전자와 후자는 같지도 않지만 일방 대립하지도 않습니다. 전자의 기초 위에서 전자를 지양하면서 후자가 변증법적 발전했습니다.

T. I. 오이저만이 《맑스주의 철학성립사》에서 입증했던 것처럼, 맑스주의의 성립은 “역사적 · 논리적 연속성을 함축하는 것”인데, 이는 “결과적으로 맑스주의 철학의 형성은 19세기 초반의 가장 탁월한 철학적 · 경제적 사회주의 이론들의 직접적이고도 즉각적인 연속인 동시에 그것들의 부정이며, 그 교의의 형성에 내재한 특수한 모순의 해결이다.”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연속이자 동시에 부정이라는 변증법적 사고가 없으면, 맑스주의 사상의 발전사를 왜곡하고 급기야는 맑스주의를 왜곡하고 세상을 변화ㆍ변혁하는 진보사상이 아니라 반동사상으로 타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 맑스주의를 내건 맑스주의의 수정자들의 사상은 본질적으로 반공주의이고 부르주아와 제국주의에 봉사합니다.



 "청년 헤겔학파의 ‘비판적 비판’은 아도르노의 ‘부정의 변증법’과 기타 프랑크푸르트학파에 의해 계승되고 있으며, 그들의 이론적 구조물은 흔히 ‘네오맑스주의’라는 이름으로 자본주의 사회에 만연되어 있다. 특히 그것의 독일판인 실존주의는 낭만적 반자본주의의 부활에 다름아니며,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그것은 반공주의의 일종임을 곧 알 수 있다."(T. I. 오이저만,《맑스주의 철학성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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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대표 인물인 막스 호르크하이머와 아드르노 같은 이들은 파시즘도 반대하고 소비에트도 반대한다는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스탈린이 지도자로 있는 소련(소비에트연방)은 인민 2,700만이 희생당하는 고초를 겪으면서도 히틀러 파시스트를 물리쳤습니다. 이에 반해 파시즘은 독점자본주의의 가장 극렬한 테러독재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이것을 은폐하면서 양비론으로 일관했습니다. 이들은 집단주의와 전체주의를 뒤섞어서 소련과 현실사회주의를 전체주의라고 맹공을 가했습니다.


현대 신좌파 다원주의자들이 맑스주의를 전면 부정하지는 않고 맑스주의의 언저리에 있는 체하지만 실제는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그것은 반공주의의 일종"인 것입니다.

맑스주의를 표방하지만 현학적이고 온건한 노선을 표방하는 강단 맑스주의자들도 맑스주의를 자처하지만 실제로는 사회주의 건설의 현실성에 무지하고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부정적이고 심지어 적대적입니다.


이들은 맑스 《자본론》에서의 한 문장인 "자유인들의 연합체"를 인용하며 맑스주의가 중앙집중주의와 민주집중제를 부정하는 것으로 왜곡합니다. 그리하여 현실사회주의를 부정합니다. 이들은 자본주의의 무정부성, 무계획성에 맞서 노동자들의 생산에 대한 집단적 운영, 그 정점에 있는 사회주의 국유화를 부정합니다. 그러면서  아래로부터, 민주적, 참여적, 분산적, 자율적이라는 미사여구를 남발하며 무정부주의적 주장을 합니다.

자유인들의 연합체는 생산을 집중하지 않고 조정하지 않는단 말인가요? 

이들은 국가일반을 부정하는 무정부주의의 입장에서 사회주의 국가도 관료기구라며 부정하는 것입니다. 


맑스는 사적소유 철폐와 국가 수중으로 생산의 집중이 공산주의의 요체라 밝혔습니다. "대공업에서 권위를 폐지하기를 바라는 것은 산업 자체를 폐지하고자 하는 것이다"라며 맑스와 엥겔스는 권위를 강조하였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이런 맑스의 사상을 왜곡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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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주의는 초심자에게 어렵습니다. 

맑스주의 이론적 부분이 어려운 건 사실입니다만 그것보다는 맑스주의가 과학을 표방하고 자본주의의 일반적 교육에서 말하지 않는 역사적 진실을 말하고 고정된 편견에 맞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맑스주의는 민중의 투쟁을 이론적으로 대변하기 때문에 구체적이고 명료하고 명쾌합니다.

그러나 현대의 강단 맑스주의, 신좌파적 이론은 민중의 삶과 투쟁과 분리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자기들 사상 앞에 '민중 출입금지'라는 장벽을 쌓아 놓고 난해한 지적향연을 펼칩니다. 그 내용도 엄밀하게 보면 과학성이 없이 추상적입니다. 오죽하면 페리 앤더슨 같은 이는《서구 마르크스주의 읽기》에서 서유럽 맑스주의자들의 특성이 밀교주의(密敎主義)라고까지 표현하기조차 합니다.


맑스주의는 생활과 유리된 대중의 실천투쟁으로부터 유리된 모든 사변적 이론을 배격합니다. 맑스주의는 기존 사회에 대한 이론적 비판을 실천, 정치, 현실투쟁과 결합시킬 것을 요구합니다.

맑스주의는 과학성과 함께 피착취 계급의 당파성을 옹호합니다. 레닌은 소책자 《칼 맑스》에서 "그는 현존하는 모든 것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과 특히 무기의 비판을 선포하며  대중과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호소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맑스주의는 전투적 맑스주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맑스주의를 온전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문장 자체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역사적 배경 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현실에 실천적으로 적용해야 합니다. 맑스주의는 교조주의가 아니라 실사구시로 접근해야 합니다.


민중에 복무하는 사상가이자 혁명가의 면모는 맑스의 고등학교 졸업논문에서 이미 맹아적으로 나타납니다.



 “만일 사람이 자기 자신만을 위해 활동한다면, 그는 유명한 학자나 위대한 현자 또는 탁월한 문학가일 수는 있으나 결코 완전한 인간.

진정으로 위대한 인간일 수는 없다...

온 힘을 다해 인류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을 택한다면...우리는 초라하고 제한된, 이기적인 기쁨을 향유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의 행복은 수백만 명의 행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17세 맑스, 직업 선택에 대한 한 젊은이의 고찰)



맑스는 민중을 위해 투쟁하는 전투적 맑스주의자로서의 면모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나는 결코 조용히 물리칠 수 없다.

내 영혼을 강렬하게 사로잡는 것을,

나는 결코 고요히 안온하게 머물러 있을 수 없다.

하여 나는 쉼없이 돌진한다.

주변 사람들의 냉혹한 궁핍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야 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가장 우아하고 절제된 이미지로 표현하는 미적 감각을 쉽게 잃어버리기 마련입니다. 어쩌면 그는 고향에서 결코 잊을 수 없었던 고통의 민중적 언어로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을 한동안 자신의 정치적 의무로 여길지도 모릅니다."



맑스는 1842년 5월부터 라인 신문 편집자가 되고 10월 15일에는 라인신문 편집장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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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2년 맑스가 싸운 검열훈령은 2026년 한국의 국가보안법이었다



맑스의 첫번째 전투는 프로이센 당국의 검열과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1842년 맑스는 라인신문에서 '최근의 프로이센 검열 훈령에 대한 논평'이라는 제목으로 프로이센 당국의 검열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였습니다. 맑스는 생각을 처벌하는 검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했습니다.



 "내가 나를 표현하는 한에서만, 즉 현실의 영역에 들어서는 한에서만 나는 입법자의 영역에 들어선다. 나의 행동으로서가 아니고서는 나는 법률에 대해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나는 법률의 어떠한 대상도 아니다. 나의 행동은 법률이 나를 구속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행동은 그것 때문에 내가 존재의 법, 즉 현실의 법을 요구하는 유일한 것이며, 따라서 그것에 의해 내가 현실적인 법에도 귀속하게 되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향단속법은 내가 행한 것만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 이외에 내가 생각한 것도 처벌한다. 따라서 그 법률은 공민의 명예에 대한 모욕이며 나의 존재를 고통스럽게 하는 법률이다...

나의 존재는 혐의 대상이고, 나의 가장 내적인 본질, 즉 나의 개체성은  나쁜 개체성으로 간주되며, 나는 이러한 생각 때문에 처벌된다. 그 법률은 내가 행하는 불법 때문에 나를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행하지 않은 불법 때문에 나를 처벌한다. 나는 실제로 나의 행위가 위법적이지 않다는 이유 때문에 처벌 받는다. 왜냐하면 나의 행위가 위법적이지 않음으로써만 나는 온화하고 신의를 가진 재판관으로 하여금, 백일 하에 드러나지 않게 감춰질 정도로 영리한 나의 나쁜 신념을 평가하도록 강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념단속법은 결코 공민을 위한 국가의 법률이 아니며, 다른 당파에 대항하는 한 당파의 법률이다. 경향단속법은 법률 앞에서 공민의 평등함을 폐기한다. 경향단속법은 합일의 법률이 아니라 분리의 법률이며, 분리의 법률이란 죄다 반동적이다. 그것은 결코 법률이 아니라 하나의 특권이다...

인륜적 국가는 비록 그 성원들이 비록 한 국가기관에 대한 또는 정부에 대한 반대에 돌입한다고 해도 그들 속에 국가의 신념이 존재한다고 상정한다. 그러나 하나의 기관이 자신을 국가이성과 국가인륜의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소유자라고 생각하는 사회, 민중과 원리적으로 대립하는 입장에 서고 따라서 자신의 반국가적인 신념을 일반적인 신념, 정상적인 신념으로 간주하는 정부가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도당의 불량한 양심이 경향단속법, 즉 보복의 법률을 고안해 낸다.

그러나 그 법률이 겨냥하는 신념은 오직 정부성원 자신들 속에서만 자리잡고 있는 신념이다. 신념단속법은 무신념에 기초하고 있으며, 국가에 대한 비인륜적이고 물질주의적 견해에 기초하고 있다. 신념단속법은 나쁜 양심의 무분별한 울부짖음이다. 그리고 이러한 종류의 법률은 어떻게 시행될 수 있는가? 법률 자체보다 더 괘씸한 수단, 즉 스파이를 통해서, 또는 모든 문필상의 성향을 혐오스러운 것으로 간주하는 이전의 약정을 통해서이다. 물론 후자의 경우 개인이 어떤 성향에 속하는지 계속 탐색된다.

경향단속법에서 법률적 형식이 내용에 모순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현재 존재하고 있는 정부가 그것 자체인 것, 즉 반국가적인 신념을 비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부는 개개영역에 있어서도 그 법률에 대하여 말하자면 전도된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왜냐하면 정부는 이중의 척도로 측정하기 때문이다. 한 측면을 따르면 불법적인 것이 다른 측면을 따르면 법적인 것으로 된다. 이미 정부의 법률은 정부가 법률로 만든 것과 정반대의 것으로 된다...

검열에 대한 근본치료는 검열을 폐지하는 것일 것이다."(1842년 2월 초부터 2월 10일 사이에 씀, 《마르크스의 초기 저작 (비판과 언론)》,  열음사)



맑스가 1842년 비판한 '프로이센 검열 훈령'을 2026년 한국의 국가보안법으로 바꾸면 놀라울 정도로 일치합니다. 공안당국은 공공의 안녕을 단속명분으로 표방하고 있지만 실은 반민중적 "도당의 불량한 양심"이 독단적ㆍ배타적으로 악법을 제정하여 폭력을 집행하는 것입니다.

"검열 훈령과 마찬가지로 국가보안법은 '내가 행한 것만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 이외에 내가 생각한 것도 처벌합니다. 따라서 그 법률은 공민의 명예에 대한 모욕이며 나의 존재를 고통스럽게 하는 법률"입니다.

공안당국도 차마 말과 글을 행동이라고 우기지는 못할 텐데, 국가보안법은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은 사고의 표현, 즉 글과 말을 처벌합니다. 특히 국가보안법 제7조(찬양ㆍ고무 등)는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은 말과 글을 처벌합니다. 표현의 자유의 억압은 바로 생각을 처벌하는 것입니다. 국가보안법은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은 신념의 표현을 처벌합니다.

그렇다면 국가보안법 피해자들의 말과 글이 아닌 행동에 대해 검토해 보겠습니다. 국가보안법은 4조에서 "교통ㆍ통신, 국가 또는 공공단체가 사용하는 건조물 기타 중요시설을 파괴하거나 사람을 약취ㆍ유인하거나 함선ㆍ항공기ㆍ자동차ㆍ무기 기타 물건을 이동ㆍ취거한 때에는 사형ㆍ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국가보안법 피해자들 중 누가 과연 이런 중대한 폭력테러 행위를 저질렀습니까? 아무도 군용시설이나 교통ㆍ통신을 파괴하거나 사람을 납치ㆍ유인, 함선이나 비행기를 탈취하려는 행위를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다중의 힘으로 폭행, 협박 또는 손괴 행위를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폭발물을 사용하여 사람의 생명, 신체 또는 재산을 해하거나 그 밖에 공공의 안전을 문란하게 한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구금된 자를 도주하게 한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더욱이 사람을 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국가보안법뿐만 아니라 국가보안법이 근거를 들고 있는 형법의 수십 개 조항을 봐도 이들을 행동으로 처벌할 근거는 없습니다. 반대로 이들이 설사 정부 당국에게는 비판적이고 더 나아가 저항했다 할지라도 이들의 행동은 하나 같이 평화애호적이었으며 민중친화적이었으며 사회진보의 방향과 일치했습니다. 이들은 분단을 척결하고 통일을 염원했으며 독재를 거부하고 민주를 열망했습니다.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투쟁했습니다.

국가보안법은 결국 맑스가 말한 행동이 아닌 사고를 처벌하는 "경향단속법"입니다. 공안당국이 원하지 않는 방식의 양심과 신념을 소유했다는 것이 이들이 처벌 받은 이유입니다.




죽은 나뭇가지 줍는 게 절도라는 산림소유자들의 탐욕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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엥겔스와 맑스, 그리고 맑스의 딸들 (뒷줄 왼쪽부터 엥겔스와 맑스, 앞줄은 맑스의 딸들)



엥겔스는 "맑스가 바로 산림도벌법과 모젤 농민들의 상태에 관한 문제들에 손을 대면서 단순한 정치적 관심에서 경제관계로 옮아가게 되었으며, 따라서 사회주의로 향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을 종종 들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청년 카를 마르크스가 정치경제학과 계급투쟁에 관심을 갖게 된 결정적인 계기로 꼽히는 ‘목재 절도’ 연구를, 공통장에 입각해 풀이하는 대목도 흥미롭다. 19세기 초 프로이센은 라인강 유역의 삼림을 엄격히 통제하고 농민들의 삼림 범죄에 대한 처벌을 강화했는데, 그 결과 1836년 프로이센에서 제기된 전체 20만여건의 기소 가운데 15만건이 목재 절도 등 삼림 범죄에 관한 것일 정도였다. <라인신문> 기자였던 마르크스는 이 문제를 다섯편의 기사로 다뤘지만, 당시로선 그 정확한 의미를 꿰뚫어볼 수 없었다고 한다."(최원형 기자, 우리 모두의 땅과 숲을 훔친자는 누구인가?…진짜 도둑을 묻다

[한겨레book]

미국 역사가…자본주의로 사유화된 삼림·강 등 ‘공통장’ 문제 천착

1970년대~2008년 금융위기 직후 쓴 글 묶음…공통장 저항의 역사, 2021-10-15)



라인주의회에서는 죽은 나뭇가지를 줍는 것이 절도이며 이것이 산림의 소유권자의 재산권에 심각한 피해를 가져왔기에 절도에 대해 강력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목재를 훔치는 것을 하나의 절도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것(인용자: 목재 절도)이 그렇게 발생한다."(같은 책)



맑스는 이 논리에 대해 촌철살인 이렇게 반박합니다.



 "이 유추에 따르면 바로 그 입법자는 다음과 같이 결론지어야 했을 것이다. 즉, 따귀 때리는 것이 죽이는 것으로 간주되지 않기 때문에 따귀 때리는 것이 그렇게 빈번하게 발생한다고 말이다. 따라서 따귀 때리는 것은 때려 죽이는 것이라고 판결한다."



도벌과 땔감 줍기는 성격이 전혀 다릅니다. 성격이 다른 사안을 하나로 묶어서 가난한 민중을 범죄시 하려는 산림소유자들의 행위야말로 범죄적입니다. 



 "벌채된 목재가 제3자로부터 훔쳐진다고 할 때, 벌채된 목재는 소유자의 생산물이다. 벌채된 목재는 이미 가공된 목재이다. 즉 소유물과의 자연적 연관을 인위적인 연관이 대신하는 것이다. 따라서 벌채된 목재를 훔치는 사람은 소유물을 훔치는 것이다.

그것에 반해 나뭇가지를 주워 모으는 것에서는 아무 것도 소유물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 소유물로부터(자연적으로ㅡ역주) 분리된 것은 소유로부터 분리된다...

따라서 나뭇가지 주워모으기와 도벌은 본질적으로 상이한 사실이다.  대상이 다르고, 대상에 대한 행위도 그에 못지 않게 다르고, 따라서 의향 또한 다름에 틀림없는데, 행위의 내용도 아니고 행위의 형식도 아니라면 우리는 도대체 어떤 객관적 척도를 그 의향에 적용해야만 하는가? 그런데, 이러한 본질적인 차이들을 무시하고 당신들은 그 양자를 절도라고 명명하고, 이 양자를 절도로 처벌한다. 그뿐아니라 당신들은 나뭇가지 주워 모으기를 도벌보다 더 잔혹하게 처벌한다."



관습권리는 역사 속에서 민중의 생활로 굳어진 권리를 말하는 것으로 아무도 이를 처벌할 수 없습니다. 관습권리를 처벌한다면 수백, 수천 년 동안 행해져왔던 민중의 생활상의 자연스런 행위를 범죄로 만드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행해졌던 민중의 행위를 소급 처벌하고 앞으로도 이를 처벌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관습권리들을 빈민들에게 반환할 것을 청구한다. 그것도 한 지역에 국한되지 않는 관습권리, 모든 나라에서 빈민의 관습권리인 그러한 관습권리들을 반환할 것을 청구한다. 우리는 더 나아가서 관습권리는 그 본성상 이러한 최하층의, 기층의 무산자 대중의 권리일 수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불행이 하나의 범죄가 되거나 범죄가 하나의 불행으로 된다면 국가의 지반이 위태롭게 될 것이다."



자연으로부터 얻어진 나뭇가지를 땔감으로 줍는 행위는 자연스러운 행위입니다. 살아 있는 나무와 여기서 자연으로 떨어져 나온 죽은 나무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습니다.  


 "벗겨진 허물이 뱀과 아무런 유기적 연관상태에 놓여 있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른 나뭇가지는 살아 있는 나무와 아무런 유기적 연관 상태에 놓여 있지 않다. 깊이 뿌리박고 있고, 즙이 많으며, 자신의 형태와 개별적인 삶을 위하여 공기ㆍ빛ㆍ물ㆍ흙에 유기적으로 동화하는 나무와 줄기에 대립하는 마르고 유기적 삶으로부터 분리되고 쪼개진 잔가지와 큰가지 속에서, 자연은 스스로 흡사 빈곤과 부유의 물리적 표상이다...

거리에 내팽개쳐진 풍성한 자선이 자선되지 않는 것처럼, 이 자연의 자선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나 빈민들은 자연의 활동 속에서도 그들의 권리를 이미 발견한다. 나뭇가지 주워모으기에서 인간사회의 기본계급은 기본적인 자연력의 산물들에 대립하면서 그것들을 정돈한다...

따라서 빈민계급들의 이러한 관습들 속에는 본능적인 권리감각이 살아 있으며, 그것들의 뿌리는 실정적이고 합법적이다."



맑스는 이 기사에서 가난한 민중의 권리를 강력하게 옹호합니다만, 아직은 산림소유자들의 탐욕이 사적소유 체제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근원적으로 인식하는데 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국가와 법 자체가 지배계급의 폭력적 지배수단이라는 인식까지 이르지 못하고 보편성의 담지자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맑스는 죽은 나뭇가지를 줍는 것을 소유권의 침해라고 주장하는 소유자들의 철면피한 탐욕과 그 이익을 대변하는 의회, 법률을 보며 그 본질에 대한 인식으로 나아가는 지렛대로 삼습니다.


이제 1강을 마치고 2강에서는 공산당선언과 1848년 유럽사회를 뒤흔든 프랑스 2월혁명의 전후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